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경계를 넘어
이선영(미술평론가)
허영미의 [시간의 경계를 넘어 Beyond the boundaries of time] 시리즈는 명확치 않은 형상이 출몰하는 추상회화다. 현실적 도상이 아닌 잠재적 형상을 다루는 추상은 무의식과 연관되어왔다. 물론 구상적 초현실주의처럼 명확한 대상에도 무의식이 투사될 수 있지만, 그 경우 도상 간에 의미의 연결고리는 매우 느슨하다. ‘시간의 경계를 넘으려는’ 작품은 원본능(id)의 영역인 무의식에는 시간이 없다는 프로이트의 가설을 떠올린다. 바다에 떠 있는 섬이나 빙하를 닮은 프로이트의 심층구조적 모델에 의하면, 무의식은 하부 구조에 속한다. 무의식의 세계는 의식에 의해 감춰지고 억압되지만, 예술은 억압된 것이 회귀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제이 그린버그가 편집한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 이론]은 무의식의 과정을 더 세밀하게 이론화한다. 그에 의하면 프로이트에게 원본능(id)의 힘은 개별 유기체가 추구하는 진정한 삶의 목적의 표현이며, 욕동들의 활동은 삶의 현상 전체를 변화시킨다. 대상관계이론에 의하면 욕동(慾動, dribe)은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의 경계에 위치한다.

시간의 경계를 넘어 Beyond the boundaries of time , 162.2x130.3cm, 캔버스 위에 혼합매체 Mixed media on canvas, 2024
프로이트는 신체를 욕동의 원천으로 보았다. ‘욕동은 자신의 본래 목적인 방출을 추구하고 쾌락 원리에 복종한다. 동물의 본능과 인간의 욕동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동물의 본능은 자아의 개입 없이도 자신의 목적에 도달함에 있다’(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 중에서) 이러한 개념 틀에서 보자면 동물의 행동은 명확하다. 반면 인간의 소통은 직접적이지 않고 많은 매개가 전제되며, 그래서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러한 불확실성은 예술적 표현의 측면에서 보자면 자유이자 다양성이기도 하다. 작가의 모든 것을 뽑아내야 하는 예술에서 무의식 또한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예술작품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무의식/의식, 자아/타자 등의 경계와 그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중요하다. 대상보다는 관계이며, 존재보다는 과정이다. 무의식에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심연에 가까울 것이다. 심연은 무언가 나오거나 사라지는 잠재적 바탕일 뿐, 의미로 이어질 분명한 형태는 부재한다. 최근 제작된 [시간의 경계를 넘어] 시리즈는 여러 겹 색의 베일을 헤치고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감이 특징이다.
물감층으로 켜켜이 싸여 드러난 화면에는 시간성이 있지만 정확한 시간은 가늠되지 않는다. 주도적 색감에 따라 숲이나 하늘, 때로는 인공 광원 등도 떠오르기도 한다. 그 무엇이 연상되든 베일같은 막으로 중첩된 실재라는 것, 그리고 아래로 줄줄 흐르는 물감이 따르는 방향은 중력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어떤 추상화는 거꾸로도 걸릴 수 있지만, 허영미의 작품은 방향이 있다. 작가는 ‘흘러내림, 번지기라는 회화적 기법 반복적으로 시도’했으며, 그렇게 생겨난 우연적 형상은 ‘생명이 가진 복원력, 회귀와 순환의 길’과 닮았다고 말한다. 형태 이전 또는 이후의 형태들은 색의 흐름에 그 경계를 녹여낸다. 그 위에 층층이 구축된 자아나 초자아는 보다 선명한 시공간의 개념을 전제하며, 그렇기에 재현될 수 있다고 믿어진다. 재현 가능하다는 것은 소통에 있어 좋은 조건이며, 심리적 치료 또한 가능함을 말한다. 가령 누군가 자신의 의견을 잘 개진한다면, 즉 잘 재현한다면 그것은 이미 치유됐다는 증거이다.

시간의 경계를 넘어 Beyond the boundaries of time , 162.2x130.3cm, 캔버스 위에 혼합매체 Mixed media on canvas, 2024

시간의 경계를 넘어 Beyond the boundaries of time , 162.2x130.3cm, 캔버스 위에 혼합매체 Mixed media on canvas, 2024
이미지로 말하는 화가와 달리, 애초부터 말이 수단인 법률가나 철학자 등을 비롯한 수사학의 대가들은 그러한 재현을 잘 하는 이들이다. 중언부언이나 허실 없이 선적인 인과관계를 명료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인간사회의 규칙(전통이나 법 등 상징적 세계)을 통달했기 때문이리라. 과학도 누군가의 우연적 발견을 공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실험으로 완벽하게 재현될 수 있어야만 한다. 재현이라는 ‘진리’의 ‘객관적’ 기준은 거짓과 조작 또한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재현은 정상/이상의 경계가 확실하다. 관념도 재현될 수 있다. 관념적 담론이 원전(元典)과 정확한 각주를 중시하는 이유이다. 사회의 지배적 언어와 논리를 자신의 언어와 완전히 일치시키는 과정이 교육일 수도 있지만, 만약에 재현이 완벽하다면 사회도 사람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기존의 틀로 새로운 것을 끼워 맞추려는 억지스러움이 팽배할 것이다. 지배사회의 구조가 동일성의 원리로 완벽하게 방어되었을 때, 그 안에 있는 누군가는 기득권을 유지하고 바깥의 누군가는 배제될 것이다.
‘의식의 재현을 벗어나 무의식의 깊고 무한한 세계로 이끌리는 시간을 경험했다’는 허영미는 ‘작업을 통해 기억과 감정이 결코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고, 재현(representation)을 넘어선 재구성(reconstruction)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의식적 의미를 담은 형태 대신에 ‘색채와 질감’을 ‘내면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언어로’ 사용한다. ‘어두운 모노톤의 색은 무의식의 감춰진 기억과 감정에 내면의 깊이를 상징했고, 다양한 색의 흐름은 내면에서 바깥으로 뻗어 나가려는 자아의 의지’을 말한다. 또한 ‘색이 번지고 흘러내리는 과정은 인간 내면의 감정이 이동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담아냈다’. 예술은 적어도 전통을 벗어난 시대의 예술은 변화의 편에 서왔다. 변화는 유연성을 요구하며 그 반대도 사실이다. 허영미가 물의 이미지에서 길어 올린 것은 이러한 유연성, 요컨대 작품 제목에 포함된 바 ‘경계를 넘어서’에 있다. 엄격한 기준이 되는 시간감각은 고차적인 물리학이나 이를 활용한 컴퓨터 등에서 와해되고 있다.

시간의 경계를 넘어 Beyond the boundaries of time , 162.2x130.3cm, 캔버스 위에 혼합매체 Mixed media on canvas, 2024

시간의 경계를 넘어 Beyond the boundaries of time , 162.2x130.3cm, 캔버스 위에 혼합매체 Mixed media on canvas, 2024

시간의 경계를 넘어 Beyond the boundaries of time , 162.2x130.3cm, 캔버스 위에 혼합매체 Mixed media on canvas, 2024
가령 수십 년 걸릴 계산 1초 만에 끝낼 수 있다는 차세대 컴퓨터인 양자컴퓨터 기술이 그것이다. 최근의 뉴스(조선일보 8월 28일)는 ‘기존 컴퓨터가 정보를 0 또는 1의 비트로 저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나씩 순서대로 계산한다면, 양자컴퓨터는 입자를 0과 1의 디지털 정보를 동시에 갖는 양자 중첩 상태인 큐비트로 만들어 빠르게 연산한다’고 전한다. 물론 문명사회에서 경계는 사라지지 않고 새롭게 설정될 따름이다. 현대예술가들이 적군이나 아군 그 누구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없는 최전선의 존재를 전위라고 칭했듯이, 허영미의 작품에서 무엇인가 생겨나는 지점(시점)이나 사라지는 지점(시점)은 확실하지 않다. 그것은 끝없는 과정이다. 과정은 재현될 수 없으며 단지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작가는 작품 제목을 이루는 ‘시간의 경계를 넘어’에 대해 ‘시간은 흐르고, 기억은 물살에 휩쓸리듯 경계를 넘어 본다. 과거와 현재, 무의식과 의식, 존재와 부재가 그 경계에서 다시 만나고 해체되며 재구성한다’고 말한다. 작품의 논리적 고리를 이루는 무의식-물-재현의 거부 같은 일련의 과정은 경계를 문제시한다.
작품 속 물의 이미지는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시간에 대한 옛 지혜와도 다르다. 그것은 상류와 하류, 지류와 바다 등의 계층적 계열을 통해 순차적으로 흐르는 물이 아니다. 그런 물은 선적으로 흐르는 시간관을 전제한다. 그의 작품 속 물은 흐름을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이다. 그 상황을 알려주는 것은 투명한 시공간적 좌표가 아니라, 화면 속에서 명멸하는 빛이다. 깊은 물 속에 스미는 빛처럼 그 출처는 모호하다. 심층구조적 모델을 비판하는 후기 구조주의 사상은 빙하나 섬같은 고전적 모델이 아니라 뫼비우스 띠같은 보다 유연한 이미지를 택하지만, 끝과 끝이 이어져 요동치는 표층의 모델 또한 시간 감각이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두운 공간을 떠도는 듯한 빛은 추상적 화면에도 불구하고 원근감을 부여한다. 추상적이나마 원근감을 가지는 작품들은 현실의 뿌리--그것이 무의식으로 불리든 자연으로 불리든—와 단절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상현실이 지배적인 시대에 그림을 통해 현실과 닿겠다는 태도이기도 하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5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