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續) 강명희의 회의
윤진섭 미술평론가
지난 달, 강명희전을 보기 위해 총콩에 있는 빌팽(Villepin) 갤러리에 다녀왔다. 이번 방문 목적은 강명희의 예술세계에 대한 비평적 연구와 동시에 빌팽갤러리가 주최한 토크쇼에 참가하는 데 있었다. 프랑스의 수상을 지낸 도미니끄 드 빌팽(Dominique de Villepin/시인)과 그의 아들 아서(Athur)가 운영하는 이 갤러리는 문화와 예술에 관한 한 높은 긍지와 자부심을 지닌 프랑스의 수준높은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아서는 강명희전을 위해 2층으로 된 전시장을 특별히 디자인하였다. 이 전시를 본 소감에 대한 소개는 후일로 미루고 우선 토크쇼에서 한 나의 발언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1947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강명희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72년에 남편 임세택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결정이 그 후 50여 년의 세월을 제주도와 프랑스를 오가며 작업을 하는 화가로서 자신의 운명이 될 줄은 당시는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도불(渡佛) 초기에 강명희는 세잔이 살았던 몽생 빅토와르에 거주하면서 세잔이 그랬듯이 자연과 고독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세잔과 대면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 강명희는 제주도에 무려 네 개나 되는 작업실을 마련하고 야외 현장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작년에 전시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제주도를 찾았을 때, 나는 감귤 저장용 창고를 개조해 만든 작고 허름한 작업실을 비롯한 나머지 세 곳의 소박한 작업실들을 모두 둘러보았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나온다. 강명희는 왜 여러 개의 작업실이 필요했을까? 그것은 자연과의 직접적인 대면이라는, 자연을 그리는 화가가 지녀야 할 당연한 태도가 아닐까? 고향인 몽생 빅토와르 산을 대면한 세잔처럼, 강명희 역시 스스로 선택한 제주도의 풍광을 마주하면서 끊임없이 자연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강명희는 풍경을 그리는데 절대 사진을 이용하지 않는다. 오직 직접 몸으로 자연과 부딪히는 가운데 자신이 보고 느낀 자연의 모습을 화면에 옮긴다. 작업실의 창을 통해 본 자연의 경치가 캔버스에 들어오면서 때로 그것은 여러 장소를 옮겨다니며 그린 다른 풍경들과 어울리기도 한다. 이처럼 각기 다른 시간대에 자신의 눈에 들어온 풍경을 마치 그 이전 것들은 존재하지 않기라도 한 듯, 그 위에 덧씌우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쓴 강명희에 대한 글에서 그녀의 이런 작화 태도를 가리켜 ‘강명희의 회의’라고 부른 바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강명희는 자연과 더불은 ‘몸의 언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다! 강명희의 이런 자연과의 대화방식은 ‘수행(修行)’임에 분명하다. 숱한 세월을 한결같이 자연과의 대화에 쏟아부은 그녀의 열정은 이제 개성이 뚜렷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다. 강명희의 풍경은 눈에 보이는 풍경이 그녀의 몸 속에서 체화(體化)돼 일련의 화학적 변화를 거쳐 몸 밖으로 배출된 정화(淨化)의 엑기스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령 몽골의 고비사막이 보고싶으면 ‘지금 당장’ 몽골을 향해 떠나는 그녀의 열정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강명희는 무려 여덟 차례나 몽골을 찾았으며, 같은 이유에서 파타고니아와 심지어는 남극을 방문하였다.
그렇다면, 마치 구도와도 같이 전 생애를 통해 풍경을 그린 강명희의 예술가적 태도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에서 나는 ‘희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회의란 의심하는 것을 뜻한다. 마치 스님들이 하나의 화두를 잡고 자아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수행에 정진하듯이, 강명희 역시 자연을 화두삼아 화가로서 수행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최근에 쓴 ‘강명희의 회의’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몽 생 빅토와르 산에 대한 ‘세잔의 회의’가 내(I)가 주체가 되는 회의였다면, 강명희의 회의는 내가 부재하는(마치 한국어에서 주어가 생략돼도 통용되는 것처럼) 회의라고 할 수 있다. 주어가 없어도 통용되는 한국어의 특질로 미루어볼 때, 강명희의 희의는 근대 이전의 시원(始原)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먼 태고적, 언어가 존재하기 이전의 풍경이 강명희가 드러내고자 하는 풍경은 아닐까? 강명희가 즐겨 찾는 몽골의 초원을 비롯하여 시리아의 산야, 파타고니아의 빙하, 심지어는 남극에 이르는 도정은 한결같이 문명이 자리잡지 않은 시원적 자연을 향한 구도의 몸짓이었다. 캔버스와 화구를 들고 찾은, 태고의 숨결을 간직한 장소에서 강명희는 비로소 자연과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세잔의 회의가 자아 곧 내가 주체가 되는 근대의 회의였다면, 강명희의 회의는 자아가 부정되는, 그럼으로써 문명의 덫을 쓰기 이전의 시원(始原)을 향한 구도의 몸짓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랜 시간을 통해 강명희가 보여준 자연과의 대화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언어가 인간의 의식이 스민 의사소통수단인 점을 감안한다면, 언어에 의해 재단되고 유린된 자연은 더 이상 순수한 자연은 아니다. 인간은 발견된 대상에 이름을 붙이기 좋아하는 동물이다. “내가 저 섬을 ‘푸름’이라고 부르노라!”, “저 나무는 ‘기억’이야!” 그러면 ‘푸름’과 ‘기억’이 되는 순간, 섬과 나무의 시원성은 점차 엷어지게 되는 것이다.
강명희가 자연을 대면하며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바로 이 소멸된 자연의 시원성(始原性)을 되찾자는데 있다. 인간의 언어가 발명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자연의 싱싱한 숨결을 회복함으로써, 자연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현대문명이 극에 달한 오늘의 팬데믹 상황에서 부각시키는 것, 이는 강명희의 회화가 지닌 분명한 힘일 것이다.
강명희의 삶과 예술에서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유목적 태도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의 제주도와 프랑스에 고정된 작업실을 두고, 이 두 곳을 거점으로 그림을 그리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즉시 짐을 꾸려 떠난다. 야생이 살아 숨쉬는 몽골의 초원을 무려 여덟 차례나 방문한 그녀의 범상치 않은 이 대담한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의 이 돌발적인 행동은 ‘분노’에서 나온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분노일까? 가공할 현대문명이 저지른 대지의 황폐화(荒廢化)에 대한 분노가 아닐까?”
-졸고, <강명희의 회의> 중에서
철학자가 종이와 펜으로 사색을 한다면 화가는 붓과 물감으로 철학을 하는 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강명희의 그림들은 인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근심, 즉 우려에 다름 아니다. 무엇이 강명희로 하여금 근심에 휩싸이게 하는가? 자연의 황폐화가 가져올 자연의 죽음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류의 죽음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무당인 강명희는 직관적으로 그것을 느낀다. 자원의 고갈과 생태계의 교란, 야생동물의 급감, 기후변화, 지구온난화현상 등등 인류세(Anthropocene)에 대한 긴급한 논의는 그 반대급부로 자연의 시원에 대한 재발견을 불러일으켰다. 뒤늦게나마 강명희의 예술세계가 논의돼야 할 최적의 시점인 것이다. 강명희는 오랜 세월을 마치 선수행하듯이 침묵하면서 자신이 화가이기 때문에 오직 그림을 통해 지구가 처한 위기적 상황에 대해 발신해 왔다. 그 세월이 무려 수십 년에 달한다.
이제는 강명희의 그림과 예술에 대해 논의해야 할 때이다. 그녀는 오늘도 침묵한 채 오직 자연을 대면하며 대화를 나눈다. 강명희에게 있어서 자연은 그녀가 쉬는 숨이자 밥이다. 그것들은 자연의 일부이기에 우리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내가 같은 글 속에서 썼듯이, “때로는 무자극이 강렬한 자극을 이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 잔잔해 보이는 강명희의 그림은 노자에 따르면 “빼어난 솜씨는 오히려 어리숙하게 보이고(대교약졸(大巧若拙))”, 부드러운 물이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광포(狂暴)해 지는 것과도 같다.“
1차 출처 : 퍼블릭아트 20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