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소리
이선영(미술평론가)
1. 광장에 들어서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인간 사회를 틀어쥔 지배 질서는 법을 비롯한 상징적 언어를 통해 작동하며, 그 사회에서 태어나는 이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종의 환경이 된다. 하지만 지배적 상징적 질서의 전환이 요구될 때 예술은 유효한 접속 지점을 발견한다. 예술은 효과가 없어서 역기능조차 발휘하고 있는 무력한 자율성이나 형식주의를 벗어나 활기를 되찾는다. 새로운 질서를 위해 과도기의 국면에서 각질화된 사회의 규칙은 현실계를 거쳐 새로운 질서로 거듭날 것이다. 한 방향만을 보는 발전주의는 예술을 주변화시킨다. 현대사회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은 예술이나 예술가의 몫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지나갔다고 믿어지는 전쟁과 혁명, 국가폭력 등이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심지어는 발전된 과학기술에 의해 더욱 격화되는 양상 속에서 작가들 또한 상호작용 한다. ‘역사’와 더불어 ‘혁명의 시대’(에릭 홉스봄)가 저물었다는 진단은 변화의 주체에 대한 기대와도 연동된다. 공동체에 대한 기대 또한 이전 시대와 다르다.

미술관 로비, 에코 누그로호(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전남도립미술관에 있음)
모리스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공동체란 지나치게 가치가 부여된 어떤 단일성으로 융합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가시적 공동체나 기반과 조직을 가진 공동체가 아니라 타인과의 급진적 소통의 체험’(장 뤽 낭시)이 중요하다. 공동체란 일시적일 따름이다.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은 무명의 영토인 바깥에서 타자와 대화적 상상력으로 대응한다. 타자들은 연결되고 연결한다. 그들의 언어는 미술 고유의 감각으로 간주된 시각보다는 소리에 주목하는 특성을 보인다. 작품들에는 비명부터 함성, 아우성같은 말 이전의 소리까지 잠재해 있다. 전시 서문에는 ‘점유하다(Occupy)’가 ‘단순히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넘어, 비어 있던 자리에 이야기를 만들고, 침묵 위에 목소리를 더하는 행위’라고 밝힌다. 미술은 여러 감각 중 가장 고차적이라고 평가되는 시각과 관련되지만 시각성, 내지 시각중심주의 대한 한계 또한 지적되어 왔다.
모든 것을 코드화시켜 보고 보이는 관계로 만드는 소비사회에서 물신주의는 필수다. 시각성에 대한 여러 이론이 있지만, 그것은 도시 체험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리차드 세넷은 [살과 돌]에서 ‘근대 도시 개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개별자들은 도시에서 침묵에 빠져들었다’고 진단한다. 그에 의하면 ‘길거리, 카페, 백화점, 철도, 버스, 지하철은 대화의 무대가 아니라 시선의 장소가 되었다. 근대 도시에서 이방인 간의 주고받는 말이 유지되기 힘들 때 주변 환경을 바라보는 개인이 도시에서 느낄법한 연민의 충동은 잠시 삶의 단편 사진을 보며 반응하는 몇 초 뿐이다....’ 리차드 세넷이 묘사한 ‘순수하게 시각적인 아고라’는 변화를 원하는 이들에 의해 변화되어야 했다. 화려하고 거대한 스펙터클로 대중을 압도하여 찍소리도 못하게 하는 시각적 관례가 많아지고 있다. 어디선가 만들어진 것, 주어진 것을 조용히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그것은 독재자들이 하나같이 스펙터클한 관행을 좋아하는 이유 아닐까.

관객참여형 퍼포먼스
‘Occupy: 우리는 연결되고, 점유한다’ 전이 염두에 두는 공간은 광장이다. 광장이 호명된 것은 얼마 전의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광장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어 왔기에 그 반향도 크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권력은 가두와 시장터, 집회장, 의회, 지방정부 및 중앙정부에서 점차로 멀어지고 있고, 시민의 통제권을 벗어나 인터넷 네트워크의 치외 법권 지대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금 존재하는 권력들이 가장 애호하는 전략적 원칙은 도피, 회피, 이탈이며 이것들은 불가시성을 이상적 조건으로 삼고 있다. 공적 공간에서 더욱더 공전 현안들이 사라져가고 있다’(지그문트 바우만) 평소의 광장은 서로의 보행을 방해하지 않고 지나치며 조용히 시선이 교차 될 뿐인 곳이지만, 작년에 우리의 집단적 경험은 그곳이 노래하고 말하고 외치고 울려퍼지는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시각은 이성적 관념이 중시하는 이상적 감각으로, 집중적이며 지배적이다.
모종의 질서가 지배하는 시각적 공간은 변화하기 시작하는 순간 청각적 공간이 된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시각적 관점의 세계는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공간으로, 눈의 세계는 상대적으로 냉정하고 중립적이지만, 말하기와 듣기에 바탕한 구술적 세계는 다양성이 공명한다고 말한다. 맥루한에 의하면 구술문화의 특징은 나와 공동체의 분리, 사고와 행동의 분리, 행위와 텍스트의 분리, 주체와 객체의 분리 등이 없다. 거기에는 선형적인 시각적 공간에 대비되는 청각적 공간(acoustic space)이 있다. 청각성이 고양될 때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다차원적이고 다문화적라는 것이며, 맥루한은 이를 바탕으로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부각시켰다. 물론 맥루한이 말하는 청각성은 원시적 구술성이 아닌 근대 인쇄 문화를 발판으로 2차적 구술성과 관련된다. 미디어의 역사는 구술성에서 시각성으로 변해왔고 인쇄에 바탕 한 근대적 시각문화는 미디어의 발전에 따라 그 비중이 달라지고 있다.

에르칸 오즈겐 전시전경

아티스트 토크
국내외 작가들이 함께 하는 국제전은 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대답이 있고, 대화적 상상력까지 더해진다. 제도와 결합된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지배적 규칙을 자연적 운명으로 포장한다. 이 전시의 작품에서 소리는 노동하고 저항하며, 작업하며 수행하고, 고통받고 죽어가는 몸에서 발생한다. 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자연적이 아니라 사회적 측면이 강조된다. 지배적 질서에 의해 타자화된 존재들은 배제 및 자기 보호 본능에 의해 가시화되지 않지만, 살아있는 존재는 특유의 소리를 낸다. 앎과 지배의 대상인 무명의 존재들은 억압적 질서에 발언하고 노래한다. 그리고 같은 운명에 처한 자연 및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던 전통의 소리에도 귀기울인다. 이 전시는 이러한 감각의 전환을 통해 현재를 재배치하기 위한 기억을 호출한다. 그렇게 열린 광장은 일시적이지만 타자들이 연대하는 장이 되어 껍데기만 남은 개인의 자유를 갱신할 미지의 공동체를 일깨운다.
2. ‘Occupy: 우리는 연결되고, 점유한다’ 전의 작품들
당시에 흔할수록 후세에 희귀해진다는 고고학적 역설이 있다. 오늘날 충격적인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많은 뉴스들이 쏟아지지만, 그 의미가 되새겨지기에 정보홍수의 물살은 너무 거세다. 이세현은 예술적 기록을 통해 삶의 기록이 소멸되는 속도를 완화시키려 한다. 그의 사진들은 흐릿한 보도사진 등으로 남아있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현장을 환기시킨다. 오늘날 어떤 사건이 잊혀지는 것은 그것이 은폐되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정보가 대량으로 생산/소비하면서이다. 지나간 사건들과 관련된 작품들은 ‘그렇다, 그래서?’라고 되묻는 냉소적 물음에 대해 뜨겁게 답한다. 예술작품은 그것을 잊으면 다시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단순한 기록을 주목받게 하는 예술적 형식의 힘이 발휘된다. 시공간의 단면인 한 장의 사진은 그자체로 충분히 말하지 않는다. 작가가 던진 장면의 맥락을 복구하려는 노력을 통해 비로소 사진은 말하기 시작한다. 충격적 사건들이 지나간 역사적 장소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여정의 출발점이 된다.

이세현 전시전경

권승찬 전시전경
권승찬의 [무기력한 풍경]은 국민보도연맹(國民報導聯盟)을 주제로 한 회화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1949년에 창설된 이 반공 계몽 단체는 전국 각지에서 최대 120만 명의 양민을 재판도 없이 학살한 악명높은 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계몽은 역설적으로 어둠을 낳은 것이다. 그림과 함께 전시된 설치작품은 관람자가 다가갈 때 ‘탁!’하는 거슬리는 소리를 내면서 조명이 꺼진다. 수많은 억울한 죽음을 낳은 흑역사가 간과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공(反共)이라는 가치가 침해할 수 없는 금기가 되면서 국가 폭력의 억울한 희생자들은 불편한 진실로 남았다. 판화지에 아크릴과 목탄 연필로 어둡게 그려진 죽음의 현장에서 증거는 사라진 상태다. 피해자는 해골이 되었을 것이고 가해자가 모두 단죄받은 것도 아니다. 그가 그린 장면이나 풍경에는 특별한 징후는 없지만, 무엇인가 숨겨져 있을 것같은 불길한 예감은 남아있다. 말 없는 매체인 그림은 침묵한다.
작가는 설치나 영상같은 다른 매체의 지원을 통해 침묵에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서, 누군가 그냥 묻어두려고 하는 사실과 진실을 끌어내려 한다. 중국 작가 진양핑(Jin Yangping)은 파편화된 이미지와 몸을 나열한다. 그것은 그림과 몸이 모두 사물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고문같은 공적 폭력부터 각자 알아서 권력에 맞춰가는 몸은 커튼이나 천막같은 사물과 같은 차원에 놓인다.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권력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곳은 바로 몸이다. 하지만 몸의 단편들을 담은 작품들은 그만큼 연결되려고 꿈틀댄다. 이미지가 안착되는 안정된 화면은 유동적인 캔버스, 금속 고리, 파이프, 옷걸이 등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미지는 편안하게 읽히지 않는다. 즉 쉽게 소비되지 않는다. 몸의 물화는 억압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물화란 우연에 불과한 것을 필연으로 고착화시키는 것이다. ‘현대 예술가로서, 작품은 하나의 목소리’라고 말하는 진양핑이 포착한 단편은 물화를 넘어서 현대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단서가 된다.

진양핑 전시전경

아이작 총 와이 전시전경
홍콩의 아이작 총 와이(Isaac Chong Wai)의 작품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드러난 테러 사건에 주목한다. 모르는 이들에게 난데없이 공격당해 쓰러지는 모습을 퍼포먼스로 구현했다. 중심/주변의 양극화의 산물이기도 한 폭력은 불행의 원인을 주변에서 찾으며, 불행의 결과가 집중되는 곳도 주변이다. 세계화를 통해 마치 만국 간에 평등한 소통과 유통이 이루어진 듯하지만, 지배적 권력은 모든 잘못을 뒤집어 쓰고 단죄되어야 할 희생양을 끝없이 찾아내려 한다. 그의 작품에서 그 희생양은 아시아인이지만, 같은 국민도 그러한 불공정한 분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몸은 억압의 대상이자 저항의 원천이다. 작가는 ‘움직임을 연대와 저항의 한 형태로 활용하고자 했다’고 밝힌다. 국가보안법이 강화되어 공공성이 극도로 위축된 홍콩의 상황은 작가로 하여금 편재하는 일상적 폭력에 눈뜨게 했다. 전시장 여러 곳에 설치된 화면들은 폭력의 무대가 구조적임을 예시한다.
우크라이나 예술가 단체인 오픈 그룹(Open Group)이 연출한 무대는 가라오케와 유사하지만, 마주보는 양쪽 벽에서 상영되는 영상에는 공습이나 긴급 대피같이 전쟁시에 발생하는 불길한 소리들이 나온다. ‘나를 따라 하세요’는 제안으로 실행되는 행위들은 오락적 분위기에 힘입어 재미있는 놀이처럼 다가오지만, 실제로는 끔찍한 기억을 되풀이한다. 그들은 죽음을 노리는 불길한 소리들을 진짜 들었고, 그것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재연한다. 죽음은 한순간이지만 죽기까지 들어야 하는 소리들은 긴 여운을 남긴다. 이 단체의 한 작가도 지금 전쟁터에 있다는 것은 그들의 예술이 그만큼 긴박함을 말한다. 튀르키예 작가 에르칸 오즈겐(Erkan Özgen)의 작품 [원더랜드]에 등장하는 벙어리 소년은 몸짓으로 전쟁통의 시리아에서 탈출한 이야기를 한다. 말못하는 그의 몸짓 언어는 더 처절하게 다가온다. 몸짓 언어와 함께 터져 나오곤 하는 소리는 말이 아니다.

오픈 그룹 전시전경

에르칸 오즈겐 전시전경
하지만 말 아닌 소리의 억양과 떨림은 상황을 더 실감나게 전달한다. 고향을 떠나는 소년이 감당해야 했던 폭력의 강도는 이미 말을 초월한다. 작가는 참혹한 피난 생활을 겪었던 장애 소년을 ‘고향을 잃고 떠나야만 했던 모든 이들의 목소리’로 바라보았다. 루소는 [언어의 기원에 대한 시론]에서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신과 닮은 존재로 느끼고 사고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 이내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전달한 욕구나 필요가 생겨 방법을 찾게 된다’고 말한 다. 루소에 의하면 목소리는 글로 쓸 수 있지만 소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음색 있는 언어에서 언어를 가장 힘 있게 하고, 보통의 문장을 본래의 모습과는 달리 특유하게 만드는 것은 소리와 악센트와 온갖 굴절들’(루소)이다. 에르칸 오즈겐의 작품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권력이 수신되는 단말기로 만드는 시대에, 살아있는 존재에서 나오는 소리의 힘을 전달한다.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그에 동원되거나 피해를 입은 이들을 자신과 동류로 취급하지 않는다. 지배자들은 ‘말’하고 피지배자들은 소리를 낼 뿐이다. 예술은 이 소리를 말로 전환시켜 주고자 한다. 작품 [하레세]는 전쟁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 참전용사들이 무기를 악기 삼아 연주하는 영상으로 재미와 절묘함은 비극을 잠시 잊게 한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같은 생산적인 것을 만들자는 발상은 히피를 비롯한 평화주의자들의 모토였다. 전기기타같은 악기를 속사포처럼 다루는 거친 음악조차도 실제로 죽고 죽이는 전쟁에 비하면 평화로운 놀이에 속한다. 에르칸 오즈겐의 작품에서 악기와 무기는 양극화된 세계관을 대표하는 도구이며 율동적인 음으로 연결된다. 인도네시아 작가 에코 누그로호(Eko Nugroho)의 벽화 [혼돈 속의 아름다운 시간]은 질서의 원천인 혼돈을 축제같은 분위기로 표현했다. 축제는 전쟁처럼 일상을 단절시킨다. 양극의 유사점은 질서와 무질서, 고통과 희열의 교차이다.

에코 누그로호 전시전경
흑/백으로 이루어진 아크릴 벽화는 빛과 어둠의 관계 또한 포함한다. 그의 고국 또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격변기를 거쳤다. 그는 ‘평화는 항상 논의되는 주제이지만 실제로 지구상에 진정 평화로운 장소는 없다’고 하면서 자신은 ‘이 사회에서 소란스럽게 발생하는 일에 관하여 탐구’한다고 말한다. 인간보다 구조의 힘이 더 커지는 현대에 작가가 주목하는 ‘혼돈’은 지배 질서의 익명적 구조를 인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역동적 현실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자수와 태피스트리 등, 지역 공동체와 협업한 전통공예는 현대미술과 접속되며 연대를 상징한다. 생일 카페를 모델로 꾸민 강수지‧이하영의 작품 [민주주의 덕질하기]는 테이블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이것저것을 꾸미고 수다떠는 것을 권한다. 고매하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예술이 아닌, 팝업 스토어 스타일의 유희적 공간이다. 공간 가득히 울려퍼지는 경쾌한 음악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놓여있다.
작품의 출발은 2024년 겨울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에 반대하는 이들이 광장을 점거했던 경험이 깃든 무대이자, 축제같은 시위 현장이다. 광장은 이 기획전이 염두에 둔 이상적 공간이다. 각자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응원봉을 들고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에게서 한국사회는 생각지도 못한 민주주의의 원동력을 발견했다. 그들은 생각만 많고 행동에 굼뜬 기성세대와 달리, 뭔가 아니다 싶어서 바로 자리를 박차고 튕겨 나왔던 것이다. 저항이나 투쟁같이 오랜 기억과 머나먼 비전 대신에, 현재의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힘이다. 가볍고 활달한 젊은 감각은 소비주의를 넘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출발점이 되고, 이는 개인의 세계를 무시하는 지배적 권력에 저항하게 한다. 수십개의 솜이불을 엮어서 공중에 띄운 이산의 작품 [타자와 더불어 봄을 이룬다(與物爲春)]는 기념비적인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포근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있다.

이산 전시전경

강수지, 이하영 전시전경
전시장 바닥에서 시작되는 계단을 올라가면 구름 위의 풍경같은 모습도 연출된다. 2024년 한겨울 부당한 지배 질서에 맞서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던 이들이 외치고 싶었던 것처럼, 타자들의 목소리를 증폭시켜줄 마이크도 군데군데 설치했다. 마이크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 광장을 점유한 시간 동안에 제각각의 많은 발언들이 쏟아졌던 기억과 관련된다. 은박지 이불(일명 ‘키세스’ 군단)까지 등장하던 그때, 광장은 맞붙여 놓은 이불처럼 긴 밤의 추위를 함께 이겨내는 현장이 되었다. 광장에서의 외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더 썰렁해졌을 것이다. 촛불에 이은 오색으로 반짝거리던 응원봉은 아직 인간적 온기를 잃지 않았음을 말한다. 꿈같이 형성됐던 일시적 공동체가 사라진 일상의 광장에는 여전히 다중(多衆)의 열기가 남아있다. 광장이라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장소를 염두에 두면서 편재하는 타자와 연대하고, 그들의 소리를 증폭시킨다.
*본 평문은 아트인컬쳐 2025년 8월호에 발표한 ‘Occupy: 우리는 연결되고, 점유한다’ 전 리뷰를 바탕으로 필자의 논지를 확장한 글임을 밝힘니다.
출전; 전남도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