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들어 “‘미술의 힘’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휩싸이곤 할 때가 있다. 인간의 오감 중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70%에 달한다고 하는데, 회화, 조각 등 미술의 제 장르가 바로 이 시각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 대전 엑스포의 문화예술 행사로 열린 《촉각조각》전에 전문위원 자격으로 참가한 적이 있다. 전시장에 진열된 조각품을 안대로 눈을 가린 관람객이 손으로 만져봄으로써,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의 상황을 이해해보자는 취지로 기획된 전시였다. 실제로도 이 전시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직접 참여하여 손으로 조각품을 만져 감상하기도 했었다. 당시 사회적 호응을 많이 받았던 전시로 나는 기억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좋은 전시는 ‘사회적 힘’을 가진다. 어떤 전시가 좋더라는 입소문이 퍼지면 그 전시는 얼마 안되어 밀려드는 관람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얼마 전 추석 연휴를 맞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들렀더니, 전시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관람객의 대기 줄이 수십 미터에 달했다. 전시장 안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 몰려든 관람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김종휘, 〈향리(鄕里)〉, 1987, 캔버스에 유화 물감, 97×194.5cm, 국립현대미술관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다》(8.14-2026.2.22)전이 이토록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듯이, 추석 연휴의 특수를 덕수궁 ‘국현’이 누리고 있었던 것. 그런데 단지 그 이유뿐일까? 추석 연휴를 맞아 고궁을 찾은 대중이 마침‘국현’에서 전시를 하니 보고 가자는 취지로 들렀다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역시 전시가 좋았기 때문이 아닐까? 거기에는 대중의 바라는 바를 정확히 포착하여 한국의 근·현대 명작으로 풀어낸 전시기획의 절묘함이 있었던 것. 그 기획의 요체는 과연 무엇일까? 인간의 귀소본능을 자극한 것, 바로 그것이 아닐까?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본성,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하이마트(Heimat/고향)’에 대한 가슴 절절한 희구가 아닐는지? 독일이 낳은 저명한 철학자 하이데거(M.Heidegger)는 언어를 가리켜 ‘존재의 집’이라 했다. 고향 또한 존재의 집이다. 어렸을 때 본 고추잠자리 한 마리. 아이는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저게 뭐야? 응, 그건 고추잠자리란다. 순간, 아이는 엄마의 이 한 마디를 가슴에 묻는다. 각인된다. 고향의 잠자리가 된다. 어느덧 팔십 년의 세월이 흘러 타향에서 노인의 눈에 들어온 붉은 고추잠자리 한 마리. 그 순간 노인은 ‘세월이동호’를 타고 머나먼 고향으로 향하게 된다. 고향이 ‘존재의 집’인 이유다.

전시는 이중섭, 박수근 등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는‘광복 80년’ 동안의 한국 근·현대미술을 훑는다.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등 동양화의 대가 작품들과 통영의 짙은 청색 바다풍경이 화면 속에 잘 녹아든 전혁림의 대형 추상화도 만날 수 있다. 1부: 향토-빼앗긴 땅, 2부: 애향-되찾은 땅, 3부: 실향-폐허의 땅, 4부: 망향-그리움의 땅 등 4개의 소주제로 나눈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 근·현대미술의 원로·작고작가 75명의 출품작 210점을 만날 수 있다. 추상보다는 구상화가 강세다. 대중이 이해하기에 어려운 추상보다 눈에 쉽게 들어와 소화하기에 편한 구상화 위주로 전시를 짠 것도 성공의 비결이라면 비결. 난해하기 짝이 없는 설치미술과 미디어, 퍼포먼스 위주의 최근 경향과 정반대되는 노선을 택한 것이 신의 한 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편향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간 전시에 대한 대중의 피로도를 생각하면 잠깐 쉬어가는 것도 무방하리라 본다. 어찌 보면 문화란 균형감 있게 화단을 가꾸는 일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