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낙원의 붉은 사과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영해의 [사과의 피] 전은 사과와 피 사이의 가느다란 연결망인 붉은색을 통하여 어렵게 다시 잡은 붓의 무게를 말한다. 그가 ‘1997년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놓았던 붓을 다시 잡게 된 것은, 스무 해가 지난 2018년 가을 방문한 한 전시회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렇지만 그가 그 사이에 예술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출산과 육아 등으로 화구를 벌려놓고 그림그리기가 버거워졌을 때 차선책으로 미술 이론 공부를 택하게 되었고, 조형 이론이나 디자인의 역사 같은 분야에서 강의를 이어갔다. 수정이 가능하기에 ‘그림과 오랜 시간 대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유화’는 계속 선택되었다. 이론 수업의 영향인지 그의 작품은 미술사적인 맥락이 많이 발견된다. 가령 검푸른 하늘에 떠있는 자신이 보이는 [족제비가 있는 자화상](2022-25)은 샤갈, 세잔 등이 참조됐다. 인간과 다른 존재들과 소통할 수 있는 낙원에 대한 샤갈의 비전처럼 인간과 동물은 대화한다. 김영해에게 예술은 실낙원 이후의 복락원같은 것이다.

족제비가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 weasel 64.8x49.8cm, oil on canvas, 2022-25
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사과는 상징적이다. 작가는 오랜만에 붓을 들고 ‘집안을 휘휘 둘러보다가 아이들 먹이려고 사두었던 사과 몇 알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사과라는 소재의 선택이 우연적인 듯 하지만, 사과의 도상적 유래는 유서깊다. 사과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사과를 집중적으로 그린 세잔의 작품은 김영해의 영원한 모델이 됐다. 그 이전에 아담과 이브에게 실낙원의 고통을 준 계기가 된 것이 사과였고, 고전주의 시대에 사과는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사과의 무게는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대표적인 정보기기의 로고로도 채택되었다. 사과는 신화와 과학, 예술과 기술 등을 두루 꿰는 이상적인 소재였던 셈이다. 작가의 현거주지인 경북지역은 기후변화가 도래하기 이전에 사과의 대표적 산지이기도 했다. 신화 속 사과는 지식과 그것을 둘러싼 금기와 그 위반에 얽혀있었고, 과학 속 사과는 물리적 세계를 수학으로 서술할 수 있는 보편언어를 가능하게 했다.
세잔의 사과는 세상의 피동적인 복사물이 아닌 자체의 질서가 있는 예술의 세계를 개시했다. 그밖에 마네, 샤갈, 뒤샹 등과 연관된 도상과 내용이 등장한다. 하지만 예술만의 세계에 안주하기에는 작가 스스로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왔고, 전쟁과 재난이 끊이지 않는 지금의 세계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기와 소원해진 것은 작가가 당면했던 삶이었고, 얼마간의 공백기 이후 그것이 다시 가능해진 것도 삶이다. 그에게 삶과 예술은 촘촘하게 함께 짜여진다. 여러 기원을 가지다 보니 간극이 적지 않고 작품은 수수께끼같다. 그러한 형식은 쉽게 소통되지 않지만, 장점은 조합된 단편들의 간극들이 적극적인 해석의 장이 된다는 점이다. 간극들은 관객이 그 의미를 채워야 할 적극적인 생성의 자리가 된다. 선적인 인과성을 정상으로 보는 현실을 기준으로 한다면, 김영해의 작품은 초현실주의같은 느낌이다. 초현실주의자가 현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브제들은 그들의 꿈과 무의식에 조응하는 ‘객관적’인 것이었다.

사과의 피 apple‘s blood 64.8x49.8cm, oil on canvas, 2023

사과 열 알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ten apples, 53x41cm, oil on canvas, 2018-25
다시 그림을 시작한 작가의 눈에 들어온 사과는 단지 우연이 아니라, 여러 겹의 상징이 중층적으로 결정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사과의 피]를 비롯해서 사과는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여러 작품에 걸쳐있다. 그는 학창 시절에도 사과를 자주 그렸다고 한다. ‘나의 관심사인 미술이란 무엇인가, 그린다는 건 뭘까...’ 등에 대한 탐색을 사과에서부터 시작하곤 했다고 회고한다. 전통적인 정물화에 자주 등장하는 사과는 ‘미술이라는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와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시각예술과 그것의 작동 원리,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제반 상황에’ 있던 그의 관심은 ‘그림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셈’이었다. 현대미술이 개념화된 이후, 지시대상의 재현보다는 이전의 관례적 맥락에 대한 내용과 형식이 많아지는 경향과 부응한다. 그것은 자신의 예술적 산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번 전시의 제목인 [사괴의 피]는 자작 시(詩)에서 온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시와 그림은 서로를 참조하는 관계이다.
‘...사과의 피로 흠뻑 젖은 붓을 닦아내면 손에 묻어나는 사과의 피 과연, 내 손에 묻은 피가 깨끗이 씻길까? 사과의 피는 지문의 골 사이사이 상감으로 스며들어...’ 시와 그림에서 ‘사과의 피’는 ‘다시 작업하기로 마음먹은 후 느끼게 되는 복잡한 심경’을 반영한다. 전시 부제와 동명의 작품 [사과의 피]에 ‘등장하는 군상 중 두 손에 붉은 피를 묻히고 어쩔 줄 몰라 엉거주춤 서 있는 인물’이 김영해이다. 실제의 또는 작품 속 인물은 ‘이미 피가 손에 묻었고, 붉은 피는 내 지문에 상감되어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예술의 바다에 다시 담근 두 손을 뺄 수는 없다’는 결연함이 있다. 작품 [사과 열 알이 있는 정물](2018-25)은 자연물이면서 기하학에 가까운 동그란 사과가 테이블 보 위에 붕 떠 있다. 만유인력 발견의 동인이 된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깨달았다는 과학자의 일화가 검증된 것은 아니다)는 그것을 정면으로 거슬러 공중 부양한다.

뚫린 입 mouth, a hole in my body, 38.5x45.5cm, oil on canvas, 2020
아담과 이브가 신의 계율을 위반했듯이 바꾸어 생각한다. 사과들은 동일한 형태가 각도가 다르게 배치되어 잠재적 동감을 준다. 뒤편의 사람보다 더 강조된 정물은 대상을 고정시킴으로서 분석적 시각을 가능하게 한다. 세잔도 그랬지만 분석하기 위해 모든 대상은 정물화처럼 그려졌다. 사과는 물론 풍경도 인물도 마찬가지다. 앨런 보네스는 [모던 유럽아트]에서 세잔이 입체감을 주기 위한 모델링의 관행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대신 세잔은 색채 가감 방식, 즉 옅은 농도의 물감들을 캔버스에 직접 나란히 칠해 색채와 색조의 차이를 통해서 3차원적 감각을 내는 방법을 사용했다.’ 세잔은 ‘정렬과 불연속을 사용하여 형태와 색채를 반복함으로서’(앨런 보네스) 세잔이 원한대로 ‘오로지 색을 가지고 원근법을 표현하려 했다.’ 마이클 리비의 현대미술사 책은 아예 세잔을 하나의 기점/종점으로 삼는다. 그는 [조토에서 세잔까지]에서 세잔의 풍경이나 정물이 보여주는 사물의 핵심, 말하자면 사과의 사과적 성질은 영원히 고정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세잔은 ‘닮음을 잡아내기보다는 각 형태와 패턴 간의 관계를 영속화시키기 위해 모델을 끊임없이 정밀 조사’(마이클 리비)했다. 이를 통해 세잔은 눈에 보인 사물을 전통적으로 바라보고 기록하는 방식을 벗어나게 됐다. 세잔이 열어놓은 문을 통해 대상의 사실성과 조형 언어의 자율성은 종속관계가 아니라 공존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의 미술사적 전개에서 조형 언어의 자율성은 너무 나아가 대상을 완전히 사라지게 했다. 초창기 모더니즘에 대한 김영해의 관심은 삶과 예술의 긴장 및 보완관계를 잊지 않으려는 선택이라고 보여진다. 그의 작품에서 사과는 여러 차원으로 변형된다. 전경에 확대된 사과와 도넛 모양이 나란히 있는 [뚫린 입](2020)은 ‘납작해지고 구멍이 뚫려 도넛 같은 모양으로 변형된 초록색 사과’를 등장시켜 사람의 입과 비교했다. [이상한 나라의 단발머리](2019-24)에서 사과들은 패션 쇼같은 무대에 선다. 온갖 새로움을 위해 온갖 것들이 동원되는 무대인 패션쇼는 현대미술의 행렬과 유사한 바가 있다.

이상한 나라의 단발머리 the bob-haired girl in wonderland, 40.5x31.5cm, oil on canvas, 2019-24

이미지를 지키는 소년 the image keeper, 60.5x49.5cm, oil on canvas, 2019-25
[이미지를 지키는 소년](2019-25)은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과 댓구를 이룬다. 커피가 쏟아지는 듯한 난감한 상황이지만, 소년은 사진 찍는데 몰두한다. 현실보다는 현실이 어떻게 보여지는가가 중요시되는 인스타그램의 시대에 마네는 현실보다 조형적 질서를 중시한 예술가로 호출된다. 사진을 찍고 있는 소년의 의상에 적용된 아이보리 블랙은 마네로부터 왔다. 세잔만큼이나 마네도 예술 자체로 관심을 돌린 예술가로 김영해의 주요 참조작가가 된다. 앨런 보네스는 [모던 유럽아트]에서 ‘과거에는 위대한 예술이란 신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거나 인간이 완벽하다는 생각에 들어맞는 것이거나 또는 자연에 충실한 것이다. 마네의 예술은 내적인 데로 관심을 돌린 듯하며, 오로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마네의 그림이 다루고 있는 핵심 논지는 주로 회화 자체의 본성이었으며, 이것이 생각의 고리를 만들어서 결국은 20세기에 행해진 예술언어의 혁명적 실험들을 직접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마이클 리비도 마네가 소묘보다는 채색을 더 강조했고 중간 톤을 없애버려 극단적으로 빛과 그림자를 대비시켰다고 말한다. 소년을 비롯한 여러 지시대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조형언어를 혁신할 수 있었다. [빨간사과. 초록사과](2022-25)는 양상이 다른 두 현상을 비교한다. 사과가 붉게 익어가는 것은 상황이 변화하는 시간을 암시한다. 작가는 이 그림에 대해 ‘초록 사과 근처에는 전쟁의 피해자들이 계단에 걸쳐져 있다. 미쳤거나 다쳤거나 죽었다. 어린 소녀만이 의족을 하고 전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전경에서는 미사일이 발사되고 있는 후경을 관찰한다. 미디어의 즉각성은 사건을 동시적으로 전달한다. 전시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 [사과의 피](2023)는 세잔이 자주 그린 산 중간에 떠 있는 붉은 사과가 보인다. 붉은 사과를 그리기 위해 손에 묻힌 물감이 지문에 ‘상감’되어 있는 자화상도 숨겨있다. 그리기는 줄타는 광대같은 균형감이 필요하며, 많은 시행착오가 있다.

빨간 사과, 초록 사과 red apple and green apple, 45.3x37.7cm, oil on canvas, 2022-25
하지만 삶에서의 시행착오는 더 치명적이다. 목발이 머리에 붙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는 전경은 삶의 잔인함을 은유한다. 김영해의 작품에서 폭력의 절정인 전쟁이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전쟁이 이미 특정 전쟁터에 국한되지 않고 경쟁의 편재를 통해 실행되기 때문이다. 이브미쇼는 [폭력과 정치]에서 현대의 직접적으로 육체에 연루되지 않은 추상화된 폭력을 강조한다. ‘기술적 복잡성이 분업을 필요로 하고’ ‘폭력과는 직접적으로 관계없이 전문적인 임무만 완수하는 기업’(이브 미쇼)에 의한 폭력이 더욱 심각하다는 것이다. 삶과 예술은 연결되면서도 구별된다. [담을 넘는 사람](2023-24)에는 이편과 저편으로 나뉜 구역의 담장이 쳐있다. 그 담 위에서 춤추는 사람은 어느편에도 속하지 않은 영역에서 유희한다. 이편보다 저편이 더 낙관적이고, 그곳에 예술의 상징인 사과가 있다. 이쪽의 의상보다 저쪽의 의상도 더 화려하다. 원경과 근경이 교묘하게 연결되어 근경의 인물이 상상하는 듯하다.
대중문화에서 만화의 영향 때문인지 인물 머리 위의 도상이나 문장은 인물의 생각과 관련된다는 관례가 있다. 가방에 우산을 들고 어딘가 서둘러 가고 있는 여성 머리 위의 사과가 보이는 작품 [내 머리 위의 사과](2020-2023)는 인물이 생각하는 모습일 수 있다. 그에게 사과가 가지는 상징은 예술이다. 예술적 상상에 몰입한 인물이 서 있는 바닥은 견고하지 않다. 예술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삶의 비극성도 커진다. 양자는 연동된다. 예술이 소중할수록 그것의 파괴에 대한 걱정도 크다. 작품 [파랑새-연기바다 위의 방랑자](2025)에서 전쟁이나 재난 등으로 폐허가 된 세상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새는 날개가 잘려있다. 이 작품의 구도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로부터 왔다. 작가는 ‘파랑새가 내려다보는 폐허에 무리 지어 떠돌아다니는 개들은 주인 잃은 전쟁의 피해자들이다. 개는 결박되어 끌려가는 포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고 설명한다.

검은 관 black coffins 38.5x45.5cm, oil on canvas, 2020-25
작품 [검은 관](2020-25)에서 검은 관에서 빠져나와 자유롭게 들판을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와 삽화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먼 곳 후경의 신체적 움직임이 활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전경의 스마트 폰에 푹 빠진 아이의 어깨와 눈은 경직되고 고정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검정색이 네 군데에 사용되었다. 세 개의 어린이용 관과 하나의 스마트폰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 두 가지 물건의 닮은 점을 은유한다. 사과는 산업혁명기의 영국과 정보혁명기의 현재를 연결한다. 최근까지 작업한 캔버스 네 개가 따로 또 같이 작동하는 작품은 그 연결로 인해 더 복합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첫 장면으로 간주되는 맨 왼쪽의 [우유하녀2.0 II](2025)는 공중에서 쏟아지는 우유가 바닥에 흐른다, 두 번째 [우유하녀2.0 I](2024-2025)를 거쳐 [우유인류-신인류의 탄생](2025)에 이른다. 세 번째 패널의 거친 황야의 유인원은 인간 진화에 있어 폭력적 성향이 순화된 것은 아님을 말한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빈발하는 현재 또한 약육강식의 야만성이 지배한다는 진단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보다 더하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동물들은 모두 제어 메커니즘을 갖고 있으며, 싸움을 하더라도 이 메커니즘으로서 패자가 죽음에까지 이르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것은 종족 보존을 위한 자연의 메커니즘이다. ‘같은 종의 동물들은 결코 서로를 죽일 정도로 싸우지는 않는다. 승자는 패자의 목숨은 살려준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러한 안전장치가 없다.’(르네 지라르) 르네 지라르는 동물의 생물학적 메카니즘이 인간에게는 희생양이라는 문화적 집단 메커니즘으로 바뀌었다고 해석한다. ‘남을 죽이지 않으며 자신이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즉 현대인의 예방 전쟁은 유사한 선수를 치려는 경향’(르네 지라르)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론적 가설은 인간사회가 늘 희생양을 요구한다는 점을 말한다. 그것이 비극의 본질이다. 김영해가 보는 세상은 다소간 비극적이지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잔인한 장면의 색은 약화되거나 원경에 배치한다.

담을 넘는 사람 over the wall,45.3x52.8cm, oil on canvas, 2023-24

내 머리 위의 사과 the apple upon me, 40.5x31.5cm, oil on canvas, 2020-23
전쟁이 끝나도 개인에게는 끝나지 않은 전쟁이 바로 불구라는 결과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은유적이다. 검정 관은 비극의 최종적인 결과겠지만 그 또한 ‘반듯하게’ 포장되는 것이다. 잔인함은 작가 본인에게만 적용된다. 그는 여러 작품에서 자신의 죽은 모습을 암시하는데 공중에 붕 떠 있다든가 피가 뚝뚝 흐르는 손 등을 그린 자화상이 그것이다. 패널 4개가 좌우로 길게 붙은 작품의 시작은 건물같지만 거대한 관 형태의 육중한 구조물이 공간을 압도하는 풍경이다. 수류탄같은 위험한 무기에 손을 대는 젊은이는 그 뒤에서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함께 하면서,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게 한다. 원인과 결과의 동시적 배열은 정지된 매체인 그림에서 서사를 담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 좌우로 길게 배열된 작품 전체는 관객의 동선에 따른 이야기의 전개도 포함한다. 물론 반대 방향에서 보고/읽어도 상관은 없다. 한글의 서술 관습상 좌에서 우로 읽어보기로 하겠다.
관같은 구조물은 국제양식으로 지어진 근대건축의 기본 틀이다. 작가가 세잔이나 마네같은 모더니즘 작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음을 염두에 둔다면, 입방체에 대한 상징의 무게는 더해진다. 공간을 가장 경제적으로 쓰기 위한 모델인 사각형 모듈은 기능주의의 상징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 양식인 아파트가 그렇다. 기능주의는 건축을 비롯한 모든 디자인된 물건 표면의 무늬를 제거했다. 유혹과 죄악, 낭비와 비위생의 상징인 이전 시대의 무늬를 제거한 미학적 이데올로기는 세계대전 전후 제국들의 지배적 움직임과 궤를 같이했다. 최근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우유는 딱딱한 구조와 비교된다. 색감도 명암도 대조된다. 작가가 참조한 베르메르 시대의 우유와 달리 대량적으로 유통되는 우유는 도시를 관통하는 관을 타고 흐른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고대적 유토피아와 관련되지만, 근대주의 또한 유토피아적이었다. 하지만 생명을 매개로 한 대량 생산/소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기계화된 우유 제공 시스템에 영화 [마농의 샘]에서와 같은 배타적 관계는 없을 것인가.

파랑새 – 연기 바다 위의 방랑자the bluebird – wanderer above the sea of smoke
53x65cm, oil on canvas, 2025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맞추려는 ‘합리적’ 사고는 그 기준에 따를 수 없는 타자들을 배제하고 지배하려는 비합리적 사고이기도 하다. 김영해의 작품에 기술 만능과 황량한 폐허, 빛나는 계몽과 어두운 야만이 공존하는 이유다. 코드화는 정보화 사회와 더불어 그 정도가 더 강력해질 것이다. 이성은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된 생산력의 모순을 폭력과 전쟁으로 밖에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 재난을 낳았다. 그 결과가 20세기의 양차 대전인데, 그것이 20세기 초기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있다. 제국들이 폭탄 돌리기처럼 자본의 모순을 전가하는 중인 현재, 세계 어디에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까닭이다. 젊은 아들을 둔 어머니는 평화주의자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일상에서의 고도화된 경쟁 또한 전쟁 못지않은 긴장을 자아낸다. 터지지는 않았지만 곧 터질 뇌관 같은 불안한 기운이 작품 곳곳에 스며있다. 작품 속 육중한 구조물이 폭력의 장면과 겹쳐지는 이유이다. 무기체계나 군대체계 등은 그러한 기능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전개되는 곳이지만, 정작 그 최종 목적이 전쟁을 잘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막스 베버를 비롯한 이들이 자본주의 초창기부터 주장한 계몽의 역설이다. 구조물 뒤에 숨어 두런거리는 듯한 사람들은 확고한 명분을 가진 비극에 대해 쉬쉬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말한다. 그렇게 유지되는 비밀이 또 다른 폭력이 되어 돌아온다. 김영해에게 우유는 삶의 양식에 대한 상징이다. 오래된 유토피아를 반향하는 근대적 유토피아는 짧은 유통기한을 가질 따름이다. 우유곽 역시 관 형태의 구조와 닮은 점은 그것이 대량 생산품임을 알려준다. 요람부터 무덤까지 사용되는 것들은 경제적 효율성을 위해 비슷하게 진화된 형식을 취한다. 묵직한 납같은 음울한 분위기의 구조를 지나면 파스텔톤으로 펼쳐지는 마을이 보인다. 그것이 여러 크기와 모양, 특히 다양한 색으로 이루어진 점은 대조군으로서의 특징을 명확히 한다. 여기에서도 삶에 필요한 윤활유로서의 우유는 여전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 근대]에서 주장했듯, 액체는 근대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사각형 구조보다는 더 유연하다.

우유 시리즈 설치장면
액체적 흐름은 자유로와야 하지만, 그 또한 제어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구조와 에너지는 물리적 세계부터 사회적 세계에 이르기까지 상보적으로 작용한다. 김영해의 작품 속 유인원의 모습과 다이나마이트의 조합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위험한 무기를 가진 존재를 보여준다. 장면은 물(원시스프)에서 탄생한 생명이 지상으로 나와 진화의 길을 밟는 여정이다. 유인원에서 보다 직립에 가까운 존재로 나아가고 있지만, 현대인의 뇌리에 남아있는 야수적 본능이 있다는 메시지다. 위험한 장난감을 다루는 원시인은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관객이 마지막 보게 되는 장면은 사과가 떠 있는 거대한 둥근 용기(用器)다. 사과에 대한 작가의 조형적 관심은 그것이 예술의 상징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반복된다. 둥근 용기 안의 사과는 세상에 속하면서도 자신의 자율적 공간을 확보한다. 사과는 화면의 중심에 놓여있다. 그것을 보는 관객의 자세는 다양하다. 우러러 보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하며 냉정하게 직시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