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된 어둠
이선영(미술평론가)
손주왕의 [Melan Love] 전은 얼마 전 작품 [I am my body](2024)에서도 나타나듯 몸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통상적으로 몸은 머리로 대표되는 이성의 지배하에 놓인 종속적인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몸은 주체가 된다. 전에는 그 반대로 생각하고 살아온 그이기에 이러한 전환은 작품에 기록될 만큼 중요하다. 푹 가라앉아 있었던 작가는 몇 년 전부터 시작한 달리기를 통해 심기일전했다. 심연에 칩거하던 우울은 샘솟는 에너지로 변화된다. 부드럽게 그리고 힘차게 체액이 분출되는 듯한 모습은 몸이 재현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움직이는 미시적 과정임을 알려준다. 작품 [몸이 선을 넘어](2024)는 과정 중의 주체가 뛰어넘는 여러 경계를 말한다. 고정된 정체성의 해체는 주체의 위기로 간주되지만, 변화가 필요한 단계에서 해체는 긍정적이다. 경계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지만, 변화가 필요한 이에게 경계는 다시 배열되어야 했다. 사방으로 솟구치는 체액의 흐름은 변화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연필로 그리고 오일 파스텔로 덮은 후 유화로 칠해서 여러 층이 깔려있다.

Body fest, 캔버스에연필, 오일파스텔, 유채, 130.3x162.2cm, 2024

Free the body, 캔버스에연필, 오일파스텔, 유채,91.0x116.8cm, 2024
캔버스에 연필, 오일 파스텔, 유채 등 복합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 형태, 색감 등을 모두 살려내고자 한다. 예술은 인공이지만 동시에 자연과 같은 두툼한 실재의 차원을 얻고자 하는 선택이다. 자아비판이자 문명비판의 성격을 띄는 손주왕의 작품에서 ‘차갑고 비어있는’ 인공물은 악역을 맡곤 한다. 2024년에 ‘몸’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작품들에서 수면 아래 [I am my body2], 지평선 위 [I am my body], 추상적 공간 [body fest], 수직/수평선의 구도를 총괄하는 복합적 차원 [free the body] 모두에서 캔버스 화면을 가로지르는 힘찬 궤적을 남긴다. 2025년 영천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작품들은 주체가 요동치는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들어온다. [Melan Love]라는 전시 부제가 붙은 작품들은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직역하면, ‘검정의 사랑’인데, 이는 멜랑콜리아(Melancholia)에서 빌려온 합성어다. 작가에 의하면 ‘멜랑콜리아는 그리스어 ‘멜라노스(melan,검은)와 콜레(chole,담즙)로 해석되어 체내에 흑담즙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울한 기질이 강하다’는 고대 의학 이론에서 왔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삶을 죽음 속에 밀어 넣고 삶과 죽음 사이에 어떤 공간도 남겨 놓지 않는 멜랑콜리는 도덕적인 면에서는 항구적인 근심이고 성적인 면에 서는 고통스러운 무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크리스테바는 다른 책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인간이 위대한 것은 그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파스칼) ‘우리가 삶을 통하여 찾고 있는 것을 오직 그것, 죽기 이전에 우리 자신이 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슬픔인지도 모른다’(셀린)는 말을 인용하면서, 멜랑콜리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크리스테바가 ‘멜랑콜리로 향한 성향 없이는 정신 현상은 없으며, 단지 행위나 유희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듯, 많은 철학자, 문학가, 심리학자들은 예술의 기저에 깔린 멜랑콜리에 주목한다. 손주왕 또한 씨름 선수처럼 자신을 쓰러뜨리는 어두운 힘을 역이용한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그래서 불안한 93년생의 젊은 작가에게 우울한 사랑은 예외적이기 보다는 통상적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주체가 가장 고양되는(그만큼 추락하기도 하는) 체험과 작업의 교차점을 말한다. 사랑은 핑크여야 하지만 그의 사랑은 검정이다.

I am my body(1), 캔버스에연필, 오일파스텔, 유채, 130.3x162.2cm, 2024

I am my body(2), 캔버스에연필, 오일파스텔, 유채, 91.0x116.8cm, 2024

너무 가까운 사랑,종이위에연필,오일파스텔,유채, 20 x 20cm, 2025

깨어진마음,종이위에연필,콩테,크레파스,유화, 90.9 x65.1cm, 2025

빈곤이 나의 안식처, 종이위에 연필,콩테,크레파스,유화, 273x195cm, 2025
그것은 그가 인간을 ‘결여’의 관점으로 본 결과다. 그림자나 어둠을 떠올리는 검정은 분명 결여이자 부재일 것이다. 하지만 조형적으로 볼 때 모든 색이 다 합쳐지면 블랙이 된다. 블랙은 잠재성의 도가니이며 여기에서 꺼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다양할 수 있다. 바닥을 치면 튀어오를 수 있는 높이의 범위는 더 커질 수 있다. 이러한 역설 어법은 사랑에 대한 생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떤 책의 문구를 빌어서 ‘내가 부서지고 생기는 것이 사랑’임을 말한다. 최근 작품에서 그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아닌 것, 즉 사물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느슨한 관심](2025)은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개를 통해 감정 상태를 전달한다. 동물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가진 자명한 본성이 다소간 변형된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언어적 존재로, 언어의 분열적 조건 때문에 불투명하다. 기하학의 공리같은 관념적 본질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방식이 필요한 이유이다. 인공물의 경우 기하학적인 도상으로 표현된다.
코드의 조합인 인공물은 작품 [차갑고 비어있는](2025)처럼 최대한의 경제성을 위해 내부를 비워내며, 유기체가 아니기에 차갑다. 이 시리즈는 정해진 구성단위와 그것의 조합적 배치를 통해 전방위적으로 확장 중인 인공물의 양상을 추상적으로 보여준다. 스포츠 상품 로고가 과도하게 박혀있는 모자는 대표적인 인공물이 기표로 이루어진 빈 실재임을 말한다. 자연은 물론 인간 또한 이러한 인공적 생산 대상으로 변화 중이다. ‘차갑고 비어있는’은 근대부터 더 가속화되기 시작하는 관료주의의 특성이다. 그 시기에 인간은 역사적 주체로 한껏 고양되었다가 분업으로 조각조각 파편화됐다. 대중은 익명적인 체계의 구성요소로 주어진 기능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텅 비어있는’ 그것은 자체의 구성원리가 아닌 타자가 필요하다. 쫒겨난 인간,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다른 인간들, 인간도 같은 처지가 될 도구화된 자연 등은 마찬가지로 타자인 예술과 함께 나타날 것이다. 인공물과 달리 자연은 실재적이다.

수직의 개미굴,종이위에 연필,오일파스텔,유채, 20 x 20cm, 2025

차갑고 비어있는(1),종이위에연필,콩테,크레파스,유화, 90.9 x65.1cm, 2025

차갑고 비어있는(2),종이위에연필,콩테,크레파스,유화, 90.9 x65.1cm, 2025
물론 실재는 도달해야 할 미지의 상태이지 자명한 출발점이 되지는 않는다. 손주왕의 근작에서 인간과 동물은 ‘차갑고 비어’있지 않다. 살아있는 유기체와 관련된 그의 표현에는 형상이 있다. 이미지는 자신은 물론 사회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한 서사를 전달하는 매개이다. [깨어진 마음](2025)은 가슴팍에 무엇인가를 박힌 채 의기소침하게 앉아있는 여성을 보여준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습이 얼마 전 인간의 활동을 꽁꽁 묶어놨던 코로나의 악몽이 떠오른다. 사회에 위기가 닥치면 취약한 위치에 있는 이들은 더 큰 위기를 맞는다. [너무 가까운 사랑](2025)시리즈는 마치 샴쌍둥이처럼 신체 기관 일부를 공유하는 연인이다. 예술가의 길을 같이 가고 있는 그들은 비슷한 난관을 이겨내야 하는 동지면서, 각자에게 내재된 결여를 상대에게서 채우려 하는 서툰 연인의 모습이다. [빈곤이 나의 안식처](2025)는 9개의 화면이 붙어 풍경을 완성한다. 이미 누가 먹어치운 사과의 씨 부분에 개미가 거처를 마련하는 모습이다. 사라진 과육은 박탈이나 빈곤을 상징하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세계가 뒤에 펼쳐져 있다. 바다는 대지와 더불어 실재와 비유되곤 했다. 현대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실재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다가갈 수는 있고, 예술은 그러한 길 중의 하나이다. 마주 서 있는 두 수직의 존재는 인간을 비유한다. 남은 것이 없는 두 존재는 더 비참한지, 아니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부족함을 극복할 것인지는 각자의 해석에 달려있다. 종이 크기 때문에 여러 조각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마치 퍼즐처럼 그림과 이야기를 맞춰보라고 하는 듯하다. [-안식처]라는 키워드는 사과보다는 개미에 집중하게 한다. 카프카의 주인공이 부조리한 현실을 탈주하기 위해 벌레로 변신하듯이, 개미는 사라진 과육을 빈곤이 아닌 안식처로 삼는다. [수직의 개미굴](2025)은 사회적인 동물로 알려진 개미를 통해 고층빌딩 등 수직의 생태계를 구축한 인간세계를 비유한다. 그는 개미를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이전의 자신을 반성한다. 우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서 사회는 개미처럼 살아야 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사회의 상징적 규칙에 따르는 성실함은 되려 우울증을 낳았다. 개미는 사회의 지배적 질서의 희생물이 되었지만, 낮아진 자리를 반등의 기회로 삼는다.
출전;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