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단색화, 그 ‘은근과 끈기’의 세계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세계미술계에서 단색화가 알려진 지도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다. 단색화와 광주는 인연이 매우 깊다.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으로 열린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에서 ‘단색화(Dansaekhwa)’란 고유명사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전시의 큐레이터인 나는 도록의 원고 교정을 보던 중 영문 번역자가 번역한 ‘monochrome painting’에 주목했다. 번역자는 내가 쓴 도록 서문에서 한글 원고의 ‘단색화’를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순간, 그건 맞는데,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전위그룹 ST의 일원으로 현대미술의 현장을 체험한 나는 한국 단색화의 독자적인 가치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단색화’를 ‘Dansaekhwa’란 영어명으로 표기했던 것이다.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Dansaekhwa’를 강조한 나는 드디어 단색화를 셰계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맞았는데, 201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단색화: Korean Monochrome Painting]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전시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단색화가 급부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Ⅱ. 
 광주시립하정웅미술관이 2025 하정웅 컬렉션 [단색화: 무한과 유한]전을 연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하정웅 컬렉션’은 재일교포 사업가 동강 하정웅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이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을 가리킨다. 하정웅 명예관장은 1993년부터 지금까지 광주시립미술관에 총 2,603점의 미술작품을 기증했는데, 이번 전시는 그중에서 단색화 작품만 골라서 연 것이다. 이우환, 곽인식, 하종현, 정영렬, 박서보, 허 황, 최명영, 정상화, 윤형근 등 한국 단색화의 원로작가들 작품을 망라하고 있어서 단색화의 정수(精髓)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렇다면 한국 단색화의 요체는 과연 무엇일까? 대체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길래 세계의 미술애호가들이 그토록 열광하는가? 우주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빛나듯이, 별처럼 독자적인 아우라를 내뿜는 한국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은 이제 국제무대에서 콜렉션의 필수 품목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단색화란 용어가 탄생한지 25년만에 올린 개가이다. 하정웅 컬렉션은 그 중의 하나이며, 하정웅 명예관장의 단색화에 대한 독자적인 안목과 심미안이 작품 속에 투영돼 있어 작품을 따라가며 감상하다 보면 단색화 작품의 독특한 미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Ⅲ. 
 이번에 전시된 총 아홉 명의 작가들 중에서 재일작가는 곽인식(1919-1988)과 이우환(1936- )이다. 그 중 곽인식은 일본 모노하와 한국 단색화의 선구적 맹아를 보인 작가이며, 이우환은 모노하의 이론과 작업 양면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대표작가 중 한 명이다.
 “우주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사물이 존재한다....나는 일체의 어떤 표현행위를 멈추고 사물이 꺼내놓은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한 곽인식의 발언 속에는 사물의 존재에 주목한 ‘모노’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 즉, 주관에서 객관으로 시점의 이동은 자아의 시선으로 세계를 재단한 서구 근대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일본 모노하의 관점이며, 그 이면에는 모노하 이론을 정초한 이우환의 시선이 존재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곽인식과 이우환의 작품들에서 관객은 오랜 기간 일본에 거주하면서 형성된 독특한 미의식을 느끼게 될 것이다. 미감적으로 볼 때 이 두 작가의 작품 속에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작품의 배면에 깔려있으면서도 겉면에  흐르는 미김은 왠지 모르게 일본적인 느낌이 나는 것, 다시 말해 미술평론가 조셉 러브가 이들의 작품에서 한국적인 내음을 맡은 것과는 정반대의 문화적 상대성이 존재한다. 
Ⅳ.
 한국의 토담 냄새를 풍기는 작가는 하종현(1935- )이다. 시골의 담벼락에서 맡을 수 있는 구수한 흙내음이 하종현의 <접합> 연작에서 맡을 수 있는 정서이다. 배압법에 의해 제작된 하종현의 작품은 캔버스의 벌어진 마대 틈 사이로 걸쭉하게 갠 유성 물감을 커다란 주걱으로 밀어넣고 앞에서 송글송글 맺힌 물감을 쇠솔이나 나무주걱 등으로 터치를 가한 흔적의 결과이다. 그 세월이 무려 50여 년에 걸친다. 
 박서보(1931-2023)의 <묘법>은 마치 수련을 하듯이 캔버스 위에 칠해진 베이지나 회색, 검정 등 중성색을 연필로 무수히 그은 빗금에 의해 완성된다. 이것이 70년대의 초반의 초기 <묘법>이다. 이후 80년대 중반의 한지를 이용한 두꺼운 마티엘의 형성 시기를 거쳐 후기 묘법 시대에 들어서는데, 짙은 회색조의, 사찰의 기왓골을 연상시키는 수직 묘법 연작을 거쳐 자연에 토대를 둔 유채색 시대로 접어들어 현재에 이른다. 이번 전시에는 80-90년대의 작품들이 다수 출품되었다. 
 정영렬(1934-1988)은 이제까지 전기 단색화 작가의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70년대의 <적멸> 연작에서 보이는 진동하는 듯한 색채의 미묘한 유색 스펙트럼에 있었고, 그런 연유로 배제되었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러나 70년대의 작업에 부분적으로는 단색의 파동 형태의 작품들이 있어 더 연구해야 할 작가이다. 이번 전시에는 80년대의 한지 작품 2점이 출품되었다. 
 허 황(1946- )은 1975년에 일본 동경화랑이 주최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전에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과 함께 초대받은 작가이다. 말하자면 원조 단색화 작가에 해당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단색화의 열풍이 유독 그를 비켜지나간 듯한 인상이 짙다. 허황의 <가변의식>은 흰색 안료의 물성을 캔버스에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그런 즉발적인 행위를 통해 색채에 대한 그 어떠한 연상이나 상징도 배제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인다. 
 최명영(1941- )은 오리진 그룹의 창립멤버로 1960년대에는 기하학적 추상에 몰두하였으나 70년대 중반에 시작한 <평면조건> 연작에서 지문을 사용한 청색조의 반복작업으로 단색화 작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후에 로울러를 이용한 베이지, 흰색 등의 평면작업의 시기를 거쳐 송곳, 방안지와 한지작업, 규칙적이며 반복적인 수직과 수평의 시기 등등 다양한 단색화 변주의 시기를 거친 작가이다. 
 정상화(1932- )는 7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자형 모듈에 의한 규칙적이며 연속적인 기하학적 단색추상의 세계를 개척해 온 한국 단색화의 대표적인 원로작가 중 한 명이다. 정상화의 캔버스 표면은 흔히 피부에 비유된다. 피부의 노화된 각질들이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살이 돋듯 끊임없이 떼고 붙힌 작품의 표면은 얼핏 균질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무수한 요철로 이루어져 있다. 박서보의 경우처럼 반복적 수행이 정상화 회화의 본질이다.   
 윤형근(1928-2007)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주장한 ‘문자향 서권기(文子香 書卷氣)’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구현하는데 평생을 바친 작가이다. ‘침묵의 회화’로 불러 마땅한 그의 그림은 짙은 암적색과 갈색, 청색, 검정색 등이 서로 혼효(混淆)되는 가운데 윤형근 회화의 득특한 향취를 은은하게 풍긴다. 이른바 선비정신의 발현이다. 그의 작품에서 비로소 예술은 인격과 인품의 완성을 향한 하나의 수단임을 깨닫게 된다. 이번 전시에 단 한 점밖에 출품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 

Ⅴ.
 70년대 단색화 원로작가들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명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박서보의 <묘법>, 정상화의 <무제>, 하종현의 <접합>, 허 황의 <가변의식>, 최명영의 <평면조건> 등등이다. 이처럼 일관된 명제의 이면에는 항상성이 깃들어있다. 평생에 걸쳐 한 우물을 깊이 파는 이 일관된 의식이 바로 한국의 단색화가 지닌 고유의 특성이다. 그리고 그런 점이 1970년대 이후에 일관성이 흐려져 내파한 미국의 미니멀 아트/ 미니멀리즘과 다른 면이다. 
 한국의 단색화에는 일찍이 조윤제 박사가 설파한 ‘은근과 끈기’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피고지고 피고지고 하는 무궁화처럼 끈기 있고, 장작불에 밤새도록 고는 곰탕집 할머니의 연조깊은 내공의 발효미학이 단색화 요체의 밑바탕이다. 대부분 원로 단색화 작가들은 작품이 끝나는 시점을 잘 모르는데, 손주 며느리가 끓이는 가마솥의 곰탕 국물을 한 수저 떠서 맛본 할머니의 “됐다!”하는 일성(一聲)과 거의 일치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1차 출처 광주시립하정웅미술관 단색화전 서문,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