서희선/ 생태에서 건축으로, 자연에서 집으로 


고충환 | 미술평론가


판화의 확장, 매체와 장르의 경계 넘나들기 

일전 판화 관련 세미나에서 ‘판화에서 판법으로’를 주제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주제 발표에 의하면, 판화와 판법은 다르다. 판화가 판화에 한정된 장르적 특수성을 반영한 개념이라면, 판법은 판화의 장르적 특수성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이용해 판화의 개념을 넘어서는, 결과적으로 판화를 확장하는, 판화의 활용방안과 재사용에 방점이 찍힌 개념이다. 판화에서 판화는 전부이지만, 판법에서 판화는 회화에 부수되는 다른 수많은 도구와 수단 중 하나일 수 있다. 판화도 결국 회화이기에 하는 말이다. 다만, 이처럼 판법을 통한 자기 확장을 위해서는 판화를 충분히 습득해 자기화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판화로부터 자유자재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여기에 회화로는 표현할 수 없는 판법으로 회화를 조력하고 회화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때, 비로소 판화를 넘어서 판화를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희선 작가의 석판화가 그렇다. 석판화의 고유성을 견지하면서도, 석판화를 매개로 회화적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있는, 석판화로 인해 또 다른 회화적 지평을 열어놓고 있는, 그렇게 판화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확장하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볼 일이다. 

찍어낸다는, 그리고 에디션이 있다는 다른 판화와의 공통점, 그러므로 판화의 기본을 제외하면, 석판화는 그 생리가 회화에 가까운 판화, 그러므로 회화적인 판화라고 해도 좋다. 종이든 캔버스든 평면 위에 직접 그린다는(회화의 경우), 그리고 제판 위에 직접 그린다는(석판화의 경우) 바탕의 차이를 제외하면 석판화는 사실상 회화와 다르지 않다. 바탕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식의 직접성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직접 매체를 그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도 유명 화가 중 뛰어난 석판 화가들이 많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바탕이 다를 뿐,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물과 기름의 반발 작용에 착안한 토너가 비정형의 얼룩과 같은 우연성의 도입과 함께 예기치 못한 효과를 가능하게 해 현저하게 회화적인 표현을 실현하게 해준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석판화를 매개로 판화를 확장하는 서희선 작가의 작업은 크게 석판화 고유의 장르적 특수성을 견지한 작업, 석판화에 회화로 리터치를 하거나 다른 매질의 물질을 부가한 경우, 그러므로 판화와 회화가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화면에 중첩되고 혼용된 작업, 그리고 최근 몇 년 전부터 새로이 시도하고 있는 회화로 나뉜다. 소재나 주제로도 구분이 되는데, 판화에 주력한 전작에서는 자연을 상기시키는 모티브, 그러므로 자연 소재를 매개로 한 생태 담론에 무게중심이 실린다면, 집이나 건축물을 소재로 한 근작에서는 기하학적이고 구조적인 형식논리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다르다. 판화에 주력하면서, 판화를 회화에 결부하면서, 판화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판화에서 회화로 넘어가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시, 작가가 어떻게 석판화를 매개로 판화를 확장하는지 볼 일이다. 전통적으로 판화는 소형 판화로 알려져 있다. 책의 소장자를 표시하는 장서표도 그렇거니와, 판화의 전통이 깊은 유럽에서도 판화를 화랑 대신 도서관 중심으로 소장 전시하는 관행이 일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판화 중 이런 소형 판화의 미덕이 살아있는 경우로 엠보싱(돋을새김) 기법으로 만든, 마치 전통 목가구의 철물 장식을 연상시키는, 정치한 묘사가 돋보이는, 나비와 꽃문양을 들고 싶다. 꼭 이 작품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실제로 이런 소형 판화로 특화된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에 입상하기도 했다. 작가가 지향하는 대형 판화는 물론이거니와 소형 판화로 나타난 전통 판화 고유의 미덕에도 작가의 작업이, 감각이 부합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면 되겠다. 

그러면서도 판화를 매개로 한 작가의 지향은 판화의 확장에 있고, 공간 그러므로 전시관행의 확장에 있고, 궁극적으론 판화의 회화화에 있다. 판화의 확장과 관련해 우선해서 논의되는 부분이 스케일이다. 스케일 자체가 회화적 아우라를 발산하는 부분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이런저런 의미 있는 형식실험을 예시해주고 있는데, 단일 판화 자체의 사이즈를 대형화하는 시도와 함께, 그 자체 현대미술의 주요 문법으로도 주목받고 있는 편집과 재구성(브리콜라주와 브리콜레르)의 방법론을 제안한다. 현대미술과 관련해 편집과 재구성은 전에 없던 미디어의 발달 이후 보편화된 창작 방법론으로, 상호 간 유관하거나 무관한 이미지의 편린들을 한자리에 그러모아 편집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제3의 의미 있는 이미지를 창출하고 제안하는 경우로 이해하면 되겠다. 

작가의 작업에서 보면 전사 이미지와 인쇄물 복제 이미지(사진과 인쇄 자체가 이미 판화다)가 회화적 이미지와 혼용되고 혼재된 화면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작가는 그 위에 엉클어진 실오리 같은 오브제를 그려 중첩하는데, 무관해 보이는 이미지, 개념, 사건, 현상들이 알고 보면 보이지 않는 관계의 끈(관계의 망)으로 연결돼 있다는, 그로부터 나비효과가 유래한다는, 불교의 인드라망을 예비하고 있다는, 그러므로 나는 타자라는, 내가 곧 타자라는, 그리고 여기에 초연결사회를 선취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이다. 편집과 재구성을 통해, 그리고 여기에 이미지와 이미지를, 의미와 의미를 하나로 연결하는 망을 통해 형식을 확장하고 의미를 확장한 경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리고 일종의 모음 그림을 예시해주고 있는데, 작은 판화들이 모여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모자이크를 전용한 경우로도 볼 수가 있어서, 그 자체 모자이크 작화 방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편집과 재구성이 또 다른 형식을 얻는 경우로서,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작업과 그 관계를 해체하고 재설정한 경우, 그러므로 부분이 전체에 예속되지 않는, 그 자체 자족적인 존재성을 획득하고 있는 작업이 각각 예시된다. 여기에 이런 편집과 재구성이 확대 적용된 경우로도 보이는데, 큰 액자로 화면을 만들고 그 안에 작은 액자의 그림들을 전시한, 그래서 마치 그 자체 별도의 전시를 위한 벽면처럼 꾸민 작업이 흥미롭다. 그림과 그림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망으로 연결돼 있다는, 서로 영향 관계를 주고받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림 속에 그림이, 액자 속에 액자가 중첩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치 액자소설과도 같은 이중그림과 다중화면이 예비 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런 이중그림과 다중화면은 물론 판화의 확장, 형식의 확장, 그리고 여기에 서사의 확장을 겨냥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작은 판화들을 한자리에 그러모아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 화면을 만드는 작업을 통해, 이를테면 모자이크처럼 그러모은다거나 옆으로 길게 열거하는 것과 같은, 그 자체 이미 판화의 확장이 예비 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기본적으로 가변설치에 대해 열려있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형식을 확장하고, 서사를 확장하고, 판화를 확장한다. 

여기에 액자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때로 액자 자체를, 더러 액자의 형식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여 조형화한 것이 주목된다. 그림의 네 귀에 작은 그림을 배치해 마치 그림의 한정을 규정한 것 같은 경우가 그렇고, 아예 별도의 사각 프레임을 그려, 그 속에 그림을 가두고 있는 것 같은 경우가 그렇다. 판화로 표상되는 세계(모든 그림은 저마다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한정하고, 규정하고, 정의하려는 무의식적 욕망 혹은 회화적 욕망이 표출된 경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액자 그림에서 병풍 그림으로 넘어간다. 모자이크식의 판화에 액자라는, 그리고 병풍이라는 프레임을, 의미론적으로는 개념 규정(판화로 표상되는 세계를 자신만의 개념으로 규정하는)을 적용한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림이 아닌 실물, 그러므로 생활 속 오브제를 도입하기도 하는데, 액자라는 실물이, 병풍이라는 실물이 확대 적용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그 자체 판화를 설치작업으로까지, 그러므로 설치판화로까지 확장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의미론적으로는 그림 바깥의 현실과 그림 속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들면서 현실 인식을 확장하고 있는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모든 형식실험을 통해 작가는 판화의 확장을 지향하고, 궁극적으론 판화의 회화화를 겨냥하고 있다. 에디션이 없지 않지만, 에디션에 한정되기보다는 에디션으로부터 자유로운 모노프린트, 그러므로 그 존재 방식이 사실상 일품 회화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일품 판화를 통해 주로 형식 실험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모노프린트 자체가 이미, 그리고 여기에 판화와 회화를 혼용한 혼합매체 자체가 이미 작가의 회화적 지향을 말해주고 있는 부분도 있다. 

이로써 발터 벤야민이 거두어들였던 아우라를 되찾는, 아우라의 상실을 재고하게 만드는 일이 지금 여기에, 다름 아닌 작가의 작업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최소한 판화를 매개로 한 회화적 형식실험이 일어나고 있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고, 이로써 또 다른 회화의 지평을 열어놓고 있는 것만큼은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판화를 형식 위주로 살폈다면, 이제 내용, 그러므로 주제와 소재를 중심으로 그 의미론적인 측면을 살필 차례다. 


Mercy, 연민과 자비 사이(1997-2024)  

Mercy. 연민을 뜻하고 자비를 뜻한다. 자기를 향하면 연민, 그러므로 자기연민이 되고, 타자를 향하면 자비가 되는, 중의적이고 양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타자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자기가 대상화한 타자, 자기를 대상화한 타자, 자기를 대리하는 타자, 그러므로 일종의 자기_타자란 점에서 자비와 연민은 하나로 통한다. 상호 규정적인 타자(실존주의적 타자), 윤리적 연대로 얽혀있는 타자(레비나스의 타자)로 나타난, 주체와 타자 간 관계 인식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쉽게 말해 타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연민하는 것이 되고, 타자를 환대하는 것은 곧 자기를 맞아들이는 행위와도 같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자신을 연민하는지를 보자. 비교적 초기에 나타난 모티브 중, 예컨대 사각형의 틀에 갇힌 새와 춤추는 인형을 통해서는 자기연민을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발화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후 이어지는 존재 일반을 향한 연민, 그러므로 존재론적 연민과 타자를 향한 시선이 발아하는 씨앗 모티브라고 해도 좋다. 상대적으로 더 간접적인, 그러므로 암시적인 경우로는 고치를 들 수가 있을 것인데, 여기서 고치는 꿈을 꾼다. 성충으로의 변태를 예비하는 꿈을 꾸고, 화려한 변신을 기대하는 꿈을 꾼다. 이후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성충, 그러므로 나비와 나방의 출현을 예고하는 모티브라고 해도 좋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이런 고치 형태의 모티브를 그림(판화)으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봉제 인형의 형태를 빌려 제안하기도 하는데, 판화를 설치판화로 확장하는 부분이 있다. 천 표면에 프린트된 이미지 역시 판화라는 점에서 그렇고, 여기에 봉제 인형에 반영된 바느질(그 자체 실을 동반하는, 그러므로 시간의 메타포를 끌어들이는)이 여성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 관련해서, 작가의 작업을 여성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자연 모티브를 매개로 한 생태주의와 여성주의가 결합 된 생태여성주의(에코 페미니즘)로 볼 여지가 있고, 다른 작업에서보다 봉제 인형을 소재로 한 이 작업에서 특히 그렇다. 
이런 고치 외에 겉과 다른 하얀 속살을 보여주고 있는 양파, 자기 속에 생명을 예비하고 있는 볍씨, 새의 깃털을 품고 있는 알, 물속에 부유하는 파충류의 알집,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바다로 표상되는, 존재의 유래를 떠올리게 만드는 조개와 같은 형태의 모티브가 이렇듯 자기연민으로 나타난, 자기_타자와 존재론적 타자를 향한 자비로 나타난, 그리고 여기에 생태주의(그 자체 생명 사상과도 통하는)로 나타난 주제 의식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우와 왕관, 그리고 통로, 우화적인(2017-2020) 

여기에 여우와 왕관과 통로가 있다. 보란 듯이 드러내놓고 그려져 있다기보다는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숨어있다. 식물과 같은, 집과 같은 다른 모티브에 가려 숨어있지만, 그림을 견인하고 주제를 리드하는 결정적인 모티브다. 아마도 <어린 왕자>에서 온 모티브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우(아니면 어린 왕자)로 대리되는 존재가 현실과 비현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성장해가는,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불교에서의 진아)를 찾아 나서는 성장소설을 그림으로 각색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에서 통로는 관문이다.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성인 의식(성인식)과 통과의례를 표상할 수도 있겠다. 현대적 담론으로 치자면,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건너가는 단계(자크 라캉)를 표상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 그림 속 통로가 그림 속 모티브를 집으로 만들어놓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숲에 통로가 있으면 숲이 집이 되고, 나무에 통로가 있으면 나무가 집이 되는 식이다. 숲속에 있는 집을, 나무로 만든 집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숲을, 나무를, 그러므로 자연을 집(존재가 유래하고 돌아가는, 존재를 낳고 거두어들이는)의 원형적 메타포로서 가정해놓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나아가 통로는 다른 무엇에도 의탁하지 않은 채 그림 속에 뜬금없이 그려져 있기도 한데, 아마도 그림 자체를, 그림 그리기 자체를 통로로 만들고 관문으로 설정해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그림은, 그림 그리기는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그렇게 다른 세상을 열어놓는 행위이고 과정일 수 있다). 

이 일련의 그림에서 흥미로운 모티브가 손이다. 숲으로, 나무로, 각종 식물 문양과 같은 자연 이미지와 유기적 이미지로 뒤덮인 손이다. 손에도 역시 통로가 있어서 손 자체를 또 다른 집으로 설정해놓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손바닥에 새겨진, 몸에 아로새겨진 문신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원주민과 인디오의 문명권에 나타난 문신은 단순한 장식 이상이다. 단순한 미의식을 넘어 주술적인 의미기능을 실행하는 살아있는 기호다. 사람을 이롭게도 하고, 해롭게도 하는(흑마술). 그리고 정체성을 상징한다. 주로 부족의 집단 정체성과 관련해서, 나는 바람의 아들이라는, 독수리와 같이 용맹하다는, 아니면 여우처럼 꾀바르다는. 이처럼 손바닥에 생명과 자연 이미지를 아로새겨놓고 있는 작가의 작업은 아마도 정체성과 함께 생태 담론에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집요한 그리기, 편집증적 그리기가 예시되고 있는 점도 주목해볼 부분이다. 식물 문양과 같은, 새의 깃털 문양과 같은, 자잘한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라인 드로잉의 형태가 그렇다.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를 잊는, 어느 정도 자기수행적인 측면도 있을 것이다. 또한 눈에 띄는 변화로, 배경 화면이 단순하게 정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종전의 그림들이 비정형의 얼룩 위에 모티브가 부유하는, 그렇게 배경 화면과 모티브가 경계를 허무는, 그렇게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는 경우라고 한다면, 이 그림들에서는 텅 빈 화면 위에 모티브가 올려져 있어서 모티브의 주목도가 높다는 점이 다르다. 이처럼 정리된 화면과 두드러져 보이는 모티브와의 대비가 강조되는 경향은 이 그림들에서처럼 텅 빈 경우는 아니라고 해도, 이후 집을 소재로 하고 건축물을 모티브로 한 본격적인 회화 작업에도 의미 있는 형식논리로 계승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연결된 집, 정체성 문제(2024-2025) 

그렇게 작가는 나무와 식물과 숲으로 표상되는, 그러므로 자연으로 표상되는 집을 짓는다. 존재가 유래하고 돌아갈, 존재를 낳고 거두어들이는 자연에 공감하는 평소 작가의 자연관이, 세계관이 반영된 집이다. 집이라고는 해도, 관념적 의미로 소환된 것인 만큼 그 집은 집의 감각적 꼴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마침내 근작에서 작가는 한눈에도 감각적 닮은꼴을 한 집을 그리고 조형한다. 

집은 정체성이 거주하는 집이다. 그러므로 집이 곧 정체성이다. 집의 안녕을 묻는 물음에는 정체성의 안부를 묻는 물음이 포함돼 있다. 여기에 집은 중의적이고 양가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나에게 집이 자신을 보호하면서 고립시키는 것이 그렇고, 너에게 집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그렇다. 다시, 그러므로 집은 욕망이 거주하는 집이다. 그러므로 집이 곧 욕망이다. 그렇게 근작에서 작가는 정체성의 집을 짓고, 욕망의 집을 짓는다. 자연을 대상화한 생태 담론으로부터 집으로 표상되는 존재론적인, 사회학적인,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관심 축이 옮아왔다고 해야 할까. 

한편으로,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집은 엄밀하게 집이라기보다는, 집들이 모여있는 건축물이라고 해야 한다.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는 경우, 그러므로 존재와 존재, 존재와 타자 간 관계를 매개로 형성되는 공동체 사회를 표상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느 정도 관계를 매개로 한, 사회로 표출되는, 사회학적 측면으로 볼 수도 있는 여지를 열어놓고 있다.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건축물은 말하자면 그저 집과 집들이 연결된 큰집이라기보다는, 집들의 공동체, 사람들의 공동체, 정체성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그러므로 존재와 존재 간 관계를 매개하는, 관계의 건축(관계를 설계하고 건축하는?)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실은 관계를 주제화하기 위해 건축물을 끌어들인 경우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여기에 형식적으로 흥미로운 점을 덧붙이자면,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 하나의 평면적인 실루엣으로 나타난 건축물의 형태가 표면을 감싸고 있는 중첩된 기하학적인 선과 결합 된 것이 마치 크리스토의 프로젝트 드로잉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천으로 건축물을 싼 연후에 노끈으로 봉한, 크리스토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해도 좋을, 포장 미술을 떠올리게 한다고 해야 할까. 존 버거는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것에 예술의 존재 의미가 있다고 했다. 작가는 아마도 존 버거가 제안하고 크리스토가 예시해준 예술의 실천 논리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마주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내가 사는, 네가 사는, 더불어서 우리가 사는 존재의 집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