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 / 우주적 지평에 이르는 길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김광우(1941-2021)는 포천 출신의 조각가다. 거구에 작품에 대한 열정이 깊어 늘 포효하듯 우렁차 보였는데, 아쉽게도 여든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자연+인간>은 김광우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명제다. 1970년대에 그는 이 명제에 ‘우연’을 덧붙이기도 했지만, 80년대 중반에 다시 빼, 이후 <자연+인간>은 평생에 걸친 화두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김광우 선생 1) 을 1974년에 처음 만났다. 당시 광화문 대성학원 앞에 있는 서울미술학원에 조소 강사로 근무하던 고(故) 백철수의 선배로서 작품에 대한 조언을 위해 잠시 들렀던 것. 때마침 늦가을이라 장발에 바바리 코트를 걸친 그는 거구에 풍채가 좋고 목소리 또한 커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당시 미대 입시생 신분으로 거기서 데생을 배우던 나는 우연히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옆에서 듣다가 덩달아 따라간 곳이 다름 아닌 미술회관이었다. 조계사 맞은편에 있던 미술회관은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1974년에 개관하여 1979년 동숭동으로 이전, 훗날 지금의 아르코미술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따라가 보니 바로 그 미술회관에서 <한국미술청년작가회> 창립전이 열리고 있었고, 아래층 전시장에 김광우의 <자연+인간+우연>이 있었다. 그때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 위에 껍질을 벗긴 거대한 나무둥치들이 놓여있던 광경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것이 <자연+인간+우연>과의 첫 만남이었다. 

Ⅱ. 
 왜 지난 일을 이야기하는가? 몸 전체에서 풍기던 ‘기(氣)’ 때문이다. 이 기가 그가 생래적으로 지닌 예술가적 기질과 천품(天稟), 그리고 예술에의 끊임없는 열정과 만나면서 오늘날의 조각가 ‘김광우’를 만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60여 년에 이르는, 대하(大河)와도 같은 그의 작품세계를 요해(了解)하기 어렵다. 
 김광우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포천, 휴전선이 가까운 곳이다. 한 인터뷰 2) 에서 그는 열 살 때 6.25 전쟁을 겪었다고 밝힌 바 있다. 1941년생이니 일제강점기 시절의 기억은 유년기에 겪은 희미한 추억에 지나지 않으나,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의 기억은 또렷하다. 그때 목격한, 포탄이 작렬하고 기관총 소리가 귀청을 찢는 전장(戰場)의 참혹한 모습은 훗날 그의 작품에 기관총이나 포신, 군화 등등 일종의 상징을 통해 반영되기에 이른다. 
 김광우가 유년 시절에 품었던 “전쟁은 왜 하는가?”3) 라는 의문은 훗날 작품 활동을 하면서 형성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우연’이라는 주제가 발아하는 씨앗이 되었다. 전쟁 체험에서 비롯된 이 질문은 ‘인간과 문명’을 바라보는 한 관점이 되었고, 거기에서 작품의 다양한 변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김광우는 또한 자신이 예술을 하게 된 동기를 가난에서 찾았다. ‘궁즉통(窮卽通)’4)  즉, ‘궁하면 통한다’는 말처럼, 가난에서 오는 오기가 오히려 예술에 대한 열망을 부추긴 것이다(그는 만약 자신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그런 오기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미술대학에 입학한 1961년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해로 정국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한 해 전의 ‘4.19 혁명’이 야기한 사회적 혼란과 ‘보리고개’로 대변되는 가난도 이 시기를 특징짓는 키워드들이다.   
 김광우는 보리고개보다 더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가까스로 대학에 진학을 했고, 군용차를 몰래 타고 서울에 가던 쓰라린 추억을 지니고 있다. 그가 훗날 당시 미술인들의 로망인 [국전]에서 영예의 국무총리상을 연거푸 수상(1975, 77)한 것은 작가로서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Ⅲ.
 1970-80년대에 나타난 김광우의 작품 경향을 분석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다소 긴 인용임을 무릅쓰고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에 이르는 <자연+인간+우연>의 시기는 사물에 가해지는 힘의 크기에 따라 변형된 사물의 표정을 조각의 형식을 빌려 서술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브론즈, 대리석, 나무, 화강석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한 이 시기의 작품들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표면을 지닌 단순한 추상적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들은 중간 부분이 꺾여 주름이 진 원통형이거나, 넓은 천을 빙빙 돌릴 때 나타나는 부풀린 매듭의 연속, 마치 샌드위치처럼 두 개의 현무암 덩어리에 방석을 브론즈로 떠서 끼워놓은 것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우연’은 바로 이처럼 어떤 사물에 힘이 가해졌을 때 나타나는 표정에 주목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물들, 가령 둥글고 긴 베개를 반으로 꺾었을 때 어떤 주름이 나타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또한 부드러운 풀자루를 주무르다 정지한 상태의 표정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추상조각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무작위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연+인간+우연> 연작에서 문명비판적인 시선의 <자연+인간> 연작으로 선회할 때, 김광우가 소재로 선택한 것은 인간과 기계였다. 특히 여성의 인체에서 장기를 제거하고 그 속을 기계의 부품으로 가득 채운 일련의 작품들은 이 주제에 썩 부합하는 것이다. 그는 ‘환치(depaysment)’ 기법을 사용하여 사물의 초현실적 풍경을 드러내는 작업에 주력했는데, 그것은 가령 오토바이에 커다란 날개를 부착한 것에서 잘 나타나듯이 낯익은 사물들을 서로 다른 맥락에 전치시킴으로써 낯선 광경을 연출하는 기법에 집약적으로 드러나고 있다.”5)


 <자연+인간+우연>에서 ‘우연’의 소거는 김광우의 ‘모던(modern)’한 언술 행위에서의 이탈을 의미한다. 즉 현대 추상조각에서 매끈한 덩어리(mass)가 강조되는 환원주의적 입장에서 생활세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소재 면에서 일대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한 풍경이란 과연 무엇일까? 
 부목(浮木)의 발견은 그러한 전환의 계기를 이룬다. 1998년, 김광우는 교환교수로 미국에 체류하게 됐는데, 그때 한 친구가 개인전을 준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아니 돈도, 작업실도, 재료와 도구도 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개인전을 준비하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일, 고민에 빠진 그는 어느 날 허드슨강(江)에 갔는데, 그때 강둑에 산더미처럼 쌓인 부목을 발견한 것이다. 됐다. 바로 저거다! 6)  김광우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외쳤다.  
 그리하여 무려 40미터 길이에 달하는 부목 설치작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7)  이 점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1980년대 중반이후, 김광우의 작품 명제가 <자연+인간>으로 전환되면서 그의 시선이 문명비판 쪽으로 돌려지게 된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시각이 대립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친화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는 자신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자연을 들어 설명하기보다는 반대로 기계문명과 인간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거꾸로 자연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오토바이를 소재로 한 <자연+인간> 연작은 이러한 그의 관점이 잘 드러난 매우 뛰어난 작품들이다. 부목(浮木)을 자르고 다듬어 기계 부품이나 낡은 생활용품과 결합하여 만든 이 연작은 재기에 넘치는 창의력의 소산이다. 실제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라기보다는 미적 대상에 적합한 이 연작에는 ‘우연’의 의미로서의 자연적 요소가 개입돼 있는데 부목이 바로 그것이다. 파도에 휩쓸려 바닷가에 도달한 부목을 우연히 습득하여 제작에 보탠 그것은 인체와 기계부품과의 결합을 통해 문명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던 시기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완곡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악기를 비롯하여 주방용품, 각종 생황용품 등 스텐 제품을 적재적소에 붙이고 이를 잘 다듬은 부목과 결합시킨 이 오토바이 연작은 나무라고 하는 자연의 산물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직설적인 방식을 지양하고 완곡한 우회로를 택한 김광우의 문명관이 잘 드러난 수작(秀作)이다.”8)
 
 
Ⅳ.
 김광우는 창원대학교와 부산의 동아대학교 교수로 역 30여 년의 세월을 봉직했다. 창작 생활을 하는 동시에 후진을 양성하던 뜻깊은 시기였다. 이 시기에 김광우는 동아대학교 학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하는 한편, 2004년 부산비엔날레 조각 프로젝트와 바다미술제 미술감독을 맡아 미술행정에 이바지하였다. 교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포천으로 돌아온 김광우는 그곳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고할 때까지 근 20여 년 간 작업에 몰두했다. 작업실은 갖가지 공구와 크고 작은 작품들과 다양한 재료들로 가득 찬 창작의 산실이었다. 잔디가 깔린 야외조각장은 대표작들로 꾸몄다.   
 특기할 것은 이 시기에 커다란 소파 등 일상적 사물에 접착제를 바른 후 그 위에 모래를 뿌려 기존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물로 바꾸는 작업을 수행한 점이다. 이러한 류의 작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과연 초현실주의적 환치(데페이즈망)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사물의 환치를 통해 관객을 낯선 국면으로 유도하자는 의도보다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광우는 자연과 문명의 대결 국면을 극복하고 생애의 말년에 이르러 자연으로의 회귀를 시도한 것이다. 사물에 모래를 덧씌우는 행위를 비롯하여 캔버스에 흙을 바른 뒤 거칠고 대담하게 획을 긋는 행위성이 강조된 작업을 통해 자연의 원초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라 자연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 인간 위주의 역사보다 자연 순리의 역사가 더욱 소중하고 귀한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겠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던지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김광우가 스무 살 무렵에 던진 하나의 질문, 곧 “인간의 의도가 배제된 우연의 세계”9) 에 몰입, 우주적 지평에 이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 1차 게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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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하 존칭 생략.

2) 2020 경기도 문화의 달 “포천 예술을 잇다”, <조각가 김광우를 만나다>, 대담자: 임승오(포천예총 회장, 작고)

3) 이하 자세한 내용은 동 인터뷰를 참조할 것.

4) 주역(周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의 줄임말.

5) 졸고, <자연의 소리>. 노을조각공원 도록, 2009

6) 앞의 인터뷰 참조.

7) 이 인터뷰에는 이 작품 말고도 일본에서 한 500미터짜리 부목 설치작업에 대한 언급도 있다.

8) 졸고, <자연의 소리>에서 인용. 1998년 허드슨 리버 갤러리에서 열린 “뉴욕 첫 개인전에 대한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평론가 비비안 레이너(Vivian Lainer)는 “살바도르 달리가 살아있었다면 오브제에 대한 그의 놀라운 병치를 보고 부러워 했을 것이다.'라고 표현할 만큼 오브제를 통해 자연과 인간을 결합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위키백과 ‘김광우’ 항목 참조)

9) 칼 세이건에 의하면, 우리가 우주 속에 내팽개쳐졌을 때 행성이나 그 근처에 닿을 수 있는 확률은 1조를 1조배하고 거기다 10억을 곱한 것 중의 하나보다도 작다고 한다. 1에다 동그라미 서른 세개를 붙인 수를 분모로 하고 분자를 1로 삼은 수보다 더 작은 확률이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