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립미술관에서 《장미 토끼 소금》(8.29-2026.1.25)전을 보았다. 김주연의 <이숙(異熟, Metamorphosis)>이 인상적이었다. 5톤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신문지를 쌓아놓은 후 그 위에 이끼를 키우고 보살피는 작업이다. 신문의 죽음이고 일상과 지난 시간과의 결별이자 폐기처분된 과거이자 역사다.

일정한 수분을 공급받으면서 이끼들은 수평으로 축적된 신문지의 특정 면을 잠식해 들어간다. 얇은 신문지의 단면이 쌓이면서 덩어리가 되고 조각적인 존재가 되어 공간을 벽처럼 점유하는 순간 드러나 버린, 조성된 화면에 이끼가 스스로 발아하면서 흔적을, 녹색의 그림을 맹렬하게 그린다. 신문지에 얹힌 이끼는 매일같이 자라난다. 지난 시간은 이미 죽은 존재다. 그것은 특정 시간의 기억을 머금지만 사라진 그 무엇이다. 인간의 삶도 지속해서 맹렬하게 사라지는 중이다.

오래된 신문은 죽음과 사라짐을 상징한다. 그 사라짐, 죽음의 자리에 다시 생명이 피어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결국 사라진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도 사라진다. 인류는 특수한 사라짐의 방식을 발명한 유일 종이라고 장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그는 실제 세상이 존재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세상은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사물을 재현하고, 명명하며, 개념화하면서 인간은 그것을 존재하게 하고, 동시에 사라짐 속으로 떠밀며, 그 생경한 현실성으로부터 절묘하게 멀어지게 했다고 한다. 하나의 사물이 명명되고, 재현과 개념이 그 사물을 포박하는 순간은 바로 사물이 그 에너지를 상실하기 시작하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물은 그 개념이 나타나면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남는가이다. 생각해보면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 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보드리야르는 사물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라짐과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하며 그보다 더 나은 분석들은 없다고 말한다. 나는 이끼로 뒤덮힌 신문더미 앞에서 생의 무상성을 깊이깊이 들이마신다.



김주연, 〈Metamorphosis XI〉, 2025, 나무파레트, 신문, 가변설치


전적으로 녹색으로 마감된, 과잉의 풀들이 엄습해 이룬 익숙하면서도 매우 낯설어진 존재다. 동물에 속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식물이란 상당히 낯선 존재다. 그것은 동물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규정하기 어려운 것으로 괴물과 유사한 무엇이라는 뜻도 지닌다고 지적된다. 식물이란 “부동성 속에서 욕망을 낳는 감정들의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표현의 의지”(프랑시스 퐁주)라고도 말해진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게 대지와 대기 양쪽으로 성장하고 확장하며 사물, 동물, 그리고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기원으로서의 식물을 상상해보라고도 한다. 식물은 모든 이타적 존재를 자기 안으로 수렴하며 서식한다. 이 식물성의 번식, 기생은 경계가 없고 제한이 없다. 식물은 금기가 없는 모든 가능성의 영역을 일구어나간다. 아마도 작가는 그러한 식물성의 힘과 마력에 주목하는 것 같다.

한편 이 작업은 포스트휴먼 논의와도 연관된다. 포스트휴먼은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생물학적, 인문학적 위계질서와 허위성을 폭로하는 담론이다. 그것은 근대적 인간의 타자로서 비백인, 여성, 비정상인을 재조명하는 동시에 인간과 동물의 위계적 관계, 인간과 기계의 도구적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을 전복한다. 또한 인간종과 정치체계, 동물, 식물 나아가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그들과 맺는 관계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오만과 무제약적 자유와 권리까지도 문제시한다. 인간의 생명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평등하고 소중한 것으로 보는 새로운 관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중심주의적 주체를 넘어서 관계적 주체성으로 나아가게 하며, 인간개념에 의해 타자화되고 주변화된 존재들을 복권하고 생명과 기계, 인간과 다른 생명체 사이의 관계를 위계적으로 보는 관점을 폐기하게 한다. ‘이숙’이란 작업이 던져주는 전언의 하나가 그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