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분계선 인접 지역의 바람은 두 겹으로 분다. 하나는 금단의 경계를 스치는 바람, 다른 하나는 인간 중심의 시선을 걷어내려는 성찰의 바람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5년 지역전시활성화사업으로, 김포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자연의 영토: 함께-세계 만들기에 대한 예술적 물음》(10.21-12.7, 애기봉평화생태공원 평화생태전시관)은 이 두 겹의 기류를 정확히 포착한다. ‘영토’가 국가와 법의 언어라면, 전시는 그 어휘를 자연과 생명의 차원으로 이탈시켜 묻는다. 영토는 정말 인간만의 개념인가. 자연도 인간의 도시 문명만큼이나 끊임없이 나름의 방식으로 그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을 따라 전시는 예술가, 국립생태원 과학자, 인문학자의 삼각 협업이 실현된 과정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김순임, 〈길 위의 날개〉(세부), 2024, 길 위에 떨어진 깃털·와이어·무명실·폐보도블럭, 가변설치


김순임(1975- )의 〈길 위의 날개〉(2024)는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새의 깃털과 올림픽공원에서 가져온 폐블록을 소재로 나무의 형상을 피어 낸 작품이다. 여기서 ‘재활용’은 윤리적 제스처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이 버린 사물이 생명의 궤적과 접합되는 찰나, 사물은 자연의 영토 속에서 제 자리를 되찾는다. 작품의 뒤로 보이는 애기봉 일대의 풍경은 남과 북 사이의 공동수역과 같이 인간과 자연의 경계도 가변적인 선에 불과함을 환기한다.

고사리(1982- )의 〈자리〉(2024) 연작은 새의 유리 충돌 이후 유리창에 남은 새의 흔적을 ‘자리’로 받아 적는다. 작품의 추상적 형상은 애도의 드로잉이자 기록의 도면이다. 죽음의 실감이 선으로 응결되는 동안, 작가는 전시장에 제비와 같은 방식으로 제비집을 지어냄으로써 강릉 시장의 제비집을 돌보는 주민들의 손길을 함께 호출한다. 돌봄의 공동체는 돌봄의 미감으로 전이되고, 그 미감은 작품보다 관계의 지속에서 자신의 형식을 찾는다. 생명의 연약함을 기념하는 애도와 일상의 배려가 한 자리에 공존하는 지점에서 생태는 더 이상 대상이 아니라 관계망의 주어가 된다.

인문학자 김남수의 사진과 텍스트로 구성된 〈따개비가 ‘군체’로서 파도에 대항하는 방식〉(2024)은 따개비 군체에서 추출한 생태모방의 교훈을 유머와 운율로 관람객에게 전송한다. 파도에 맞서는 다중의 추진력, 힘의 분산과 유연한 응전은 공동체의 다른 이름이다. 이 이론적 순환은 이연숙(1976- )의〈Transplant_to move or to be moved〉(2024)로 이어진다. 민들레 홀씨, 파리지옥, 해파리의 이미지가 거울과 모래의 반사면 위에서 변이하는 동안 식물과 동물, 기계의 경계는 흐려지고 번식과 포획, 부유의 전략이 미래 생명체의 모형으로 재배열된다. 여기서 거울은 자기애의 장치가 아니라 상호반사의 매체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가 서로를 번역하며 미래적 생태감각을 예행 연습한다.

노태호(1988- )의 ‘이끼 블록’, 〈Gap forming; 틈새 세우기〉(2024)는 미시적 영토의 정치학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블록의 틈새를 점령한 이끼의 캐스팅은 “자연도 자신의 경계를 구축한다”는 역명제를 조용히 설득한다. 도시와 자연은 언제나 맞물려 있으며, 자연은 도시의 미세한 간극을 자신의 서식지로 재규정한다. 영토의 전유는 항상 상호적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의 핵심은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협업과 그 기록에 있다. 예술가와 과학자의 공동조사는 한라산의 멸종위기 식물에서 우포늪의 생물다양성, LMO 관리에 이르기까지 지식과 노동을 겹겹이 통과한다. 과학자의 현미경과 예술가의 상상력은 동일한 장면을 다른 초점으로 본다. 예술은 과학의 엄밀함에 감각의 폭을 부여하고, 과학은 예술의 직관에 사실의 발판을 제공한다. 이 상호 번역의 순간, 연구는 서사로, 데이터는 윤리로 변환된다.



빨간씨+이인의, 〈과학자의 자연〉, 2024, 2채널 영상, 25분


경계와 풍경의 상관도를 탐색하는 것은 빨간씨와 이인의(1975- )의 〈과학자의 자연〉(2024)에서 절정을 맞는다. 여섯명의 과학자가 멸종 위기의 생물을 기록하고, 숲과 습지를 조사하는 과정, 그리고 생태를 모방하는 순간들을 담은 영상은 우리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을 간접적으로 제안한다. 무엇보다 과학자의 연구가 현장의 노동과 얽혀 있음을 드러낸 대목은 중요하다. 진퍼리새를 뽑아 습지의 숨구멍을 되살리고, 담비의 배설물을 읽어 개체의 건강을 묻는 행위는 생태학적 지식이 아니라 생명정치의 실무다. 전시는 그 실무를 미학의 전면으로 끌어올린다.

애기봉에서 차량으로 20분 거리에서 진행되었던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풍경/경계》(9.30-11.15, 작은미술관 보구곶)는 앞서 설명한 전시와 연결된다. 군부대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전시공간의 특성을 염두하면 그 맥락이 더 선명해진다. 군사적 감시를 상징하는 철책은 이인의에게 촬영의 금지선이자 상상력의 발화점이다. 작가는 애기봉에서 보였던 방식과는 다른 내용의 작품을 선보인다.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이 교차되는 〈틈; 경계에서 풍경으로〉(2025)는 ‘볼 수 없음’을 ‘다른 방식의 보기’로 치환한다. 해병대원과 주민의 인터뷰는 일상의 지층을 드러낸다. 그들에게 철책은 위협이라기보다 “늘 거기 있는 것”이며, 거주와 생업의 리듬 안에서 경계선은 생활의 좌표로 존재한다. NLL(북방한계선), 항공사진의 공백, 드론비행 불가 등 국가적 선 긋기의 단호함 속에서도 생활에 스며든 감각을 통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을 드러낸다.



이다슬 작가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최창희


이다슬(1980- )은 1954년 보구곶 인근 정찰 비행 업무를 수행했던 미군조종사 랜드럼의 항공사진과 일기를 토대로 〈랜드럼씨 이야기〉(2025)를 함께 선보였다. 작가는 1954년 이후 안보 문제로 더는 찍을 수 없게 된 보구곶의 항공사진을 출발선으로 랜드럼이 남긴 좌표와 암호의 층위를 지도-이미지-증언의 삼항을 오가며 경계의 기원을 풀어내어 역추적한다. 865번의 선 긋기와 지우개질, 그리고 그 위의 바니쉬 칠은 반복과 축적의 몸짓으로 지도 위의 경계를 우리의 감각에 닿을 수 있도록 일으켜 세운다.

두 전시의 기획자 최창희가 말하는 ‘함께 세계 만들기’는 선언이 아니라 절차다. 탐방, 동행, 기록, 번역, 재배치, 그리고 다시 현장으로의 환류. 이 순환 구조 속에서 전시는 매번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커뮤니티 아트에서 생태미학으로의 이행은 기획자의 관심사 전환이라기보다 ‘폭력과 권력의 감응지대’를 넓혀 온 일관된 윤리의 확장으로 읽혀야 한다. 인간 내부의 평등에서 인간-비인간의 평형으로, 제도의 중앙에서 접경의 경계로, 결과 중심의 작품에서 과정 중심의 실천으로. 그 궤도는 곧 전위의 다른 정의다.

미술은 미술관의 프레임으로만 완결되지 않는다. 미술은 깃털과 이끼, 유리창의 자국, 항공사진의 좌표, 과학자의 손 노동, 주민의 증언, 공백을 메우는 애니메이션, 바느질의 호흡을 동등하게 연결하는 실천이다. 최창희가 만드는 ‘함께 세계 만들기’란, 세계가 이미 함께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아보는 감각의 훈련인 것이다. 애기봉의 바람은 오늘도 두 겹으로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