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도전과 시험의 무대
이선영(미술평론가)
노연이의 작품은 환상적이다. ‘환상(phantasy)이란 주체가 주인공이 되어 소망의 충족을 재현하는 상상적인 장면을 말한다’(마단 사럽). 환타지에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장면이 없어야 하지만 자아를 확립하려는 고투 속 주인공에게 다가오는 현실의 어둠을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다. 환타지라고 해서 비현실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특정 상징적 우주에 태어나는 인간의 운명과 관련된다. 상징적 우주의 안팎에 걸쳐있는 인간은 형식에 의해 모양이 갖춰진다. 상징이라는 틀은 개인을 보호하면서도 억압한다는 양면성이 있다.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을 구조화화며 때로 현실을 대체하는 그 우주의 대표적인 예는 언어이다. 하지만 그 언어가 분열되어있다는 점에서 자아나 주체의 통일성은 가상적이다. 사고의 주체로서 근대적 인간의 존재는 자명했지만, 노연이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공간(방, 건축)은 자아의 연장이자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건의 무대이다.

노연이, Cycle, 521.2x193.9cm, oil on canvas, 2025
마단 사럽은 [알기 쉬운 라깡]에서 ‘환상은 각 개인에게 있어 주체와 그 욕망의 대상의 관계가 악착같이 연기를 계속하는 개인 무대이다’라고 말한다. 이전 작품에서는 공간의 틀은 강력했지만, 올해 영천 스튜디오에서 한 작업에서 안팎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여전히 직선형 구도의 틀이 등장하지만 들락거릴 수는 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경계 기록자]는 ‘현실과 이상의 경계 지점에서 방황하며 머물러 있는’ 자신을 반영한다. ‘나의 작업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가 만나는 그 경계에 있으며, 그 과정을 포착하는 경계 기록자의 역할’이라고 밝힌다. 그의 작품에서 경계는 안정적이거나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치열한 싸움터가 된다. 경계의 확립(또는 재설정)은 단순히 사회의 요구에 적응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적응이란 현실을 객관적이고 인식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다가갈수록 모호한 것이 현실이며, 그에 대응하는 자아 또한 마찬가지다.
작가는 가장 먼저 자아에 대해 의심한다. 노연이의 작품에서 나는 의혹에 휩싸여 있는 허약한 존재다. 이전 작품이 자신의 방을 염두에 뒀다면, 최근 작품은 중세의 건축 모델 등을 빌어와서 보다 사회적인 틀거리를 갖춘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먼 곳의 것이어서 여전히 관념적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추상적 차원을 통해 보다 보편적인 서사를 펼칠 수 있다. 노연이의 작품은 인물과 배경, 소품 등이 등장하며 서사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추상미술은 아니지만, 그가 상징적 우주라는 개념적 틀을 다룬다는 점에서 추상적이다. 재현적 미술도 추상일 수 있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강력한 원근법적 체계는 사실주의가 아니라, 그 시대의 상징적 구조로 작품의 내용을 강력하게 틀 짓는다. 물론 시대의 지배적인 상징도 결국은 변화한다. 이번 전시에서 노연이는 경계의 문제를 다루는데, 변화가 일어나는 시공간인 경계는 사건의 무대이다.

노연이, Image Alchemist(이미지 연금술사), 160x130.3cm, Oil on Canvas, 2025

노연이, Fate Watcher(운명 관측자), 160x130.3cm, Oil on Canvas, 2025
가장 큰 작품 [Cycle](2025)은 개인의 연대기를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처음 장면에서 젊은 여자는 열심히 학구열을 불태운다. 다음 방에서 보다 성숙해진 여성은 열심히 작업을 한다. 바깥에 계단이 있다. 실내의 삼각형은 저 높은 곳을 향해 노력하는 상황을 상징한다. 작가의 라깡에 대한 관심을 생각할 때, 삼위일체를 닮았다고 평가되는 도식이 떠오른다. 하지만 집은 비를 막아주지 못한다. 주인공의 부재는 그에게 닥친 고난을 말해준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은 창안으로 들어오려는 구름을 향해 기도한다. 그가 무릎 꿇은 바닥은 동그랗다. 다른 무대에 비해 가장 낮은 자리에 낮은 자세로 임한다. 인생을 상징하는 4단계의 무대는 모두 건축적 구조를 가지며, 미지의 관객을 향한 벽 하나는 개방된 무대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배경임에도 주인공이 자리한 장소는 조명을 받은 듯 환하다. 그의 작품에서 어디선가 오는 빛은 희망적 요소다.
집은 자아의 연장으로 말 없는 무대의 소품들은 주인공 대신 말한다. 최소한의 소품만 있는 실내는 몇 가지 색으로 한정해서 통일감을 준다. 작품 [Image Alchemist](2025)는 마술적 변형이라는 연금술적 주제를 그림에 대입한다. 고풍스러운 건축구조를 배경으로 새를 열심히 그리는 자화상이다. 그림이 너무 생동감 있어서 살아서 화면을 빠져나간다는 예술가의 신화가 적용되었다. 이러한 마술적 과정을 상징하기 위해 캔버스는 연금술적인 장치와 연결되어 있다. 실내와 밖 사이에 기둥들이 서 있고 그 사이로 구름이 걸쳐있다. 내부와 외부는 차이는 있지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작품 [Fate Watcher](2025)는 자신의 운명을 하늘에서 관측한다. 둥근 천막형 커튼 안에서 짙푸른 밤하늘을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이는 별자리를 통해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가의 모습이다. 밝은 바닥은 관객을 향해 연기하는 주인공을 비추는 조명같고, 비밀의 지식이 적혀있을 책자들이 펼쳐있다.

노연이, The Unstarted, 83x74cm, Oil on Hand Made Wood Panel, 2025

노연이, Anxious Opening, 86x79.5cm, Oil on Hand Made Wood Panel, 2025
연금술도 그렇고 점성술도 그렇고, 그의 작품에는 태양보다는 달이 더 친근하다. 태양이 변치 않는다면 달은 변화무쌍하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의 복장은 그가 또 다른 관념적 우주의 일원임을 말한다. 원시시대의 물활론이나 고전주의 시대의 존재의 대연쇄라는 사상까지는 아니어도, 우주와 인간이 긴밀하게 엮여있다는 사유는 지나간 미신으로 간주되기에 너무나 소중한 가치가 되었다. 자연 및 우주와 단절된 인간 상황의 폐해가 전방위적으로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으로부터 해방된 개인주의는 개인조차도 풍요롭게 해주지 못했다. 개인의 신상에 일어난 급격한 변화는 더 완벽한 착취를 위한 자유는 아니었을까. [눈이 내리는 세계](2025)에서 모든 것을 하얗게 덮을 수 있는 눈은 성냥팔이 소녀의 죽음조차도 환상적으로 만든다. 비보다는 덜 하지만 맨발의 작업자에게 닿는 차가운 눈은 가혹하다. 하지만 동시에 전경에 가득한 푸른 식물은 물리적 현상을 초월한다.
2차원적 환영은 늘 3차원적 현실을 노린다. 실물같음을 넘어서 실물이 되려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의 방향성’(역사주의의 전제인)이 모두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미니멀리즘을 비롯해서 환영의 차원을 삭제한 사물로서의 예술은 너무 많이 나아갔다. 노연이의 캔버스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환영을 안고 간다. 작가가 직접 짠 나무 구조물에 캔버스 그림 못지않은 자세한 묘사가 있다. 손수 목공을 배운 후 제작한, 나무 패널을 조립하여 만든 화면에 그린 작품 [The Unstarted](2025)는 단순한 가상이 아닌 현실에 설 수 있는 차원을 향한다. 그림처럼 벽에 걸리지만, 작품의 배경은 전시장의 벽이라는 점에서 그림과도 다르다. 건축은 각 시대와 지역의 문화를 반영할 만큼 상징화 되어있고, 그 또한 변하긴 하지만 개인의 일생을 넘어설 만큼의 긴 주기로 서서히 변화한다. 회화가 장면의 단면을 재현하는 시각적 관습에서 건축이나 건축적 구조는 개인을 담는 상징적 우주라고 할만하다.

노연이, Studio 402, 200x150cm, Oil on Canvas, 2025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전시전경
그것은 관념에 불과하지만 현실화의 가능성은 있다. 관념은 여러 사회적인 제도를 통해서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집부터 사원까지 상징적 우주와 개인의 관계는 양면적이다. 그는 정체성 자체가 만들어지는 자리에서 변화를 꾀한다. 계단으로 상징되는 끝없는 복종의 노력에 틈이 보인다. 작품 속 인물을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은 채 엉거주춤하다. 작품 [Anxious Opening](2025)에서 칩거하며 연구 중인 인물은 육중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안에서의 산물이 밖에서 통할지는 미지수다. 주체가 보는 관점과 타자가 보는 관점에는 간극과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작가는 문턱을 넘는 극적인 순간을 포착했다. 이전 작품까지 그는 방에서 나가지 못하는 처지였기에 극적이라 할만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역력하지만 도전을 피할 수는 없다. 작품 [Studio 402](2025)에서 실내에 바글거리는 벌레의 모습은 공포스럽다. 경계짓기는 동화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동반하는 원초적 반응이다.
출전;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