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 부유하는 형태와 색으로 이름을 부르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시의 상징적이며 순결한 언어가 좋다(작가 노트). 문학은 크게 시와 소설로 나뉜다. 소설이 서사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시는 상징적인, 암시적인, 함축적인 의미를 지향하는 것이 다르다. 이수경 작가는 추상회화를 그린다. 그 추상회화가 시를 닮았다. 추상회화도 시처럼 상징적이고, 암시적이고, 함축적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좋아하는 시와 작가가 그리는 추상회화가 서로 부합한다. 시와 회화가 서로 통한다고 해도 좋고, 회화가 시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해도 좋다.
한편으로 작가의 말을 뜯어보면 상징적인 시와 순결한 언어가 서로 부닥친다. 한편으로 상징적이고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언어가 좋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순결한 언어도 좋다? 시와 관련해서 순결한 언어란 때 묻지 않은 언어, 오염되지 않은 언어를 의미한다. 의미와 절연된 텅 빈 의미, 언어와 절연된 텅 빈 언어 자체를 의미한다. 여기서 텅 빈 의미, 텅 빈 언어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전제도 없이 의미의 영도 지점에서 시작하고, 가고, 닿는다는 의미이다. 의미를 의미의 바깥(모리스 블랑쇼)으로 확장하고, 언어를 언어의 바깥으로 확장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외관상 부닥치는 것처럼 보이는 상징적인 시와 순결한 언어는 의미를 매개로 다시 서로 부합한다. 의미의 바깥도 의미이다. 언어의 바깥을 지향하는 것도 움직이는 언어의 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상징적인 시와 순결한 언어가 협동해서 재현적인, 서사적인, 자기지시적인, 자기동일적인 의미의 바깥으로 의미를 확장한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어떤 전제도 없이 시작하고, 가면서 길을 열고, 그 와중에 예기치 못한 형태에 도달하는 그리기를 지향한다고 해도 좋다. 어떤 전제도 없이 시작하고, 가면서 의미를 얻고, 그 와중에 우연한 의미에 도달하는 열린 그리기를 지향한다고 해도 좋다.
부연하면 비록 어떤 전제도 없이 시작한다고는 했지만, 작가도 모르는 사이에 작가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우연한 일상과 무의식적 기억과 같은 것이 배어있어서 그것이 때로 알만한 형태를 암시하고, 알만한 의미를 상기한다고 해도 좋다.
부유하는 형태들(작가 노트). 작가는 평면에서 시작한다. 색면에서 시작한다. 주지하다시피 평면(성)은 형식적 환원주의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제일 원칙으로 알려져 있다. 클레멘테 그린버그의 주장으로, 이로써 그린버그는 색면추상의 길을 열었다. 그렇다면 평면에서 시작하고, 색면에서 시작하는 작가는 그린버그주의자인가. 그렇게 보인다. 최소한 회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린버그를 참조하는 모더니스트로 보인다. 시점이 그렇다는 것이지, 과정과 결과를 보면 또 다르다. 평면에서 시작해 평면으로 귀결되는, 색면에서 시작해 색면으로 환원되는 그리기와는 다른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고 있고, 여기에 작가만의 회화적 아이덴티티가 있다. 그렇다면 평면으로 귀결되고 색면으로 환원되는 모더니즘 추상회화의 자장 속에서 작가는 어떻게 일탈하는지, 그러므로 어떻게 자기만의 형식을 열어놓는지 볼 일이다. 어떻게 바깥을 예시하는지, 그러므로 어떻게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확장하는지 볼 일이다.
작가는 부유하는 형태를 그린다고 했다. 실제로도 그림 속 형태는 평면 위에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고, 무중력 상태를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평면 위에 콜라주 한 형태처럼도 보인다. 그렇다면 왜 부유하는가. 왜 부유하는 형태인가. 형식논리와 감각의 소산이겠지만, 이로부터 뿌리도 없이, 정처도 없이 떠다니는 현대인의 알레고리를 본다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의 비약이라고 할까. 현대적인 감각의, 작가의 그림에 공감하고 어필하는 부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부유하는 형태가 평면에서 일탈하고, 평면을 확장하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탈하고 확장하는가.
작가의 그림은 마치 색면 테이프로 전면을 봉한 연후에, 종이 오리기라도 하듯 색면의 일부를 칼로 오려내 그 이면의 속살이 드러나 보이게 만든 그림 같다. 색면의 일부를 칼로 오려내 젖혀놓은, 그렇게 젖혀진 부분에 색면의 안쪽에 숨겨진 이미지가 드러나 보이는, 그렇게 색면의 바깥쪽과 안쪽 면이 하나의 화면에 중첩되고 포개진 그림도 같다. 더 입체적인 경우도 있는데, 종이 오리기를 한 연후에, 손으로 그 형태를 잡아 올리면 형태가 평면 밖으로 돌출될 것 같은 느낌의 그림도 있다. 평면 위에 망 구조의 선이 만든 형태가 중첩돼 보이는 것에 연유한 것인데, 그 형태가 종이 공작을 떠올리게 한다. 식물의 잎맥과 같은, 풍경과 같은, 솔방울과 같은, 볍씨와 이삭과 같은 자연 소재를 떠올리게 한다. 마구 엉클어진 실타래를 떠올리게 하고, 에코백과 같은 망태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어떤 전제도 없이 시작하고, 가고, 가닿는 이미지, 생성하는 이미지, 이행하는 이미지인 만큼 다른 임의의 형태를 떠올려도 무방한 그림이다. 그렇게 평면 속에 공간적 깊이를 열어놓고 있는,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드는 그림이다.
물론 작가가 실제로 색면 테이프(혹은 시트지)를 사용한다거나 종이 오리기를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연상작용과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보면 되겠다. 그만큼 평면성이 강조돼 보인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평면을 유지하면서 평면에서 일탈하는, 평면을 견지하면서 평면을 확장하는, 평면과 색면으로 나타난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준칙을 재설정하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작가 식의 형식논리로 보면 되겠다.
평면적 회화, 평면의 확장/ 조각적 회화, 회화에서 오브제로/ 설치회화, 공간의 확장. 그렇게 작가는 평면 속에 공간적 깊이를 열어놓는 방법으로 평면을 견지하면서 평면을 확장한다. 평면 속에서 평면을 확장한 것인데, 나아가 실제로도, 그러므로 평면 밖으로도 확장한다. 변형 캔버스를 도입한, 채색 목판을 도입한 일련의 작업이 그것으로, 타블로의 한정에 구속받지 않는 만큼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운 공간 운영이 가능해진다. 색면의 변주라고 해도 좋을, 채색 목판 조각을 짜 맞춰 하나의 유기적인 형태를 얻는 작업이다.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기저로 한 것으로, 특이하게도 부분과 부분이 만나는 선이 반듯하지 않다. 직소로 일일이 직접 절단했다고 했다. 레이저 커팅이라면 반듯한 선을 얻을 수 있겠지만, 작가는 반듯한 선이 싫다. 자연처럼, 자연의 생리처럼 틈을 포함하고 있는 유기적인 선이 좋다. 그 틈새가 작품이 쉬는 숨이 지나가는 길(숨길)이며 통로(숨통) 같다. 평소 작가의 감각적 체질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만든 형태를 작가는 벽에도 걸고, 바닥에도 깔고, 공간에도 세운다. 벽에 거는 경우, 타블로의 변형된 형태 혹은 타블로의 확장이라고 해도 좋다. 바닥에 까는 경우, 그리고 그 자체 지지대 역할도 하는 나무 구조물과 함께 공간에 세운 경우, 가변설치가 가능한, 공간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공간 경험을 재설정하는 공간설치작업으로 확장된다. 상대적으로 더 적극적인 경우로 장소 특정적 작업이 주목되는데, 오래된 성당이나 고성에 설치한 작업이 그렇다. 회벽 색과 벽돌색으로 고색창연한, 그리고 여기에 색 유리창을 통과한 자연광마저 가세한, 성당과 고성에 매개되고 개입된 다채로운 색면 회화가 고대와 현대가 만나는 것 같은, 고대와 현대가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그 자체 시간의 집이라고 해도 좋을 유적에서의 시간 경험을 재설정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일련의 문패 작업이 주목된다. 문패에 아로새겨진 저마다의 이름을 다채로운 색면이 조합되고 재구성된 형태로 번역(해석)한 것인데, 정체성 문제에 대한 평소 작가의 관심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향후 작가의 작업이 사회학적인 관심사를 싸안는, 확장 가능성을 예시해주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다채로운, 오색찬란한, 천태만상의, 사람들 저마다의 수만 가지 이름을 불러주는, 그렇게 일일이 부르면서 대화에 초대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문패 작업을 포함한 작가의 다른 작업 전체가 어느 정도 그런 작업이라고도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