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情動)의 기상도

 

이선영(미술평론가)

 


윤지현의 작품에 있어 주요 요소인 유동적 형태들은 화면부터 전시장의 벽에 이르기까지 사각형을 벗어나는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역으로 이런저런 틀 때문에 바깥으로의 움직임이 더욱 극적으로 보인다. 무한은 유한과의 관계 속에, 금기는 위반을 통해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미술사는 그림을 한정하는 틀 안팎으로 많은 실험이 행해져 왔음을 기록한다. 하지만 그림에 내재된 환영을 완전히 떠나 사물이 되려는 방식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기에 내재된 환영적 속성이 반드시 지양해야 할 무엇은 아니다. 윤지현의 작품은 설치나 입체 등 여러 방식으로 뻗어나가고 있지만, 그리기는 여전히 핵심으로 남아있다. 곡선으로 오려진 형태 내부를 물감으로 그린 부분은 굴곡면과 내부 주름의 양상을 다변화한다. 통상적으로 형태가 의미, 색채가 감성과 연동되어 있다고 볼 때 그의 작품에는 감정의 흐름을 견고하게 잡아주는 형태, 그리고 형태의 결정성을 완화시키는 색채의 역할이 크다.




윤지현, After glow, 50x73cm, Oil on canvas, 2025



그리기와 만들어지기가 복합된 그의 작품은 고정과 과정 사이의 긴장과 조화가 있다. 그의 작품은 사각형 화면이나 전시장의 벽 등은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미지가 담기거나 걸기 위한 기저면이라는 점 뿐 아니라, 바탕 자체가 작품 내부로 들어온다. 상자(공간) 안에 무엇인가 담겨 전달되는 정적이고 수동적인 방식을 넘어서, 상자는 펼쳐지고 대상과 합쳐져 제 3의 무엇으로 변모 중이다. 다양한 외곽선을 가진 액체같은 형태들이 배치된 방식에 따라 퐁퐁 솟아오르는 작은 샘이나 쓰나미같은 힘으로 몰아칠 수 있다. 우리의 이모티콘을 이루는 희노애락 등으로 단순화된 감정이 아니라, 그 폭을 확장하려 한다. 그것은 예술이 성립되기 위한 조건이다. 중력을 벗어나 부드럽게 출렁거리는 형상들은 섬세하게 칠한 색감에 힘입은 바 크다. 물리적으로는 납작하지만, 그리기에 의해 형태는 부풀어오르고 당겨지고 늘려지고 말려들어가는 듯한 환영으로 다채롭다. 


다양한 방향으로 휘몰아치는 길쭉한 형태는 리듬체조 선수의 동작에서 나오는 리본의 움직임이나 농악대의 상모같이 빠른 운동감을 가지고는 있지만, 길이도 두께도 가늠되지 않기에 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산신령이나 선녀같은 영험한 존재, 마술램프에서 뿜어져 나와 형태를 갖추는 환상적 형태와 더 가까울 수 있다. 이 마술적 존재들은 삶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떠 있으며 흘러간다. 그 변화무쌍한 형태를 자연현상과 비교한다면 구름만이 대적할 수 있으리라. 또는 예측하기 힘든 기상현상과 비교할 수 있으리라. 미셀 세르는 [해명]에서 복잡하고 예기치 않게 복합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양상을 날씨와 시간은 같은 단어(temps)에서 유래함과 연결한다. 그에 의하면 날씨의 시간에서 경험하고 있듯이 시간은 펑퍼짐하고 단순화된 상태보다는 구겨진 변화체를 더 닮았다. 가령 난류는 액체적이고 유동적인 구성 요소들이 변동하기 때문에 체계를 이루지 않고 일종의 합류점을 만든다. 


세르에 의하면 난류와 같이 점성이 강한 액체는 순서관계에 의해 구조화된 공간, 요컨대 정적인 공간에 기반하는 패러다임을 허문다. 그것은 가늠할 수 없는 변화의 시대를 대변하는 은유다. 과학철학 뿐 아니라 일상어에서도 날씨는 감정과 많이 비교되곤 한다. ‘일상 속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과 흐름을 섬세히 포착해, 유기적인 형태로 시각화’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윤지현의 작품은 구름의 형태만큼이나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다. 조그만 틈도 빠져나갈 수 있을 듯한 유동적이고 날렵한 형태는 붙잡기 힘든 감정의 상태를 표현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빈틈없이 낚아채려는 시스템은 이러한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감정은 억눌려지고 특정 방식으로만 배출되도록 유도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감정은 누군가의 이익에 부합되고 누군가 손해를 보도록 설계된 권력 시스템 안에서 공회전하고 있다. 윤지현이 만든 복잡한 변형체는 이러한 그물망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윤지현, Wave, 186x160cm, Mixed media on canvas, 2025



작가 또한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 한다. 지배적 차원으로 확장되지 않는 미술에서 이러한 지향성은 나쁘지 않다. 예술은 굳이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시간의 흐름 속에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시시각각의 드라마에 기념비적 형태를 부여한다. ‘감정은 순간적으로 스치고 사라지지만, 이를 무심히 흘려보내기보다 작가만의 조형 언어로 기록하며 감정의 잔상을 붙잡고자 한다. 작업은 이러한 흐르는 감정의 파편들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시도이자, 시각적 언어를 통해 그것을 되살려내는 과정’(작가노트)이다. 감정은 고정적이기 않기에 정확히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흔적으로 남는다. 그것은 기억의 과정과 비슷하다. 그에게 ‘작업은 단순한 기억의 보존을 넘어, 사라지는 감정의 조각들을 다시 마주하고, 그 감정들이 머무르던 자리를 되짚어보려는 시도’이다. 다양한 감정의 상태를 염두에 둔 형태는 유화 기법의 가세에 의해 풍부한 부피와 음영을 갖춘다. 


자신의 표현 방식에 대해 ‘얇은 흐름의 레이어를 반복적으로 중첩하여 감정의 층위를 구축하고, 유화의 질감과 색감을 통해 감정의 농도와 깊이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윤지현의 작품은 형태가 오려져 배치되기도 하기 때문에 외곽선은 분명하지만, 그 내부의 형세를 결정하는 것은 그리기이다. 평면에 붙여진 형태는 평면에 그려진 형상이 3차원으로 튀어나온 듯한 효과를 준다. 3D 출력물의 경우, 작가의 설계대로 입체화된 형태에 색의 층이 더해진다. 정지된 매체 안에서 전경과 후경의 관계를 통해 움직임이 암시된다. 형태는 종적으로 그리고 횡적으로 확장한다. 그려진 것과 붙여진 것의 형태는 이미 다르다. 그 사이는 생략되었다. 선적 연속성을 연출하면서 구구절절이 설명하려는 산문적 방식도 있겠지만, 그가 표현한 감정은 도약과 비약이 포함된 불연속적 흐름이다. 그려진 것이 설치의 형식으로 확장할 수 있는 것은 배경이 없는 여러 유동적 형태들을 전시장 벽면에 배치함으로써 가능하다. 


개중에는 벽의 가장자리를 넘으려는 듯 슬며시 촉수를 뻗는다. 촉수는 마치 원시적 생물인 아메바의 위족(僞足)이나 식물의 여린 덩굴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하다. 윤지현의 작품은 움직임이 바로 형태가 되는 경우이다. 여러 각도로 굽이치는 형태는 자체의 본질이 이데아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변할지 알 수 없는 잠재적 움직임이다. 최근 작업에서 3차원상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형식으로 3D 프린터의 활용이 있다. 그는 드로잉이나 회화나 부조적 형태를 넘어서 2차원으로 3차원으로 출력된 방식을 실험한다. 그것은 그려진 화면들 사이를 연결하며, 조명 조건에 따라 절묘한 그림자를 벽에 남긴다. 그림자도 여러 층을 이루는 점이 흥미롭다. 3D 프린터로 만든 입체 작품은 튜브에서 막 짜내진 걸쭉한 질료처럼 어디선가 빠져나올 때의 힘의 강약을 형태에 반영한다. 반면 반투명한 종이들을 이용하여 안으로 여러 겹을 층을 늘려나가기도 한다. 




윤지현, 한 결, 60x35cm, Mixed media on panel, 2025



서로 다른 색의 층이 겹쳐지면서 그것을 시작한 작가도 완전한 결과를 알 수 없는 형태가 조합된다. 이 경우에 여러 겹의 평면이 되비치도록 당겨지는 사각형 틀은 엄격하게 유지된다. 그의 작품은 색감이 자유롭지만, 대체로 푸른색이나 보라색 등 시원한 것들이 많이 보인다. 바탕이 되는 면을 난색계열로 처리하면, 대조 때문에 집적되거나 풀려날 에너지는 더욱 커진다. 그러한 색감과 유동적 형태는 물이나 수분을 가득 담은 구름 등을 연상시킨다. 그것이 감정이라면 몸의 경계를 넘어 흘러나오는 체액일 수도 있다. 눈물이나 땀 등은 세상에 없던 것을 내어놓은 작업 과정에 필연적인 요소일 것이다. 자연의 재현은 아니지만 그 과정을 모방하는 작품은 자연과 연계된다. 자연을 마음과 비교하는 관례는 오래되었다. 콜링우드는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그리스의 자연과학은 ‘자연세계에는 정신(mind)이 충만하다’는 원리에 기초한다고 인용한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사상가들은 자연에 내재하는 정신이 자연세계의 규칙이나 질서의 바탕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생각했던 자연세계는 운동하는 물체들의 세계였다. 그리스인들에 따르면 운동 자체는 생명력 또는 영혼에 기인하는 것이다. 고대철학에서 자연세계는 스스로 운동하는 사물들의 세계. 그것은 살아있는 세계이며 자발적인 운동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콜링우드)이다. 이 관점에서 자연은 ‘그자체가 과정이고 성장이며 변화’(콜링우드)로 간주되었다. 고정적 형태가 아니라 잠재적 운동성으로 가득한 윤지현의 형상들은 그 내부에 많은 주름을 내장한다. 질 들뢰즈가 [주름]에서 말하듯이, 점에서 점으로가 아니라 주름에서 주름으로 나아간다. ‘변곡의 변형은 소용돌이처럼 되어가며, 지체에 의해, 연기에 의해, 차라리 연장 또는 증식에 의해 만들어진다...주름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은 또다시 주름이다.’(질 들뢰즈)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기상현상이,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세포분열, 가령 성장이나 치유, 때로는 이상번식하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원시지구에서 생명이 발생하는 과정도 그렇지 않았을까. 


원시수프같은 고농도 매질 속에서 수많은 실험적 결합을 통해 마침내 퍼즐이 맞춰져 생명이 탄생했을 때 불확실한 과정은 현실화 될 수 있었다. 확장하려는 형태나 형식 덕분으로 관객은 많은 상상이 가능하지만, 작가가 이 형태들을 창안했을 때 가장 염두에 둔 것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인간적 차원을 넘어서 여러 은유로 확장되는 그의 작품에서의 감정 또한 보다 기저에 존재하며, 움직임에 더 방점을 둔 정동(情動, Affect)에 가깝다. 정동은 육체와 밀접하다. 그리고 그 육체는 정신과 유리된 대상이 아니다. 육체와 정신은 뫼비우스 띠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함께 유동한다. 뫼비우스 띠의 모델은 깊이보다는 표면이라는 유연함을 강조한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에서 마음과 몸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은유로서 뫼비우스 띠를 든다. 육체적이며 무의식적 하부와 정신적이며 의식적인 상부로 나뉘어지는 섬같은 모델이 아니라, 하나의 표면으로 요동치는 표면의 모델이다.




윤지현, Night, 60x73cm, Oil on canvas, 2025



표면의 모델은 주체에 의해 타자화된 존재들을 전경화한다. 이면은 표면이 되고 그반대도 가능한 유연한 현실에서 이분법은 도전된다. 그로츠는 이분법적 사고가 두 가지 양극화된 용어들을 서열화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육체공포증 위에 자신을 정립한다고 비판한다. 몸은 이성의 작용을 방해하는 원천이자 위협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생산의 경우 어머니는 형태없고 수동적이며 무정형적인 질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통해 형상, 모양, 윤곽, 특수한 형태를 부여받는다고 하면서 양 존재태를 서열화한다.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은 몸에 대한 스피노자의 모델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에 의하면 자기 동일적인 존재가 아닌 몸은 고정된 존재태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련의 생성과정으로 파악된다. 한 분야에 한정되지 않는 보다 다양한 양태를 설명하기 위한 현대의 문화이론의 맥락에 의하면, 안팎의 경계를 넘나들며 출렁이는 윤지현의 작품은 거시적이며 미시적으로, 육체적이며 정신적으로 끝없이 유동하는 잠재적 실체를 구체화한다. 


출전; 원주문화재단(남산골문화센터레지던시 평론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