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를 향한 층의 점증

  

이선영(미술평론가)

 


심숙희의 최근작인 [실재와 환영], [제2의 시각] 시리즈는 시간의 흔적들을 오롯이 담아내고자 한다. 화면은 오래된 사물이나 자연물처럼 중층적인 구조를 이룬다. 직선이 없는 자연의 부드러운 구조다. 자연에 내재된 두터운 겹은 그 실재감을 직관하게 한다. 실재는 이성적으로 자명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우회를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다. 얇은 자연물조차도 그 안에는 많은 겹이 깔려있다. 현미경을 비롯해 미시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은 세포 하나도 우주임을 말한다. 반면 경제적 효용성을 기준으로 생산된 인공물은 극히 얄팍하다. 두터울 땐 그저 둔탁할 따름이다. 인공물이 실재의 차원을 획득하려면 층을 쌓아야 한다. 모든 정보혁명의 근저에 초미세 기술이 전제되는 이유다. 심숙희는 작품에 많은 겹과 결을 부여함으로써 시간성을 강조한다. 물론 모든 수작업에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어떤 종류의 작품은 시간의 흔적을 일부러 지우는 경우도 있다. 




라비움한강 갤러리 전시전경



순식간에 마르는 공업용 도료가 발명되었을 때 일단의 추상화가들은 그 신소재를 열렬하게 반기기도 했다. 우연한 얼룩들과 겹치는 층들을 살려내는 심숙희의 작품은 모더니즘이 이상적으로 간주했던 한눈에 전모를 파악하는 대상이 아니다. 밀봉이 아니라 숨 쉬는 층이다. 그것은 관객의 시선을 작가가 이런저런 수단을 통해 늘려놓은 층들 안팎으로 노닐게 한다. 그것은 순간이 아닌 지속을 요구한다. 그러한 시각적 여정의 시점과 종점은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작품의 효과가 중간의 과정을 늘려감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이다. 시간은 또한 서사이다. 물론 상품에도 자연이나 예술처럼 서사가 있을 수 있다. 서사는 상품 생산자가 흥행을 노리고 만들어낸 광고부터, 개인적 사연이 담김으로써 한날한시에 같은 생산라인으로부터 만들어진 동일성을 벗어난 경우까지 다양한 계열이 있다. 기술이 평준화되는 시대에 서사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필수 요소다. 서사가 있는 오래된 물건은 유물의 차원으로 격상된다.

 

두터운 실재인 자연에 서사까지 가세하면 거의 신성한 존재로 격상된다. 가령 수백 년 된 나무나 지질학적 시간대를 보존한 지형 등이 그렇다. 그런 존재는 세계가 비롯되거나 그에 준하는 신화적 사건의 무대로 고양되곤 한다. 예술은 지배적 대상이 되어버린 상품과 경쟁하면서, 타자라는 점에서는 자신과 마찬가지 처지인 자연을 모델로 삼는다. 그 모델이 자연이라고 해도 재현주의의 대상이 아니다. 계산된 상품의 세계를 특징짓는 밝고 선명하며 매끈한 표면 연출과 심숙희의 작품은 차이가 난다. 그가 ‘제2의 시각’이라는 개념어로 강조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외양(제1의 시각)을 벗어난다. 그는 베르그송의 이론에서 제2의 시각을 빌어왔으며, 이는 ‘사물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을 말한다. 라비움한강 갤러리에서 열린 [제2의 시각] 전에는 최근 작품 38점이 전시되었고 전시부제와 동명의 작품들과 더불어 [실재와 환영] 시리즈도 포함된다. 




실재와 환영,  162.2x130.3cm, Acrylic on canvas, 2024



 실재와 환영, 162.2x130.3cm, Acrylic on canvas,  2023



양 시리즈의 관계에 대해 ‘실제 있었던 흔적의 있음(有)과 환영인지도 모를 흐릿한 낯섦의 없음(無)의 관계를 심리적인 공간으로의 표현이다. 실재인지 환영인지도 모를 실재와 도약의 형상들’은 ‘제2의 시각으로 나타난다’고 밝힌다. 그는 베르그송의 ‘엘랑비탈(élan vital)’을 도약하고자 하는 힘으로 해석한다. 심숙희의 작품 속 추상적 형상들은 구체적 대상과의 선적 인과관계를 끊어내는 도약의 결과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중 무엇을 더 현실적으로 보는가, 더 나아가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가는 세계관에 따라 다르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라는 개념은 도약을 요구한다. 베르그송은 맹위를 떨치는 기계적 사고의 대안으로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철학자에게 영감을 준 철학자로 평가된다.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은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베르그송을 참조하면서, 사유가 어떻게 ‘미리 결정된 결말을 향해 부단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새롭고 예기치 않은 것을 향해 부단히 움직일까 하는 것’을 탐구한다. 


그것은 베르그송의 또 다른 개념인 지속과 밀접하다.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 의하면 지각이 대상을 공간 내에서 움직이지 않는 무수한 단면들로 규정하는 반면, 의식은 대상을 시간 내에서 끊임없이 전개되는 지속으로 재통합한다고 말한다. 지속은 선적으로 흐르는 시간에 대한 대안적 개념을 전제한다. ‘과학이 그려내는 자연의 이미지에서 시간 및 변화가 효과적으로 제거된다. 여기에서 우주는 본질적으로 정적이고 등질적이다. 예측 불가능한 변화, 새로운 것의 예기치 않은 출현, 관찰자와 자연의 상호작용, 이질적인 연속체로서의 변화는 과학의 이상에서 배제된다. 베르그송은 과학적 합리성이 지속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지속은 선형적인 것도 연대기적인 것도 아니다. 지속은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향한 열림이다.’(질 들뢰즈의 시간기계) 도약과 열림을 도입하는 베르그송의 사상은 심숙희의 작품에 빛을 던져준다. 그에게 또 중요한 요소는 우연성이다. 




제2의 시각,   162.2x130.3cm, Acrylic on canvas, 2024



제2의 시각,  72.7x72.7x5cm, Acrylic on canvas, 2025



 제2의 시각, 45.5x53.0cm,  Acrylic on canvas, 2025



바슐라르는 [순간의 미학]에서 베르그송에 있어서 시간의 참된 현실은 지속이고 순간은 어떤 현실성을 갖지 않는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조하면서, 베르그송의 창조적인 진화는 우연이 개재된다고 말한다 바 있다. 심숙희의 작품에서 건너뜀, 배열, 간격, 예기치 못한 만남 등의 효과는 삼베라는 독특한 재료의 도입으로 가능했다. 아크릴 물감 위에 삼베가 사용되면서 작품은 겉모습을 한 꺼풀 벗겨내는 듯한 효과를 낳는다. 한 겹 벗긴 피하 층처럼 거칠거칠하게 드러난 면은 우연과 필연이 함께 작용하여 만들어진다. 작가는 외양을 벗어난 기저면에 주목한다. 실재란 그 깊이가 얼마이든 기저에 존재하는 것이다. 깊지는 않지만 완전한 반복은 불가능한 복잡 미묘한 표층들의 복합은 깊이의 효과를 자아낸다. 그의 작품에서 실재는 층들로 암시된다. 작업 과정은 실재를 향한 층의 점증이다. [실재와 환영]에서 또 하나의 키워드인 환영은 무엇인가. 


대상을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회화의 전통 속에서 환영은 3차원 현실을 2차원의 평면에 그럴싸하게 연출하는 기법과 관련되었다. 르네상스 원근법의 예와 같이 현실을 가상의 무대에 담는 것이다. 환영은 실재는 아니지만 실재를 암시하는 수단이다. 실재와 환영은 참과 거짓처럼 서로에게 그 논리를 의지하는 관계다. 실재가 없다면 환영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예술이 중요성은 환영과 실재의 관계 속에서 나온다. A.A 멘딜로우는 [시간과 소설]에서 현실과 우리의 현실 의식 사이에, 그리고 우리의 의식과 표현 사이에, 끼어드는 불투명한 매체가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으로, 공간예술에서 시간적 연속성을 그려내고, 시간예술을 통해 공존적 환상을 전달하려는 실험이 필요하다. 한편 현대문명은 즉물적 현실이나 기만적 가상이라는 극단적 양분화로 치닫고 있다. 




 제2의 시각,  116.8x91.0cm, Acrylic on canvas, 2024



 제2의 시각, 72.7x60.6cm, Acrylic on canvas, 2025



예술의 언어적 속성이 강조되었을 때 각 매체의 가능성이 최대한 살려졌고, 수단은 자율화되었으며 추상미술이 탄생했다. 하지만 실재와의 관련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러한 필요 속에서 자연을 비롯한 오래된 사물이 등장한다. 심숙희의 작품에서 삼베라는 소재는 자연 섬유이자 손으로 일일이 짠 천으로, 숨구멍 같은 간격이 내재한다. 이러한 간격은 마치 블라인드나 발같이 가려지면서 보이는 효과를 자아낸다. 엄밀한 공정으로 직접 제작하는 모든 것이 처한 어려움과 함께, 삼베에 내장된 겹침의 미학이 회화 작업에 녹아있다. 작가에게는 대상이든 재료이든 그것의 잠재성을 현실적으로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순한 소재주의에 매몰될 수 있다. 그동안 아크릴 물감으로 작업하다가 최근 수년간 활용해 온 삼베는 직접 붙인 것보다 떼어낸 흔적으로 남은 것이 더 많다. 작가는 삼베를 그려진 화면에 붙였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효과라고 밝힌다. 


삼베 위에 아크릴 물감을 칠한 다음 물감이 캔버스에 스며들면 말려서 빳빳해진 삼베를 떼어내는 작업은 일종의 데콜라주(Décollage)다. 이 기법이 미술사에 등장했을 때 광고로 도배된 대량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가 있었다. 심숙희는 뜯어내기는 그러한 문화비평적 태도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이 화려하고 표면적인 소비사회와 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화면에 붙였다 뗀 삼베는 아크릴 물감 안에 그 흔적을 남긴다. 삼베는 워낙 질겨서 뜯은 것 재사용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뜯는 과정의 성공률이 높은 것은 아니다. 우연적 요소가 중요한 이유다. 삼베를 활용한 독특한 작업 과정에 대해 작가는 ‘자연에서 추출한 삼베의 직조 모양은 자연의 형태를 나타내기에 좋다’고 말한다. ‘화폭에 삼베를 입히고 매체에 물성을 이용한 얼룩지기와 번지기 기법’이다. ‘색을 입히고 말리기를 반복하는데 이런 행위들 속에는 시간과 그 시간 안에 머물렀던 회상’을 담는다. 쌓아 올리는 매체의 물성과 그 농도는 적절한 두께감을 만드는 데 중요하다. ‘작업은 뜯어내고 메우기를 여러 번을 반복하는’ 수행의 과정이기도 하다. 




제2의 시각, 80.0x37.0x5cm, Acrylic on canvas, 2025



 제2의 시각,80.0x37.0x5cm, Acrylic on canvas, 2025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지속의 과정으로서의 제작 방식은 앞서 언급된 대안적 시공간 개념뿐 아니라 감정과도 관련된다. 앙리 베르그송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에서 공존하는 심리적 사실들의 혼융된 덩어리에서 일어나는 점진적인 변화를 말한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안동은 오래전부터 삼베로 유명한 지역이며 작가의 성장기까지만 해도 일상의 문화로 존재했다. 삼베는 직접 심고 가꾸고 실을 자아 짜는 자연과 노동과 기술이 집약된 문화의 한 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생활 문화를 넘어서 몇몇 장인만이 가까스로 지키고 있는 살아있는 유물에 속한다. 이러한 사라짐이 공예를 예술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어떤 대상이 자신의 기능을 다할 때 수수께끼 같은 사물이 된다. 그러한 사물은 거듭되는 해석을 요구한다. 사물과 예술은 구별되지만 그만큼 관련된다. 삼베는 사물이지만 그림은 예술이다. 사물을 끌어들이는 예술은 사물도 예술도 아닌 어떤 영역에 있다. 


[실재와 환영] 시리즈에서 붙였다 떼어낸 삼베의 자국은 폭이 넓은 붓으로 그려진 형상처럼 화면에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여러 방향의 길을 낸다. [제2의 시각]에서 그가 사용하는 삼베처럼 가로 폭이 좁은 화면도 등장한다. 화면과 평평하게 겹쳐진 얇은 면들은 추상적 원근감을 준다. 추상이어도 풍경의 느낌이 남아있는 이유이다. [제2의 시각] 시리즈는 한여름의 시원한 물줄기부터 만추의 색으로 얼룩진 화면으로 순환하는 자연의 한 대목처럼 계절의 여운을 담는다. 자신에게 각인된 풍경이 또 다른 풍경으로 나온다. 행위와 몰입만 남는 과정은 자신을 끄집어내는 과정으로서의 그림은 ‘나를 찾는 시간이다.’ 상처로 얼룩지는 일상의 우울과 자연의 아름다움 사이의 간격을 일찍이 깨달은 작가는 집으로 오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는 대표적인 자연의 색으로 베이지 계열을 선택한다. ‘자연의 색과 대지의 색 같은 색의 표현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선호되는 색은 주로 다갈색과 베이지 계열의 색’이다. 




 제2의 시각, 72.7x72.7x5cm, Acrylic on canvas,  2025



 제2의 시각,72.7x72.7x5cm, Acrylic on canvas, 2025



제2의 시각, 162.2x130.3cm, Acrylic on canvas,  2024



그 색은 ‘자연을 갈망하고 자연으로부터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선택된 색채들은 자연을 바라보고 위안으로 삼았던 성장 시절에 기억하는 색으로 무광택의 색채와 삼베 특유의 성질인 까칠까칠한 마티에르를 살게 하려는 의지가 있으며 대지(땅)를 연상시키고 나를 품어주는 위안의 색’이다. 대지는 바다와 더불어 실재를 비유하는 강력한 은유로 작동한다. 채도가 낮은 차분한 다갈색은 요즘의 풍경이기도 하다. 초록 잎과 달리 물이 말라가는 낙엽 한 장에는 얼마나 많은 색이 쟁여져 있는가. 작가는 그 복잡미묘함을 재현하지 않고도 표현하고자 한다. 재현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작품은 변화무쌍한 기상현상이나 사막의 모래 언덕 같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이 흐른다. 그의 작품에서 ‘있는 듯 없는, 없는 듯 있는 그런 형상들은 모두 자연에서 얻은 추상’이다. 대상의 형태 대신에 움직임의 형상을 드러내려는 작가는 ‘시간의 결을 통해서 다시 보면 설명할 수 없는 자유와 창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