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경/ 그림자 단상, 그림자의 존재 방식에 대한 


고충환 | 미술평론가


경계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분명한 흐름선으로, 단정할 수 없는 영역을 의미한다...답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길을 잃는 것을 통해 작업 세계를 구체화할 수 있는(그러므로 역설적인)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작가 노트) 

서 있는 그림자, 주제에 대하여. 평소 누워있던 그림자가 일어서면 죽는다(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여기서 일어서는 그림자는 아마도 심연 같은 것일 터이다. 심연이 어떠한지, 언제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지, 일단 빠졌다면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심연에 빠지지 않도록, 심연이 잘 지나갈 수 있게 주의할 일이다(한유주의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여기서 심연은 아마도 불안(존재론적 불안?)과 같은 것일 터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불안은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하는, 현대인의 징후로, 증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불안은 불안정성, 상실감, 의식의 구석, 의식의 사각지대, 그러므로 어쩌면 의미의 바깥(모리스 블랑쇼), 억압된 욕망, 억압된 것들의 귀환(프로이트), 실재계의 돌발적인 출현(자크 라캉), 그리고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슬라보예 지젝)이라는 다른 이름들을 거느리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있다(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 악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판 것인데, 여기서 그림자는 아마도 영혼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도 영혼처럼,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폴 클레는 예술이란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아마도 영혼과 같은, 유령과 같은 비가시적인 것(존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회화의 기원을 보면, 전장에 나가는 애인의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그린, 아마도 인류 최초의 무명 화가로부터, 그리고 물에 비친 자신의 반영상을 붙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은 나르시스로부터(그러므로 에로스를 경유한 죽음, 에로스를 정화하는 타나토스로부터) 회화가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림자를 붙잡는 것에서, 반영상 그러므로 허상(마치 그림자가 그런 것처럼, 감각적 현실이 아니라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상이란 점에서, 감각적 현실을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존재하는 상이란 점에서, 엄밀하게는 실상으로도 허상으로도 부르기 어려운)을 붙잡는 것에서 회화가 유래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성경은 이런 그림자를 그리고, 반영상을 그린다. 그리고 그 그림들을 그림자가 되었을 때, 바람의 그림자, 빛의 그림자, 빛을 비우는 그림자, 느끼는 그림자, 또 다른 그림자, 서 있는 그림자와 같은, 그림자 풍경이라고 부른다. 다르게는, 경계의 풍경이라고도 부른다. 그에게 경계는 구름처럼 흐르는 경계, 움직이는 경계, 흔들리는 경계, 빛처럼 산란하는 경계, 그러므로 흩어지는 경계, 안과 밖을 넘나들면서 수렴하고 확장하는 경계이기도 한 것이어서 하나의 정의라기보다는 차라리 시(지)각적인, 감각적인, 감성적인, 그리고 때로 심리적인 동인과 작동원리라고 해도 좋다. 그로부터 그림자로 표상되는 것들이 생성되는, 이를테면 심연과 같은, 불안과 같은, 영혼과 같은, 그러므로 유령과 같은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이 출현하는 처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막간, 부재 하는 풍경, 흔적으로 부재를 존재케 하는 풍경. 숲속 정원에 수영장이 있다. 물이 빠진 수영장은 텅 비어있고, 찾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이 떠나면서 수영장도 버려졌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자기를 실현한 경우를 존재다움이라고 했고, 그 존재다움이 드러나는 순간을 존재의 현현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텅 빈 수영장이 버려졌다는 상황 논리를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고, 버려짐으로써 마침내 하나의 성격을 얻고 있다. 버려짐다움을 매개로 하나의 사물에서 하나의 존재로 탈바꿈(승화?)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마침내 정서를 파고들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있다고 해야 할까. 하이데거는 농부가 벗어놓은 흙 묻은 신발이 농부보다 농부다움을 더 잘 실현한다고도 했다. 부재가 존재를 증명하는,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부재의 미학이다. 그렇게 물 빠진, 텅 빈, 버려진 수영장이 부재 하는 사람들, 비가시적인 존재들, 그러므로 어쩌면 유령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버려진 수영장과 함께, 작가의 다른 그림들에서도 확인되는 부분이다. 

샹들리에, 희미한, 가물거리는 불빛. 버려진 사물은 또 있다. 샹들리에다. 작가는 버려진(아니면 잊힌, 간과하는) 사물에 관심이 많고, 버려진 것들에 끌린다. 작가의 존재론적 관심사라고 해도 좋고, 감성적 체질이라고 해도 좋다. 버려진 것들, 버려질 운명에 처한 것들, 그 운명을 감수하면서 사는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환기에 공감하는 편이다. 버려짐은 말하자면, 그림자의 이름으로 호출되는, 그림자의 목록에 등재된, 그림자가 그림자다움을 실현하는, 그렇게 그림자가 자기 존재를 현현하는 또 다른 순간이고 경우라고 해도 좋다.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모든 사물은 재빠르게 시간 속으로 흡수되고, 향수를 자극하는 사물 대상으로 전이된다고 했다. 그렇게 샹들리에는 하나의 사물(기능적 사물)에서 향수를 자극하고 정서를 환기하는 사물 대상(존재론적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희미한 기억처럼 샹들리에의 불빛이 가물하다. 샹들리에는 사람들의 애와 증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샹들리에가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샹들리에의 가물한 불빛이 부재 하는 사람들, 비가시적인 존재들, 그러므로 어쩌면 유령들을 불러오고 있었다. 여기에, 유리창에 비친 샹들리에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유령 같다는 느낌에도 주목해볼 일이다. 

바람의 그림자와 빛의 그림자. 그리고 작가는 달리는 차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본 풍경을 그렸다. 바람이 만드는 흔적과도 같은 흔들리는 풍경이고, 흩어지는 풍경이다. 결정적인 형태로는 붙잡을 수 없는 풍경이다. 이처럼 바람은 흔적을 만들고 그림자를 만들지만, 정작 바람을 실감하기는 어렵다. 바람이 흔드는 풍경으로부터 바람을 추상할 수 있을 뿐. 이처럼 다른 사물 대상에 의탁해 자기를 드러내는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시와 비가시가 모호한 경계 위에 정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 방식이 그림자의 그것과도 통한다. 그렇게 흔들리는 풍경, 흩어지는 풍경은 어쩌면 바람이 자신의 그림자를 감각의 표면 위로 밀어 올리는 순간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매개되면서 풍경이 풍경의 속살을 보여주는 순간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바람의 그림자란 그런 의미일 것이다. 풍경에 기생하는 바람을, 풍경의 이면(혹은 행간)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의 풍경이 다른 풍경을 밀어내면서 들어오는, 그렇게 풍경과 풍경이 포개지는, 풍경 속 시간(시차)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어쩌면 모든 풍경이 붙잡을 수 없는 풍경이라는, 다중적이고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풍경이라는, 겹풍경이라는, 풍경의 알레고리가 도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이 그렇고, 빛이 그렇다. 작가는 특이하게도 무지개를 빛의 그림자라고 부른다. 아마도 허공에 뜬 색깔로 빛이 자기를 드러내는 순간을, 그렇게 빛이 자기를 증명하는 계기를 의미할 것이다. 작가는 향후 작업에서 촉각성에 대한 형식실험을 예고하고 있는데, 그렇게 촉각시(보면서 만져지는)의 가능성을 예시해주는 주제고 부분이라고도 생각이 된다. 

또 다른 그림자, 풍경의 응시, 혹은 응시하는 풍경. 내가 풍경을 쳐다보면, 풍경도 나를 쳐다본다. 시선과 응시가 교차하고, 응시가 시선에 반응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등을 쳐다볼 때, 등도 나를 쳐다본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처럼 응시하는 풍경, 그러므로 풍경의 눈은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림자의 그것과 통한다. 그렇다면 풍경의 눈은 언제 어떻게 가시화하는가.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을 때, 어둑한 숲속에 들어섰을 때, 사위가 온통 고요할 때, 친근한 것(곳)이 불현듯 낯설게 느껴질 때 잠자던 풍경이 눈을 뜨고, 누워있던 풍경의 그림자가 일어선다. 응시를 통해 풍경이 자기의 그림자를 가시의 표면 위로 밀어 올리는 순간이라고 해도 좋다. 이처럼 풍경의 눈, 그러므로 풍경의 그림자는 응시를 통해 자기를 가시화하고, 허상을 통해 자기를 가시화한다. 감각적 실제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을 상이고, 실체가 없는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상이지만, 그렇다고 비현실적 이미지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반영상이 그렇고, 거울상(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도시 건물의 유리 벽에 비친 풍경을 그린다. 그림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는 유리 벽 바깥에 있는 풍경과 유리 벽에 비친 풍경, 그리고 유리 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하나의 화면에 중첩되고 포개진다. 때로 격자 형태의 철제 프레임이 유리 벽을 연속적인 단위구조로 나누면서, 그림도, 그림 속 풍경도 나누어진다. 그렇게 그림 속 그림이라는, 이중그림과 다중화면이라는 지경이 열리고, 감각적 실제와 반영상, 실상과 허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차원이 열린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혹 감각적 현실마저도 감각적 현실의 그림자, 감각적 현실의 환영(유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게도 된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반영하고 반영되는 유리 벽에 비친 풍경의 그림자(풍경의 유령들이라고 해도 좋을)를 매개로 한 작가의 환영 놀이가 추후 작업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