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혀진 세계를 떠도는 눈(目)

 

이선영(미술평론가)

 

 

산과 나무, 늪과 눈(으로 보이는 무엇) 등의 소재가 화려한 색채와 역동적인 구성으로 펼쳐지는 최나무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식물이나 광물같은 정적 존재에서 출발한 점이 흥미롭다. 정적 존재의 동적 양상으로 변화는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통상적으로 산과 나무는 움직이는 동물의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식물과 광물에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물리적 차원에 의한 수동적인 것이다. 그러한 존재의 움직임은 그만큼의 큰 변화를 말한다. 하지만 인간사를 넘어서 자연사로 시간대를 늘려보면 식물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의 촉발자였고, 지금도 석탄 자원으로 에너지 저장고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준다. 얼마 전 작업인 [녹색불] 시리즈(2022-2024)처럼 그에게 녹색으로 대변되는 식물은 ‘태워 없애는 불이 아닌 살게 하는 불로서 자연의 에너지를 표현’한다. 식물의 회복력에 주목한 작가는 ‘식물로 대표되는 자연의 에너지가 나를 통하여 밖으로 다시 뿜어지길’ 기대한다. 




 전시전경(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갤러리 호호에 있음)



산은 어떠한가. 그의 작품에서 원뿔형의 안정된 구조의 산은 팽이처럼 뒤집어진다. 산은 변치 않음의 상징이지만, 그 또한 그 부드러운 능선이나 날카로운 단층들을 볼 때 폭발적인 생성의 시기가 있었고, 지금의 정지란 긴 과도기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 이전 작업에도 등장하는 산은 작가에게 ‘불변하는 믿음, 이상향의 상징’이었으나, 그 산은 ‘뒤집히고 터지고 녹아 흘러내린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가지고 있던 신념의 붕괴를 표현’한다. 작가에 의하면 ‘산은 더 이상 불변이 아닌 붕괴된 지형’이며, 이러한 변형된 자연은 ‘액불’, ‘도깨비불’, ‘매달린 나무’, ‘위장된 산’, ‘허공의 계곡’과 같은 제목의 작업으로 전개된다. 산과 나무는 지하-지상-하늘이라는 세 세계를 연결하는 상징으로, 동서고금을 통해서 신성과 교통할 수 있는 매개물로 간주되어왔다. 그래서 뒤죽박죽된 상태는 덧없이 흐르는 역사를 갱신할 수 있는 신화적 자리가 파괴된 심각한 상황인 셈이다. 


젊은 시절 수년간 배낭여행을 다닐 정도로 자연을 좋아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그저 재현되는 대상이 아닌 움직이는 자연, 과정으로서의 자연이다. 안정된 재현의 대상이 아닌 생성/파괴되는 자연은 동적이다.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오랫동안 미학의 중심을 이루었던 재현주의에 충실한 작품에 대해 ‘자연 대상을 최대한 유사하게 복제하는 눈속임 기법을 따른 작품이 완성도 높은 회화’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최나무의 작품에서 재현이 가능한 주체/객체의 안정된 관계 또한 무너진다. 미술은 형식적 관례를 통해 안정성을 확보해왔다. 가령 원근법이 대표적이다. 마거릿 올린은 [새로운 미술사를 위한 비평용어 31]에서 대부분의 그림들은 시선을 거기에 둘 것을 허용하고 눈이 충만함의 환영에 탐닉하도록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하나의 통일성 아래 정렬시키는 듯한 관례는 하나의 특권화 된 관망자를 위해 마련하는 것이다. 




왼쪽부터 검은 계곡 02 Black Valley 076.0x56.0cm charcoal on paper/엉킨 나무Entangled Tree 76.0x56.0cmcharcoal on paper 2025/뒤집힌 산 - 드로잉 Inverted Mountain - Drawing 76.0x56.0cm charcoal on paper 2025/검은 계곡 01 Black Valley 01 76.0x56.0cmcharcoal on paper 2025



왼쪽부터 뾰족한 늪 Thorned Swamp 72.7x91.0cm (30F) oil on canvas 2025/ 푸른 늪 Blue Swamp 72.7x91.0cm (30F) oil on canvas 2025



그림 속 무엇이 관객을 보는 듯한 장치가 있으며 이는 변화 중인 풍경과 더불어 움직이는 듯한 최나무의 작품은 일방성이 아닌 상호적 시선이 작동된다. 격변의 풍경에 상응하는 안정된 주체의 자리의 흔들림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관념적 가정을 의문시한다. 노르베르트 볼츠는 [컨트롤된 카오스]에서 라틴어 ‘Cogito’를 ‘나는 생각한다’로 번역하는 것이 틀렸다고 한다. 그 번역에서는 아무 근거 없이 주어(주체)인 나를 가정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고유한’ 사고들이라고 하는 것은 타인들의 사고와의 교류에서 기인된 끊임없는 피드백의 결과들이라는 것이다. 노르베르트 볼츠는 ‘코기토’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인간을 중심에 놓는 사고를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포스트 휴먼이란 결코 비인간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의 유적 본질은 그것이 휴머니즘적 인간상의 속박을 벗어 던질 때 비로소 자유롭게 개인적이며 동시에 다채롭게 전개된다.’(노르베르트 볼츠) 


최나무라는 작가의 예명은 인간이 아닌 자연에 투사된 정체성을 말해준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을 포함한 동물적 존재는 미미하다. 동물은 곤충이나 요정처럼 작으며 눈같은 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들은 숨은 그림처럼 애써 찾아야 하거나 무심결에 발견되는 것이다. 화면 가운데를 차지하면서 인물화 차원으로 자리할 때도 이 미지의 존재에게 눈동자는 없다. 작가는 이에 대해 ‘그 눈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과녁처럼 떠 있는 둥근 점이거나 공허한 빛의 파편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실체가 없음에도 시선의 중심처럼 기능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실재하는 눈으로 착각하고 마주하려는 본능적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이는 환영이 시야에 침입하는 방식이며, 시선이라는 구조가 어떻게 현실 인식에 개입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 형상은 도깨비불의 확장’이다, 인간은 보면서 보이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이는 공동체에 필수적인 사회적의식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역기능도 있다. 






전시전경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대한 의식의 과도함은 SNS에서 넘쳐나며 미시 권력망과 연동된 감시장치의 편재는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든다. 최나무의 움직이는 시공간은 살아있는 경험으로부터 유리된 추상적 시각을 배제한다. 마거릿 올린은 앞의 사전에서 인간관계가 권력관계가 메두사같은 응시로 인해 돌로 변하는 시선의 폭력성을 말한다. 그는 응시가 다른 존재를 통한 자기 완성에의 욕망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응시에 대한 투쟁이 존재하는 바, 능동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응시의 주인이 되면 다른 사람은 보이는 대상이 된다.’(마거릿 올린) 시각매체가 대상을 고정할 때 스스로도 고정된다. 흔들리는 세계에서 고정은 과정이 된다. 원근법으로 대변되는 고정된 시각의 관례도 비판되어야 한다. 마틴 제이는 [시각과 시각성 중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에서 캔버스를 투명한 창문이라고 한 알베르티의 유명한 비유에서 캔버스를 지배하는 것은 기하학적인 공간이며 여기에서의 눈은 단일한 눈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불규칙하고 단속적인’ 움직임들로서 하나의 초점에서 다른 초점에로 옮겨 다니는 동적인 눈이라기보다는 정적이고 깜박거리지 않는 고정된 눈으로서 이해되었다. 최나무의 작품 속 눈구멍같은 형태들은 식물성과 광물성이 주가 되는 (외적으로 볼 때)정적인 생태계 속에 숨어서 보는 이를 바라본다. 움직이는 과녘처럼 떠도는 점, 눈동자 없는 눈은 관념적 중심을 해체한다. 노먼 브라이슨은 [시각과 시각성 중-확장된 장에서의 응시]에서 보는 주체가 시각 경험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그것은 말하는 주체가 발화의 중심에 있지 않은 것과 같다. 그것은 ‘시각 영역을 가로지르는 기표들의 일련의 연쇄적인 체계를 제어할 수도 없다는 것’(노만 브라이슨)이기 때문에 무력할 수 있다. 작업 초기에는 주로 ‘자연의 에너지를 그리다가 얼굴과 표정이 없는 머리 없는 내가 등장’했고, 이후 능동적으로 바뀌면서 얼굴과 눈이 등장했다. 코로나 때 다같이 고통받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작가는 능동적 자세를 갖게 됐다. 




액불 Purging Fire 112.1x194.0cm (120P) oil on canvas 2025



붉은 별똥별 Scarlet Meteor 112.1x145.6cm (80F) oil on canvas 2025



눈에서 광선이 발해지는 인물은 ‘내 안의 인물’로 간주한다. 그는 이러한 유령같은 존재에 대해 ‘믿고 있던 것들이 무너지고, 내면 깊숙이 침입해 들어오는 감정과 이미지들에 대한 응시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작가는 특히 작년 말에 전시 때문에 한국에 잠깐 와서 격변의 시기를 목도했다. 그 이전부터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사태는 기후위기, 전쟁. 대감염병 등등으로 일반화되고 있었던 터이다. 작가에 의하면 ‘[뒤집힌 산과 도깨비불]은 이미 전복된 세계에서 출발한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지질학의 격변설(catastrophe theory)을 이용하면 사회에서 나타나는 작은 효과가 어떻게 갑작스러운 변화로 이어지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르네 통의 주장을 인용한 바 있다. 이후에 혼돈(chaos)과 복잡성(complexity)에 이르기까지, 이론적인 영역에서는 변화는 상수가 되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조용히 우리 곁에 조용히 있는 식물적 존재는 위로가 된다. 


특히 코로나 이후 방치됐던 정원의 식물들의 생명력에 고무된 작가는 다시 자연과 접속하는 계기를 가졌다. 죽은 듯이 살아있는 그것들 내부의 생명의 과정은 작품으로 증폭되었다. 그가 잘 구사하는 색감의 대조와 역동적인 구성은 조용히 침묵하는 식물의 힘을 보여준다. 2022년 말 [녹색의 불] 전처럼 불의 이미지가 결합되는 점이 특이하다. 변온동물 외의 동물은 체온을 유지하며 이를 통해 자기 항상성을 지키지만, 식물은 다소간 차갑게 느껴진다. 그것은 더운 여름에 시원한 그늘과 바람을 만들어주고, 야채가 싱싱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원한 곳에 넣어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식적 사고에 대한 역전은 그가 식물의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 그 또한 물질의 긴밀한 순환과정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태양 에너지를 받아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촘촘한 삶의 순환고리를 이루게 한 촉발자였다. 식물은 지구상의 생명이 번성할 수 있는 환경 자체를 만들어준 몸통이다. 




위장된 산 Camouflaged Mountain 97.0x130.3cm (60F) oil on canvas 2025



두개의 산 2025 Two Mountains 2025 100.0x72.8cm (40P) oil on canvas 2025



엽록소의 소재지인 식물은 시기에 따라 풍부한 색의 변환을 보여준다. 자연에 대한 관찰이 작가로 하여금 색의 다층적 운용을 가능하게 했다. 색은 단독이 아닌 주변색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하지만 조형 언어는 인공적인 것이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취향이나 전공과 연관된다. 이에 대해 작가는 어릴 때부터 형광색 좋아했으며 판화를 공부해서 판화 프로세스에 기본인 겹침이 익숙하다고 말한다. 그 결과 ‘원색의 채도와 명도 유지하면서 쌓는 것, 얹었을 때 색의 겹침, 광택/무광택의 겹침’ 등등이 그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식물 아래의 산도 정중동이다.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작가는 화산 지진대에 위치한 곳에서 산이나 대지가 움직인다는 생각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처럼 자리한다. 산은 쩍 갈라지고 완전히 뒤집히는 와중에 그 안에 내재된 에너지가 풀어헤쳐진다. 용암 위에 또 다른 용암이 덧씌워지고, 쓰러진 나무를 거름 삼아 또 다른 식물이 자라듯이 방출된 에너지의 양상은 다층적 물질로 나타난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풍경 속에 건물 잔해 등 문명의 파편들이 섞여서 함께 운동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묵시록적이다. 자연적 실재에 살짝 얹혀있는 문명은 조그만 변화에도 크게 반응한다. 자연에 기준을 두었을 때 인간 사회는 훨씬 부정적으로 다가온다. 문명이 자연을 타자화하고 적절한 활용을 넘어서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파국은 문명에게 피드백된다. 이전의 ‘녹색의 불’이 자연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표현한다면 이번 전시의 ‘도깨비불’은 근거 없는 확신, 가령 도그마나 이데올로기, ‘허상을 쫒게 하는’ 유혹이나 유행 등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은유한다. ‘도깨비불’같은 ‘침입자’에 의해 자연은 요동친다. 산이 뒤집어지고 물이 범람한다. 자연 자체에 내장된 균형추에 가해지는 폭력적 일방성은 생산과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거칠 것 없이 진행된 결과이다. 최나무의 작품은 색, 명암, 형태, 방향 등의 극적인 차이를 통해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허공의 계곡 Valley of the Void 72.7x100.0cm (40P) oil on canvas 2025



매달린 나무 Inverted Tree 60.6x72.7cm (20F) oil on canvas 2025



몇 도의 온도 차로 바람과 태풍이 발생하듯이, 자연계에서의 움직임은 미세한 차이를 통해 발생하고 지속된다. 작은 차이가 큰 차이가 됨을 무시함으로서 파국적 변화로 이어진다. 작품 [액불]에서 붉은 기둥의 나무는 불타오르는 듯 위로 뻗어나간다. 용암같이 붉은 아래층에서 에너지를 퍼올린다. 상승하는 운동과 대조를 이루는 하강기류가 흐르는 물감으로 표현되었다. 작품 [붉은 별똥별]에서 바닷물의 범람을 떠올리는 거센 푸른 물줄기는 동일본 대지진을 떠올린다. 원전수조나 수영장의 바닥같은 타일벽도 벌떡 일어선다. 원자력 발전은 자연의 에너지를 고도로 압축한 기술이다. 여기에 더해진 자연력의 타격은 가공할 위력으로 나타났다. 거센 물리적 흐름 속의 작은 인간은 무력하다. 작품 [위장된 산]에서 대지로부터 들려 올라간 산은 마치 꽃다발처럼 폭발적으로 펼쳐진다. 그는 색감의 극적인 대조를 통해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을 표현한다. 자연의 외적인 재현이 아닌 생성하고 소멸하는 자연적 과정에 상응하는 행위이다, 


작품 [두개의 산]에서 들려 올라간 산과 거꾸로 처박힌 한이 마주하고, 이러한 위치 변화를 통해 발생한 에너지가 주변으로 유출된다. 재난이 무섭게만 다뤄진다면 그것도 일면적이다. 특정 재난을 현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그의 작품은 에너지의 쌓임과 풀림의 관계에서 나오는 쾌락과 희열의 요소 또한 내재한다. 무너져야 할 것이 무너질 때 생성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는 나름대로 역동적이라고 평가된다. [쏟아지는 산]에서 뒤집어진 산은 반대 방향으로 중력을 받는다. [매달린 나무]에서 거꾸로 매달린 나무는 거대한 혀처럼 이것저것이 뒤섞여 만들어진 수프를 맛본다. 손을 마주잡은 녹색 인간들은 축제같은 뒤집어진 세상을 즐기는 것일까. [검은 계곡 1,2]에서 들려 올라간 산들의 이동 궤적이 밝은 바탕에 검은색으로 표시된다. 차분한 무채색톤이어도 변화무쌍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 시리즈 작품으로 동시에 놓고 보면 잠재적 움직임이 있다. 




도깨비불 0Will-o'-the-Wisp 045.5x65.2cm (15M) oil on canvas 2025



도깨비불 01 Will-o'-the-Wisp 01 45.5x65.2cm (15M) oil on canvas 2025



[뒤집힌 산-드로잉]에서 뒤집힌 산의 기저면은 빠져나간 물질과 에너지로 인해 구멍이 나 있다. [엉킨 나무] 나무 덩굴이 엉켜있는 무질서한 모습에서 대칭형의 질서가 있다. 질서와 무질서의 국면을 동시에 장착한 카오스모스(CHAOSMOS)의 자연이다. [폭발하는 산]에서 들려 올라간 산 위아래의 에너지 흐름은 다르게 표현된다. 난색 계열/한색 계열이 솟구치고 흘러내린다. [뒤집힌 산]에서 뒤집힌 원뿔 형태 단면에 푸른 사각형 구멍이 뚫려있다. 바깥에서의 격렬한 변화를 무색하게 하는 차분한 심연은 누군가의 마음일 것이다. 녹색불 시리즈 다음으로 시작된 도깨비불 시리즈는 여덟 작품이 전시됐다. 기후 위기로 화재가 잘 진압되지 않고 공기중으로 불씨가 날아다니며 화재가 확산되는 현실도 자주 접하게 된다. 도깨비불은 그러한 불씨들처럼 재난을 전달하는 속도를 높인다. 초연결사회에서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빠르게 전달된다. 


그에 의하면 ‘도깨비불은 전통적으로도 불확실성과 두려움, 환영의 이미지이지만, 나에게는 현대 사회에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신념과 집단적 환상을 은유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타오르는 불은 실체가 없고,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진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되 방향을 잃게 만드는 이 불빛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정신적 침입자’로 읽힌다. 이번 전시의 도깨비불 시리즈는 2022년부터 3년간 그렸던 녹색불 시리즈가 전복된 형태다. ‘나는 오랫동안 자연의 회복력을 믿고, 그 힘을 통해 상처를 감싸고 감정을 되살리는 작업을 해왔다. 녹색불 시리즈에서 불은 생명을 북돋우는 에너지였고, 마음을 살려내는 상징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관계의 파열, 정서적 충돌, 그리고 최근 한국과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일들을 목격하며, 그 불빛은 더 이상 같은 의미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과도기의 시기에 작가는 두가지 모습으로 대응한다. 




쏟아지는 산 Inverted Mountainfall 65.2x50.0cm (15P) oil on canvas 2025



도깨비불 0Will-o'-the-Wisp 072.7x60.6cm (20F) oil on canvas 2025



도깨비불 0Will-o'-the-Wisp 072.7x60.6cm (20F) oil on canvas 2025



하나는 약한 자신의 불안과 주저를 감추고 싶다는 생각이 보호색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보호색의 연장으로 더 무섭게 과장하는 것이다. 특히 눈이(또는 눈으로) 과장된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동물의 위장색의 예를 들면서 물고기의 꼬리에는 눈처럼 보이는 무늬가 있어서 포식자들은 덜 치명적인 이 부분을 공격한다고 말한다. 어떤 나비들은 날개에 크고 검은 눈 무늬가 있는데 포식자 새들이 자신을 올빼미로 착각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최나무의 작품에서 응시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동물의 위장 패턴 중 눈처럼 보이는 형태는 흥미롭다. 마단 사럽은 [알기쉬운 자크 라캉]에서 의태(mimicry)에 관한 로제 카유와의 이론이 라캉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당시 일반적인 주장이었던 의태가 생물이나 그 종족을 위해 이롭다는 것이었다면, 카유와는 이러한 적응가설을 부정했다. 적응가설은 적이나 먹이를 속이기 위해 그 환경의 색채, 형태, 모양을 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유와에게 의태는 곤충의 시각적 경험의 한 기능이다. 카유와에 의하면 모든 유기체의 삶은 그자체의 차별성 유지의 가능성에 의존하는데, 그 차별성은 그 유기체가 포함되어 있는 경계이며 자기 소유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의태란 이 소유성의 상실을 말한다. 그것은 공간 자체의 거대한 외부성이 그 곤충에게 가한 유혹이며, 뒤섞이려는 유혹에 굴복한다는 가설이다. 마단 사럽에 의하면 원시적 교감마술을 상기시키는 의태에 대한 또다른 해석(카유와-라깡)에서 유기체는 주체의 통제 밖에 있는 힘과 구조에 의해 구성된다. 이러한 가설은 이미지들의 구조에 의해 지배받는 가상적 현실을 이해하는데 더 설득력이 있다. 적응은 삶에 방점이 찍히지만, 유혹에 의한 전복은 죽음과 관련된다. 나르시시즘적 동일성의 주된 매개는 시각이다. 어린아이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통합상을 상상한다는 라캉의 이론은 시각을 통해 전개된다. 




도깨비불 05 Will-o'-the-Wisp 041.0x31.8cm (6F) oil on canvas 2025



도깨비불 0Will-o'-the-Wisp 041.0x31.8cm (6F) oil on canvas 2025



도깨비불 0Will-o'-the-Wisp 022.9x15.8cm (1F) oil on canvas 2025



도깨비불 0Will-o'-the-Wisp 022.9x15.8cm (1F) oil on canvas 2025



유기체가 주변을 모방함으로서 생겨나는 혼돈은 생존보다는 죽음과 더욱 연관된다.  로제 카유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곤충의 불가해한 의태는 곧바로 변장하고 가장하며 가면을 쓰고 어떤 인물을 연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기제는 원시 가면부터 현대의 제복에 이르기까지 두루 발견된다. 현대는 조직에 숨어 개인이 죽는 사회이며, 조직을 벗어나도 위험하다는 점에서 억압적이다. 가면과 위장 뒤에 본질은 없다. 최나무의 작품에서 동물들의 의태에서 나타나는 위협적인 눈의 무늬가 거센 불길 같다. 쌍심지가 돋은 형태는 위협적이다. 두 눈이 나란히 있는 동물의 사냥 능력은 탁월해서 생태계의 상위 포식자를 차지한다. 그중 인간은 다른 종의 절멸과 그 스스로의 종말도 야기하는 가장 위험한 동물이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푸른 줄기 뒤편의 붉은 점 두 개에서 관찰자는 응시를 감지한다. 불이 붙은 숲에서 응시도 흔들린다. 얼룩의 배치가 얼굴의 형상같으며 응시도 여럿이다. 밀려들거나 뻗쳐나가는 에너지의 폭발 속에서 응시도 폭발한다. 그의 눈은 스스로의 파멸을 부를 파국적 환경을 반사한다.


사건이 끝나고 차분하게 식어가는 바탕에서 붉은 점 하나가 떠돈다. 초상사진의 적목현상처럼 비춰진 빛을 되쏘는 붉은 눈동자는 제거해야 할 대상에 겨눠진 무기의 과녘처럼 섬뜩하다. 최나무의 자연은 움직임이 발생했을 때 더 강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위험한 요소가 내재한다. 쐐기 형태는 숲과 늪 등지에 자리한다. 작가가 주/객관적인 양 차원으로 위기를 겪었을 때 ‘외부의 침입으로 인해 전복되는 감정과 믿음은 내면의 침입이 되고, 외부와 내면은 서로를 침입하며 뒤섞이는 듯’ 느껴졌다. 늪은 ‘포용이 아니라 날카로운 위협으로 등장’한다. [뾰족한 숲] 시리즈에서 식물의 날카로운 가시같은 형태가 군집을 이루며 발기한다. 바람결에 실린 부드러운 식물적 형상 내부에는 날카로운 단편들이 산재한다. [뾰족한 늪]에서 날카로운 형태는 산탄처럼 위험해 보인다. [푸른 늪]에서 아직 형태로 굳지 않은 용암들 한가운데 푸른 심연이 있다.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른 붉은 에너지는 녹색 형태로 변모 중이다.


출전; 갤러리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