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적 리얼리즘

  

이선영(미술평론가)

 

박훈은 최근에 쌀을 소재로 다양한 형식과 서사를 펼쳐왔다. 2022년 [생명연습] 전에 쌀이 있었다면, 올해는 쌀가루가 등장한다. 쌀은 폭식과 거식의 문화 때문에 기피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주요 에너지원이다. 가루가 되었을 때 에너지에 더 가까워지는 물질이다. 물질과 에너지가 호환되는 것이 물리법칙이다. 작품 속 하얀 가루는 작가가 절구에 넣고 손수 빻아 수행성이 강조된다. 쌀이라는 맥락을 모르면 마약인지 뼛가루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그의 작품은 어둡고 중독적이다. 약재나 뼈도 절구로 빻곤 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몸과 밀접하다는 것이다. 몸은 정상과 이상을 가늠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손이나 발 외에 기관을 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내밀한 차원이긴 하지만, 피부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털의 산재와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의 조합은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바로 그 몸을 가리킨다. 몸은 하나의 덩어리라기 보다는 장(場)으로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작품의 내용을 이룬다.



박훈_붉은 경전(부제;자화상)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6.7×100cm_2024.

재료- 길가에서 주은 돌, 절구질한 작가의 오른손 쌀 한 줌. 작가.



.박훈_태몽(부제;세월),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6.7×100cm_2025

재료- 절구질한 작가의 오른손 쌀 한 줌 x 50, 작가의 고향마을 저수지물, 붉은 실.


작가가 조사한 바로는, 절구질은 한국 및 동남아의 민속에서 주술적 의미를 가진다. 그 문화권에서 쌀이 가지는 위상을 생각할 때, 주술은 한갓된 가상이 아니라 현실과 연동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의 현실이다. 몸과 땅을 연결시키는 쌀은 존재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실재를 가리킨다. 박훈의 작품은 주술과 리얼리즘이 함께 한다. 남미 쪽에서는 문화예술적으로 풍요로운 결실을 낳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사조도 있으니 만큼, 주술적 리얼리즘도 있을법하다. 절구질에 내재된 반복은 액땜에 효과적이다. 반복은 정신분석학에서도 트라우마의 치유 방식으로 제시되곤 한다. 인생은 모든 것이 충만하게 공급되었던 모태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상처의 연속이다. 모든 상처는 원초적 상처의 반복이며 상처가 재발 될 기미가 보이면 미리 선수침으로서 치명적 결과를 약화시킨다는 정신분석학적 설명은 반복의 존재 의미와 기능에 대한 유력한 가설 중의 하나이다. 


일상적 경험에서 반복은 심신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에 치유적 효과도 있다. 반복은 진폭이 크거나 불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호흡이나 소화의 과정처럼 생명의 항상성에 관련된 잔잔한 변화이다. 이러한 속성은 종교에서 활용(주문이나 송가 등)되곤 한다. 에너지의 들고 남을 최소화하는 금욕주의다. 하지만 박훈의 수행적 ‘금욕’은 식물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회화의 주조 색인 레드 계열이나 주요 형태인 털은 동물적이다. 그의 작품에 산재한 털은 계몽된 문명에서 억압되어 있지만, 여전히 인간의 기저에 흐르는 동물성을 상기시킨다. 동물 자체에는 부정적인 것이 없지만, 인간 중심의 사상에서 우선 순위는 있다. 쌀이 알갱이 형태의 반복이듯이, 털은 반복적인 선의 흐름으로 표현된다. 반복은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죽음본능과도 연결된다. 이때의 죽음은 유기체의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쾌락과 닿아있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그의 작품에는 죽음과 쾌락이 한데 엉긴 성애적 감각도 깔려있다. 



박훈_머리(부제;자화상)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6.7×100cm_2025.

재료- 부패된 알, 절구질한 작가의 오른손 쌀 한 줌, 작가



박훈_만년설2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6.7×100cm_2025

재료- 붉은 천, 절구, 절구봉, 절구질한 작가의 오른손 쌀 한 줌, 작가.


험난한 세상에서 생명의 종적 연속성이 가능하기 위해 자연은 쾌락과 죽음을 한 상자에 넣어 선물했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종의 영속에 개인적 차원은 없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는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R. 도킨스의 가설을 인용하고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생명은 ‘심지어 번식하기 위해서도 살지 않고 다만 다른 유전자들을 재생하기 위해 살면서 유전자들에게 임시 버팀대의 구실’만 한다. ‘도킨스에게 있어서 유기체는 자신의 복제기, 즉 유전자들의 영속성에 기여하는 일시적인 생존 기계이다. 우리가 동물들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을 바로 그것이다’(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 근본으로의 회귀되면서 부각되는 속성은 선도 악도 아니다. 온전한 쌀이 하얀 그림자로 뭉쳐있거나 흩어져있고, 때로는 껍데기를 둘러쓴 채 붉게 염색된 낱알들로 나타난다면, 쌀가루는 마치 승려들의 만다라나 인디언의 모래그림처럼 뿌려지며 그려진다. 화장(火葬)되어 빻아진 뼈도 자연에 뿌려진다. 


박훈의 작품에선 평범한 사물도 쌀가루의 가미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다. 알갱이가 가루가 된 것은 더 순화됨과 동시에 더 파괴됨을 의미한다. 그의 작품은 상반되어 보이는 양가적 의미 속에 격렬하게 진동한다. 쌀이나 쌀가루는 붉고 검은 계열의 어두운 형상들과 대조되어 밝은 부분을 표시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얗게 칠해진 것이 아니라, 스프레이 물감을 피해 간 빈 공간이다. 제때 밥을 못 먹었을 때와 같은 허기(虛飢, 虛氣)이다. 이러한 허의 공간은 색으로 친다면 흰색이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모든 색 중에서 가장 중요한 흰색은 빛의 모든 색을 합한 것으로 물리학적, 광학적 의미에서 단순한 색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흰색은 시작이다. 서구의 종교라면 최초의 빛이 바로 그렇다. 에바 헬러는 흰색이 ‘텅 빈’과 동의어인 언어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흰색은 라틴어를 ‘알붐album’이다. 앨범은 원래 하얗고 텅 빈 책, 사람들이 스스로 기억과 사진으로 채워나가야 할 책이다. 



박훈_숨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5×110cm_2024.



박훈_만년설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5×110cm_2024.

재료- 염색한 볍씨와 모래, 지점토, 절구질한 작가의 오른손 쌀 한 줌.



 박훈_밀양4 Secret sunshine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72×96cm_2024

재료- 어느 주택가 근처 낡은 컨테이너 사무실, 작가의 오른손 쌀 한 줌.


박훈에게 쌀은 생물학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충만하게 채워져야 할 텅 빈 장소로 나타난다. 한 줌의 쌀가루는 반죽되어 작은 그릇(종지) 모양으로 설치 및 사진 작품에 두루 등장한다. 그는 한 줌 쌀, 한 그릇 밥의 신성한 의미를 강조한다. 절구질한 쌀 한 줌은 ‘유한한 생명의 구체성’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그것은 자식에게 무조건 주는 존재였던 어머니(일상어에서 맘, 마마, 맘마의 유사성은 의미심장하다)를 상기한다. 하지만 높은 곳의 신성함은 그만큼 나락의 가능성이 있다. 특히 생존에 관련돼서 신성함의 의미는 양가적이다. 한 개체의 생존이 다른 개체의 죽음을 전제하는 생태적 고리가 자연의 법칙에 선명하기 때문이다. 먹고 먹히는 연쇄적 순환 속에서 성/속을 나누는 금기는 위반된다. 위반을 통해서 역으로 성스러움이 드러난다. 박훈의 작품에서 성스러움은 고정적이지 않고 과정 속에서 언뜻언뜻 드러날 뿐이다. 체험을 강조하는 종교적 전통은 동서를 막론하고 주변적 지위(이단, 미신)로 밀려나곤 했다. 


[붉은 경전]이라는 전시제목은 흑/백의 문자성에 바탕한 경전이 아닌 몸의 경전임을 말한다. 피와 살의 변주가 만들어내는 질척한 지상적 바탕을 상징하는 색이 붉은색이다. 순도높은 물감을 사용하지 않는 그의 작품에서 색을 명확히 특정하기는 힘들지만, 대략 붉은색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레드의 상징은 불과 피라는 두가지 근본적인 경험에 따라 결정된다. 그 때문에 반란이나 혁명 같은 정치적 의미로 이어진다. ‘오늘날같이 계몽된 시대에도 피는 생명력의 정수로 받아들여진다. 녹색이 식물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처럼 레드는 동물의 생명을 상징’(에바 헬러)한다. 이러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기독교의 빵과 포도주가 신의 살과 피를 상징했다면, 박훈의 작품에서 붉은 볍씨 또한 생명력의 정수가 합쳐진 신성한 것이다. 직접적인 표현은 피해 가지만 그의 작품에 깔려있는 성적 분위기 또한 색에 의해 힘을 받는다. 



박훈_뿔, 빛의 자리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5×110cm_2024



박훈_흰산, 빛의 자리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5×110cm_2024. 

재료 – 염색한 속옷, 절구질한 작가의 오른손 쌀 한 줌.


에바 헬러에 의하면 레드는 힘과 적극성, 공격성의 색으로 남성적이다. 불은 남성적이며 물은 여성적이다. 또한 ‘레드는 예로부터 물질을 상징하는 색’(에바 헬러)이다. 이처럼 레드는 근본적(radical)인만큼 위험한 색이다. 레드가 살과 땅을 상징한다면 쌀이나 쌀가루의 허연 궤적인 빛과도 같이 현존한다. 빛은 종교에서 중요한 상징이다. 그는 종교적 소품으로 자주 사용되는 목기와 향을 소재로 한 사진 작품에서 선명하게 나온 것 대신 심하게 흔들린 장면을 선택한다. 작품 [향]에서 작가는 ‘우연히 마음의 흔들림을 찍은듯 싶다’고 말한다. 순간을 고정시키는 사진의 활용, 그리고 사진보다는 덜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매체인 회화는 서사의 비약과 도약을 야기한다. [붉은 경전] 전의 포스터로 사용된 두 사진 작품은 힘겹게 들어 올린 거대한 돌과 작은 종지들에 내재된 양극성, 요컨대 수집된/만들어진, 광물성/식물성, 무거운/가벼운, 하강/상승, 붉은/흰, 하나/다수, 남성적/여성적,...등 여러 차원에 내재된 간극에서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폭은 크다. 


[붉은 경전] 전에서 전시장의 벽을 주로 채우는 것은 사진 작품 28점이고, 회화는 가운데 세운 가벽 위에 10점을 걸었다. 앞뒤로 그림이 붙은 가벽 앞에는 붉게 염색한 볍씨와 모래가 깔리고 한 줌의 쌀로 만든 종지들 50개가 바닥에 놓여있다. 그 안에는 고향의 저수지에서 길어온 물을 담았다. 좌우의 가장자리에는 기둥이 잘린 나무가 하나씩 배치된다. 큰 나무에는 쌀가루 한 줌 쌓기가 작은 나무에는 한 줌 뿌리기가 실행됐다. 쌓기와 뿌리기는 긴장의 고조와 해제라는 에너지의 흐름을 예시한다. 그만의 상징적 우주에서 그가 정한 규칙은 엄격하게 지켜지는 듯하다. 자연의 법칙에 대응하는 인간의 규칙이다. 예술 또한 제의처럼 그 규칙을 따르며, 위반 또한 규칙과의 관련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자율화되어 허공에 붕 떠 있는 미에 다시금 삶의 대지에 접속하기 위한 의례이다. 그의 작품에 깔린 어둠은 깊이의 또 다른 모습이다.  



박훈_달밤, 어머니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5×110cm_2024.

재료- 낡은 빨래판. 길가 버려진 나뭇가지, 조화, 절구질한 작가의 오른손 쌀 한 줌.



박훈_백야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5×110cm_2024.

재료- 먹고 남은 두 마리의 닭뼈에 채색, 장독, 절구질한 작가의 오른손 쌀 한 줌.



박훈_꿈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5×110cm_2024.



박훈_나의 음각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75×50cm_2024 

재료- 절구질한 작가의 오른손 쌀 한 줌.


쌀의 상징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상상은 살, 모태, 알 등등으로 전개되지만, 제단에 바쳐진 것 같은 설치의 모습은 등잔 같기도 하다. 실제로 불이 켜있다기 보다는 하얀 형태와 조명을 반사하는 물이 빛의 역할을 한다. 그가 회화와 사진에 활용한 것들이 총출동하여 상호참조적 맥락을 만든다. 인간 욕망의 근원으로 소급하는 방향성 속에서 자율화된 순수미술은 큰 의미가 없다. 사진, 그림, 오브제들이 서로를 반향 하는 우주가 된다. 사진 작업은 현실의 사물들이 등장하고 연작으로 제작되어 서사적이다. 박훈의 설치 및 사진작품에서 쌀가루로 빚어 만든 종지들은 어릴 적 동네의 우물이나 큰 저수지같이 움푹하다. 작가는 이 종지들에 빗물이나 저수지 물을 넣곤 했다. 그릇이라는 여성적 형태에 어울리는 원소인 물이다. 위험하니 가지 말라는 부모님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곧잘 갔던 동네의 저수지에서 어린 박훈은 찬란하게 빛나는 물과 물가의 알몸들을 처음 보았다. 


그가 이 전시에서 물과 빛을 끌어들인 것은 이러한 근원적 체험에 있을 듯싶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이오네스코와 낙원의 향수]에서 예술가에게 빛의 체험이 가지는 의미를 서술한 바 있다. 이오네스코의 결정적 체험은 17-8세 때 루마니아의 한 시골 마을에서 이루어졌다. ‘...난 전혀 다른 세계 안에 들어가 있었고 거기에는 더 많은 빛으로 차 있었으며 이미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그것은 모든 관습의 무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 같았다...나는 나중에 내가 슬프거나 괴로울 때 이 순간을 기억하기만 하면 다시 기쁨과 평정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이오네스코) 물론 이러한 현존의 순간은 극히 짧으며, ‘일종의 기적적인 순간이 지나면 갑자기 세계가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이렇게 세계는 구멍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예술이 종교와 만나는 지점은 이러한 신성한 경험(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불러들이는데 있다. 



박훈_밤의 정독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6.7×100cm_2024.

재료- 낡은 개다리 책상, 염색한 볍씨와 모래, 절구질한 작가의 오른손 쌀 한 줌.



.박훈_그날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6.7×100cm_2025


박훈의 작품에서 빛은 네가티브 방식으로 나타나며 간접적이다. 검붉은 바탕 안쪽에서 미광을 발할 뿐이다. 하지만 살과 땅이라는 실재의 무거움을 반등하는 계기는 있다. 가령 [흰] 시리즈는 바람처럼 가벼운 형상들이 살랑이는 빛의 느낌으로 산재한다. 어둠과 빛은 밤과 낮처럼 교차하며 지각과 기억을 연동시킨다. 제의는 이러한 체험을 집단화, 제도화한다. 엘리아데는 [성과 속; 종교의 본질]에서 성/속의 세계를 구별한다. 그의 분류에 의하면 세속적 시간, 일상적인 시간의 지속과 거룩한 시간의 구분이다. ‘종교적 인간은 제식이라는 수단에 의하여 일상적 시간의 지속으로부터 거룩한 시간에로의 이행을 위험 없이 수행할 수 있다. 모든 종교적 축제, 모든 예배의 시간은 신화적인 과거에, 태초에 일어난 거룩한 사건의 재현을 나타낸다.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영원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거룩한 시간을 회복하려고 시도한다.’ (엘리아데) 


제의란 역사적 시간이 고갈시킨 심신을 갱신하기 위한 근원의 시간으로의 회귀이다. 제의는 먹을 것이 귀하던 저 생산력의 시대에 공동체가 함께 잔치(축제)를 벌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공동체는 희생된 제물을 함께 먹는다. 박훈의 작품에서 하얀 쌀은 빛으로 연출되곤 한다. 가루가 됨으로서 비물질성이 강조된다. 쌀 한 줌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마치 정한수처럼 다가온다. 물과 이어지는 물고기 또한 쌀가루로 빚었다. 숭고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밑바닥의 현실이 있어야 한다. 동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초현실주의자같은 ‘객관적 우연’을 포착하는 것은 수집된 오브제와 그것이 담긴 사진이다. 작가에 의하면 [밀양] 시리즈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왔으며, ‘일종의 연출 다큐 사진’이라고 말한다. 집 근처 생활 쓰레기나 폐기물. 떨어진 꽃잎이나 녹슨 컨테이너 위에 절구질한 작가의 오른손 쌀 한 줌이 뿌려진다. 하얀 가루는 색감 때문에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 비춰진 빛의 느낌으로 승화된다. 밑바닥 현실에 예술이라는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박훈_기념비1_종이에 채색_150×112cm_2019



박훈_기념비2_종이에 채색_150×112cm_2019



박훈_몸바늘_종이에 채색_110×80cm_2023



박훈_몸부처_종이에 채색_110×80cm_2023


박훈에게 쌀가루는 삶에서 우연히 만난 것을 예술적 필연으로 변화시키는 매개이며, 사진은 그 흔적을 담아낸다. 잘린 조경수를 제단으로 연출한 작품 [흰산, 빛의 자리]에서 한 줌 쌀은 잘린 단면을 빛의 자리로 변모시킨다. [뿔, 빛의 자리]에서 잘린 뿔 또한 희생의 의미를 제의적으로 되새긴다. 낡은 빨래판에 수저 모양으로 쌀가루가 배치된 작품 [달밤, 어머니]는 늘 ‘밥은 묵었냐’고 통화를 시작하는 노모를 생각하며 작업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한 작품에는 도끼가 등장하는데 일하는 아버지와 함께 거세공포도 떠올린다. 그가 살며 작업하기 위해 먹었던 고기들은 붉은 뼈나 하얀 가시 등으로 나타나 매일의 식사를 위한 희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작품 [숨]은 먹기 위해 사냥하는 북극의 삶을 숨구멍으로 표현했다. 고향 천(川)으로 회귀하는 연어떼를 노리는 곰들처럼, 물개가 30-40분 간격으로 숨을 쉬기 위해 뚫어놓은 작은 구멍을 노리는 북극 원주민은 하얀 빙판을 피로 붉게 물들인다. 


사진 및 설치작품에서 작가의 마스크가 바닥에서 올라오는 듯한 연출은 숨구멍이 가지는 역설적 위상이 동물에게만 해당되지 않음을 알려준다. 작품 [땅과 살]은 쌀과 희생의 의미를 역사적 사회적으로 맥락화 한다. 이전 전시에서 햇빛에 나락을 건조시키는 영상 작업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나아가 볍씨와 모래를 붉게 염색해서 수탈의 역사를 표현한다. 작가에 의하면 탐관오리들이 배급량을 강제로 늘리려고 민초들에게 모래 섞인 쌀을 나눠주곤 했다. 붉은 볍씨들과 모래는 쌀과 관련된 민초들이 고난과 투쟁을 상징한다. 그것은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에 나오는 사건이며, 모래 섞인 쌀에 격분한 민초의 반란은 한 많은 땅에 적지 않은 피를 뿌렸다. 나무 창호문, 개다리 책상, 망가진 절구, 색바랜 조화 등 오래된 물건으로부터 싹터오는 상상은 한 줌 쌀가루를 통해 의미를 더한다. 작가 자신 또한 그러한 폐기물이나 오래된 사물의 반열에 올라 소재화된다. 



박훈_끼니_종이에 채색 _65×48cm_2024



박훈_밑바닥에서_종이에 채색 _65×48cm_2023


부패된 알을 입에 문 자화상은 인간적인 얼굴은 가려지고, [머리]로 환원된 모습이다. 붉은 천을 머리에 둘러쓰고 절구를 두 손으로 든 [만년설 2]에는 처단당하는 희생자의 면모가 있다. 그는 기꺼이 예술의 제단에 자신을 희생물로 바친다. 작가가 죽어야 작품이 사는 것이다. 작품 [태몽]에서 쌀가루로 만든 종지는 작가의 나이와 같은 50개다. 그 안에는 고향의 저수지 물이 들어있다. 삶과 작업이 마르지 않는 샘물같은 것이 될 것을 기원했을까. 작품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작가의 손자국 발자국 등은 그의 작업에 깃든 소망이 있다. 하얀 쌀자국 붉은 손자국이 찍힌 작품 [끼니]에서 ‘작업에 사용된 쌀의 양이면 내 한 끼니 공기밥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가벽에는 앞뒤로 4점씩, 가벽 옆에도 한점씩 걸린다. [흰] 연작 4개는 ‘쌀 한줌씩을 뿌리고 찢어진 방충망을 배치시켜 스프레이 작업 후 털을 그려 넣은 작품’으로, ‘몸의 모진 풍파를 그리려’ 했다. 


천을 사용한 바람결의 표현은 시리즈를 나란히 놓고 연속적으로 보면 움직임이 느껴진다. 뒷면의 작품들과 달리 쌀과 털은 바람에 흩어진다. 가벽 양편에 [몸부처]와 [몸바늘]은 그 사이의 [기념비 1,2]와 한 벽에 걸려있다. 집 근처의 작은 절에서 영감을 받은 [몸부처]는 부처의 얼굴과 광배가 하얀 쌀의 궤적으로 형상화된다. 화면 아래에 배치된 부처상 때문에 상대적으로 넓은 공간이 된 상단부는 고뇌하는 정신의 영역이다. 그에게 정신은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형이상학의 토대는 물질이다. 몸을 이루고 움직이게 하는 쌀은 그러한 물질의 결집체이다. 물질이 어느 순간에 정신이 되는지는 생명 창조의 순간처럼 비밀에 싸여있고, 최첨단 과학기술 발전을 자극하고 고무하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모래 섞인 붉은 볍씨가 등장하는 작품의 내용이 전제하는 것은 ‘물질’의 인정이 물질만능주의가 아닌 최소한의 평등을 위한 조건이다. 그러한 평등 위에서 진정한 정신적 자유도 가능하다. 



박훈_흰1_종이에 채색_110×80cm_2023



박훈_흰2_종이에 채색_110×80cm_2023



박훈_흰3_종이에 채색_110×80cm_2023



박훈_흰4_종이에 채색_110×80cm_2023


토대인 몸은 그것을 인정하지만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는 불평등을 유지하는 허위의식, 즉 내용이 없는 자유를 말한다. 가상현실 문화에 깔려있는, 먹을수록 허기지는 헛배부름이다. 화면 중앙에 바늘이 자리한 [몸바늘]은 어느 한 부분 빼고 더할 것 없는 기능적 사물인 바늘과 쌀 형상을 중첩시킨다. 몸으로 친다면 알몸이며, 몸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핵심이다. [기념비] 시리즈는 2019년에 제작된 것이지만 이번 전시에 선택되었다. 만들어진 시기를 넘나드는, 작품들끼리 이어지는 무의식적인 연결망은 작가가 격세유전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기념비1]은 한방울의 피를 떠올리는 이미지를 화면 중앙에 놓고 아래에 좌대를 배치했다. 중심으로부터 뻗어나가는 털들이 보인다. [기념비2]는 아래로부터 솟아오르는 양기가 음기를 향해 간다. 그의 작품에 깔린 성적 메타포는 남/녀라기 보다는 삶과 죽음을 연결짓는 근본적인 성이다. 


박훈의 작품에서 인체라는 거시적 차원은 거의 드러나지 않기에 선정적이지는 않다. 그가 펼치는 미시적 차원의 몸은 일종의 몸풍경(bodyscape)으로, 거기에는 ‘유전자들에 의해 창조된 기계들’(테니슨)의 메커니즘이 나타날 뿐이다. 물론 동물과의 차이는 있다. 도미니크 르스텔은 [동물성]에서 동물의 완전함은 인간의 불완전함과는 또 다른 영역에 속한다고 말한다. ‘동물의 행동이 정확하다면 그것은 기계적이다. 동물의 완전함은 인간의 완전화의 가능성과 대립된다. 인간의 다양한 행동은 그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도미니크 르스텔) 그 불확실성도 동물과 공유하는 기본적인 확실성에 기반하는 것이다. 더 많이 코드화되는 세상은 인간의 불확실성을 감소시키려고 한다. 예술은 아직 불확실성이 남아있는 고뇌 또는 자유의 영역이다. 빛이 어둠을 통해서 그 진가가 드러나듯, 자유 또한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 그것은 예술이 한갓된 유희가 아니라 제의적 묵직함을 향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