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 개성의 각축장 - 2025단원미술제-선정작가전 서문
윤진섭 심사위원장/미술평론가
Ⅰ.
경기도 안산시는 조선시대 중엽 단원 김홍도가 유년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 표암 강세황에게서 그림을 배우며 성장한 고장이다. 1991년, 문화부는 이를 기리기 위해 안산을 ‘단원의 도시’로 명명한 바 있다. 안산시는 이를 계기로 안산을 단원의 도시로 정착시키고, 나아가서는 문화의 도시로 가꿔나가기 위해 1999년부터 단원미술제를 개최해 왔다.
단원 김홍도의 고장 안산시가 주최하는 단원미술제가 어느덧 26회째를 맞이하였다. 단원 김홍도는 조선시대 영조 때 태어난 한국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이니, 그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단원미술제의 창설 배경에는 한국화의 중흥이라는 안산 시민들의 보이지 않는 기대와 여망이 깃들어 있다. 물론 현재 행해지는 단원미술제는 참가 자격을 굳이 한국화로 제한하지 않고 미술의 전 장르와 매체로 개방하고 있으나, 이번 본선에 올라온 11명의 작가들의 전공 중 한국화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참고삼아 작년의 행사를 살펴보면 최종심에 오른 강승혜, 김범준, 김정옥, 노은영, 성필하, 신예진, 안종우, 주형준, 최은정, 최혜연, 한소희 등 11명의 작가 중 한국화 전공의 비중이 거의 절반에 달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암암리에 단원 김홍도가 지닌 미술사적 위상이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한국화의 비중이 높았다는 사실은 곧 한국화 분야의 우수인력이 많이 몰렸다는 사실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단원미술제의 응모 현황을 보면, 총 439명의 응모자 중 평면(회화) 245명, 평면(한국화) 78명, 평면(사진, 판화) 28명, 복합 38명, 입체가 50명 등이다. 이 중에서 1차 심사를 통해 22명이 선정되었으며, 2차 심사를 거쳐 다시 11명이 최종 선정되었다.
Ⅱ.
보다 우수한 작가를 선정하기 위해 2015년도에 단원미술제는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기존에 해오던 작품 공모를 작가 공모로 전환한 것이다. 주지하듯이 작품 공모가 지닌 폐단은 작가의 역량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불과 1-2점의 작품만으로 작품세계를 판단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작가 공모는 전체 응모자 중에서 2차 관문을 통과한 11명 작가의 작품 다수를 전시장에 직접 진열하거나 설치, 최종심을 행하는 장점을 지닌다. 아마도 단원미술제가 국내에 존재하는 많은 미술공모전 중에서 유독 안정성과 신뢰성이 높은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런 제도적 강점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 공모가 지닌 또 하나의 장점은 전시 중에 최종심인 3차 심사를 하는 것이다. 3심에 오른 11명의 선정 작가들은 각자 독립된 공간에서 관객들에게 개방된 상태로 심사를 받게 된다. 이번 기회에 한 가지 건의하자면 관객이 뽑은 작가상, 즉 인기상을 차기에 신설하면 어떨까 한다. 그렇게 하면 관객들은 불청객의 입장에서 벗어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관객참여의 기회를 맞음과 동시에 주인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Ⅲ.
단원미술제는 “단원 김홍도의 예술혼과 업적을 기리고 이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자” 창설된 미술제이다. 공모를 통해 역량 있는 작가를 선정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 단원미술제가 스물 여섯 해를 맞는 동안 국내의 어엿한 중견 미술제로 자리를 잡아가는 기색이 완연하다. 점차 그 성가를 높이면서 뚜렷한 정체성을 확보해가는 중이다.
이참에 단원미술제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최근에 여러 매체를 통해 밝힌 것처럼 한국화의 침체 내지는 위기와 관련된 것이다. 미술계의 현안 중 가장 시급한 것이 있다면 바로 한국화의 중흥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8.15 해방 이후 한국현대미술사에서 한국화(동양화)가 위기를 맞게 되는 시기는 대략 10-20여 년전부터가 아닌가 한다. 대학의 한국화과가 폐과가 되는 조짐이 일면서 60-70년대의 미술계를 점유했던 한국화 진흥의 분위기가 냉각되기 시작했다. 60-70년대에 화랑가에서 인기가 높았던 유명한 한국화 원로작가들의 전시가 2천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변모된 문화환경에서 침체를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한국화의 퇴조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60년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시행 이후 형성된 아파트 건설 붐이 가져온 변모된 주거환경은 한국화의 쇠퇴를 불러온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80년대의 수묵화 운동, 2천년대 초반의 ‘동풍(東風)’ 등은 한국화 분야에서 나타난 신선한 혁신적 바람이었으나, 지속적인 집단적 실험 내지는 전위미술 운동으로 계승되지 못한 한계를 보였다.
2017년, 한국화 분야에서 일어난 ‘한국화진흥회’의 창립과 ‘한국화의 날’ 지정 등등 잇다른 자구책은, 그러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효를 기대하기에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구호보다는 형식과 내용의 혁신적인 내부의 의식변화가 수반돼야 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두운 비구름 속에서도 희망은 있는 법이다. 최근 매스컴에서 가장 ‘핫’한 뉴스로 떠오르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에 관한 소식은 향후 한국화의 진흥에 좋은 징조로 작용할 조짐이 보인다. 호랑이와 까치, 민화와 귀신을 비롯하여 김밥과 남산, 갓과 두루마기 등 한국을 상징하는 풍물과 문화유산들이 세계인들의 시선을 받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긴 텀으로 보면 동양, 아니 한국의 문화가 전지구촌적인 규모로 세계 곳곳에 스며듦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K-Pop’이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최근에 단원미술관에서 열린 [우미미 연비비(雨微微 煙翡翡)]전은 한국화의 새바람을 예고하는 중요한 전시였다. 단원미술제의 주체로서 김홍도미술관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조선시대 풍속화의 새바람을 일으킨 김홍도의 실험정신을 계승한 신풍(新風)이 안산에서 부는 것이리라.
Ⅳ
공모전의 생명은 공정한 심사에 있다. 비평과 창작 분야의 전문가들인 5인의 심사위원단은 이번 행사의 심사에 임하여 공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스스로 개별접촉을 삼가는 가운데 전시장을 돌며 채점에 임했으며, 점수를 합산하여 순위를 매겼다. 자세한 사항은 심사평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번 본선 심사에 오른 김민호, 김준기, 김형욱, 김형진, 선민정, 염지희, 현덕식, 이윤빈, 이윤정, 전호경, 정현정 등 11인의 작가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개성이 강하고 실력이 출중했다.
올해 단원미술제의 특징은 구상미술의 강세이다. 이러한 추세는 작년의 경우와 비슷한데, 구상 중에도 초현실적이며 사물과 사건의 국면에 대한 정치(精緻)한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구슬나무>인데 주최측의 설명에 의하면, “난설헌 허초희(1563-1589)의 시 <유선사(遊仙詞)>에 등장하는 소재로, 초월적인 선계의 모습과 신비로운 궁전을 짓는 재료로 묘사된 바 있다“ 한다. 구슬이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형국은 결국 다양한 내면세계의 표출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이번 11명의 전시 내용이 과연 그러하다. 거울과 빛을 매개로 사물과 나, 타자, 삶과 죽음 등 다양한 주제를 평면과 입체로 표현한 김준기(대상 수상), 채집된 사진 이미지를 이용, 축적의 방법을 통해 시공을 한 화면에 표출한 김민호, 대상의 실재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대상을 촬영, 이미지 변형을 통해 비현실적인 풍경을 만드는 김형욱, 여행을 통해 한국의 밥상을 소재로 한국화의 현대적 계승을 위해 다양한 기법과 재료의 실험을 하는 김형진, 잃어버린 시원을 향해 숲을 소재로 한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하며, 궁극적으로 생명이 숨 쉬는 원시림의 세계를 지향하는 선민정, 콜라주를 주된 조형기법으로 삼아 꿈의 세계를 초현실적이며 파편화된 몸환적 분위기로 표출하는 염지희, 공간과 장소에 대한 개념적 환치를 일련의 띠를 통해 구현하는 가운데 특정한 장소에 대한 자본의 침투를 주목하는 이윤빈, 마음의 매개체로서의 종이비행기를 광대한 풍경 속에 투사함으로써 유년기의 순수한 상상력을 표출하는데 주력하는 이윤정, 장지 위에 동물, 식물, 곤충 등등 삼라만상이 어우러진 다양한 풍경을 정치한 기법으로 그리는 전효경과 흑백의 거대한 화면,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기하학적 추상화를 출품한 정현정의 변형 캔버스 등등 각자 독자적인 세계를 뽐낸 멋진 전시였다.
1차 게재: 2025단원미술제-선정작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