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과 실험미술: 적인가, 동지인가?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최근 들어서 ‘한국 실험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증하고 있다. 신문과 미술잡지, SNS 등 다양한 매체가 경쟁적으로 실험미술 내지는 전위미술을 다룬다. 그 원인이 뭔가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작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실험미술 60-70년대]전과 이어서 열린 뉴욕 소재 구겐하임미술관의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전이 대중적 관심을 촉발한 도화선이 된 것 같다. 구겐하임미술관의 전시는 이어서 L.A에 있는 해머뮤지엄으로 순회, 전시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실험미술이 미술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왜냐하면 문화적으로 척박한 토양에서 전위미술 내지는 실험미술을 한다는 자체가 매우 힘겨운 일임에 분명할진대, 그동안 이 분야에 몸담고 수십 년 동안 활동해 온 원로 전위작가들의 정신적 고통을 생각할 때, 이제야 그동안의 노력과 노고에 대해 그나마 사회적 보상을 한 것이 아니냐 하는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이 지닌 권위를 생각할 때, 60-70년대 당시 젊은 예술가였던 이들이 이제 80의 노경에 이르러 마침내 예술의 전당에 명예가 헌정되는, 작가로서는 더 없는 영예를 얻었기 때문이다. 


Ⅱ.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실험미술 60-70년대]전은 1967년 12월 11-16일에 열린 [청년작가연립전]을 기점으로 한국 전위 내지 실험미술의 역사를 대표적인 작가와 단체의 활동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다. [청년작가연립전]은 홍대 출신의 작가들이 모여 결성한 ‘무’. ‘신전’, ‘오리진’ 그룹이 모여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당시로선 가장 첨단인 신세대 미술을 선보인 것이었는데, ‘무’동인이 중심이 된 이들은 1) 전시 첫날인 11일에 한국의 초기 해프닝인 <가두시위>와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을 벌였다. 

 당시 한국사회는 ‘보리고개’란 유행어가 성행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외환보유고가 3억 달러를 돌파,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성안된 이래 서서히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었다. 2) 세간에는 ‘웃기네’라는 유행어와 함께 미니스커트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무렵, 도시의 대로변 전파사의 스피커에서는 현미의 히트곡인 ‘안개’가 흘러나오던 시절이었다. 

 당시 국립중앙공보관 전시실에서 열린 [청년작가연립전]은 하나의 문화적 데먼스트레이션이었다. 신세대 문화의 기수들인 이들은 스승 세대인 ‘현대미술가협회’ 회원들이 추구하던 비정형회화(앵포르멜)를 거부했다. 캔버스로 통칭되는 회화를 거부하는 ‘탈평면’, 즉 평면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흔히 보는 사물들에 주목한 이들의 주력 언어는 몸의 언어인 해프닝(Happening)과 연통이나 방독면, 확대된 팔각성냥통 등의 일상적 오브제였다. ‘무’동인은 해프닝을 주력으로 삼았으며, ‘신전’ 동인은 오브제와 설치, ‘오리진’은 유일하게 기하학적 추상 경향의 회화를 보여주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이들의 작품 경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우선 연립전에 나온 작품들을 분류해보면, 팝아트와 네오 다다적인 소비사회의 물질적 체험과 대중적 이미지의 수용, 옵티컬 아트의 시각적‧기하학적 추상, 미술개념의 확대현상으로의 환경예술과 해프닝 등 60년대에 전개된 현대미술의 전체적 경향을 포괄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혼란에 찬 활기란, 중심적 경향이 없기 때문에서이기도 하지만 침체현상을 벗어나려는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넓게 확산되어 있었다는 데서 수렴되어진다.” 
-오광수, <한국미술의 현장>, 조선일보사, 1988, 16쪽-

 이른바 평면에서 일상적 오브제와 해프닝에로의 전환은 미술의 주류인 회화에서 일상으로의 이행이란 점에서 큰 틀이 바뀌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원래 군대용어에서 문화적으로 전성된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미술계로 말하면 전위미술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미학을 들고 나온 일단의 작가들을 지칭한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1957년에 결성한 [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는 서구적 조형언어인 프랑스 중심의 ‘앵포르멜(Informel)’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적 경향을 흡수, 그 바탕 위에 자신들이 체험한 6.25 전쟁의 참상을 작품에 육화시켜 당시로선 최첨단인 미술의 사조를 대중에 선보인 것이다. 현대미협의 회원들은 후속세대인 ‘60년 미협’, ‘벽전’ 멤버들과 함께 비정형 회화를 추구, 당시 보수의 대명사 격이었던 국전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60년대 중반에 이르면 당시만 해도 최첨단의 조형언어였던 비정형 회화는 안이한 타성에 빠져 새로운 미학적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공백기를 치고 나온 것이 바로 1967년의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이었던 것. 한국미술사상, 이들이 벌인 미학적 도발과 거사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문화예술의 최전선에 서있는 전위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의 행위는 프레이저가 <황금의 가지>에서 묘사한 ‘다모클레스의 검’의 위치에 존재한다. 고대 사회에서 왕이 자리에 오르면 옥좌 위에 칼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것은 다음 왕에게 옥좌가 승계됨을 암시하는 한편, 그만큼 자리가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 전위에 빗대보면 한 시기의 전위는 다음 전위에 의해 도전과 저항을 받는 운명에 처한다. 그것이 전위의 숙명인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고지의 탈환’이란 군사적 용어만큼 예술의 사회사를 적확(的確)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이것이 바로 본디 군사용어였던 ‘아방가르드(전위예술)’가 문화적으로 전용(轉用)된 이유인 것이다. 삶의 치열성이 곧 예술의 치열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고지’ 점령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예술분야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어느 것이든, 그것이 곧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3)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 기성세대 세력이 세월이 흐르면서 힘이 약화된 모습을 보이면 예술상의 새로운 이념과 방법으로 무장한 신세대가 등장하여 구세대를 위협하는 것이다. 50년대의 앵포르멜 세대가 60년대 중반에 정체기를 맞이하자 청년작가연립전 세대가 탈평면을 주장하며 해프닝을 비롯하여 입체, 설치 등의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도전적인 발언의 포문을 열었다. 

 여기서 전열을 가다듬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 소강 국면의 시기가 대략 70년대 초반에서 중반 무렵이었다. 이른바 아방가르드를 뜻하는 ‘AG’그룹의 결성을 필두로 ‘ST’그룹, ‘제4집단’, ‘신체제’, ‘에스프리’ 등으로 이어지는 70년대 초반의 실험미술 내지 전위미술의 풍경은 앞서 말한 ‘다모클레스의 검’의 승계를 연상시킨다. 고지의 탈환이란 관점에서 보면 박서보의 한국미술협회 장악(1970-77: 부이사장, 1977-80: 이사장 역임)은 구세대의 고지 탈환을 의미한다. 그것은 거칠게 구분해서 ‘앵포르멜-해프닝, 입체, 설치=실험미술-단색화’의 단선적 전개 양상을 보이는데, 내용적 측면에서 볼 때 단색화 세력은 앵포르멜 세대의 귀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70년대 단색화의 등장은 50년대 앵포르멜 세대의 부활을 뜻한다. 이 무렵은 한국미술협회의 회원 수가 지금처럼 수만 명을 웃도는 거대 단체가 아니라 4) 천여 명 정도의 단출한 살림이었다. 1970년, 미협 국제담당 부이사장에 당선된 박서보는 재임 기간 중 ‘한국미술의 국제화와 지역미술의 현대화’를 모토로 1972년 [앙데팡당]전을 필두로 1975년에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드서울]을 창립, 한국미술의 현대화를 위한 교두보로 삼았다. 이 3개의 대규모 전시는 당시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는데, 그중에서도 단색화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미적 모더니티(Aesthetic Modernity)’가 가장 잘 발현된 단색화의 등장은 근대적 미의식의 소산이었다. 미적 모더니티는 서구의 오랜 역사가 입증하듯이, “근대사회의 긴 역사적 터널을 통과해야만”5) 얻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제도의 정비가 필요했다. 따라서 정부의 1964년 미터법 시행은 ‘근’이나 ‘척’, ‘마장’, ‘식경’과 같은 구시대의 세계에서 벗어나 ‘모던’한 세계로의 이행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70년대 초반, 단색화는 어떻게 해서 등장하게 되었는가? 

 “국제전 참가를 위한 작가 선정을 목적으로 창설한 ‘앙데팡당’은 1972년에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첫 전시를 가진 이래,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으로 이전하자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열렸다. 1972년의 제1회 [앙데팡당전]은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했다. 그것은 당시 미협 국제분과 위원장 겸 부이사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박서보에 의해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한 여러 국제전에 참가할 작가를 선별할 목적으로 창설된 무(無)심사 독립전이었다.” 6) 
 

 당시 전시의 심사위원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한 이우환은 1석으로 이동엽을, 2석으로 허황을 선정했다. 둘 다 단색화 계열이었다. 미협 국제분과는 이 두 작가를 파리비엔날레에 추천하였으나, 비엔날레 측이 오브제, 설치, 이벤트를 위주로 한 비엔날레 성격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 거부해옴에 따라 미협은 이들의 작품을 2년 뒤에 열린 카뉴국제회화제에 출품, ‘3인공동국가상’을 수상하였다. 


Ⅳ.
 70-80년대에 심화, 확산의 단계를 거친 한국의 단색화는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으로 열린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 도록에 실린 영문번역에서 ‘Dansaekhwa’로 표기된 이래,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Korean Monochrome Painting]전 7) , 국제갤러리의 [단색화의 예술(The Art of Dansaekhwa)]전, 베니스비엔날레의 병렬전시인 [Dansaekhwa](이용우 기획) 등등 대규모 기획전과 해외 유명갤러리들, 국내외 미술잡지의 연이은 단색화 특집 등을 통해 용어가 국제적으로 정착되었다. 

 이 특집의 주제가 되는 실험미술과 미술시장은 사실 별 관계가 없다. 단색화가 세계미술 시장에서 각광을 받자 50-70년대에 실험‧전위미술을 한 작가들인 박서보, 윤형근, 정상화, 정창섭(이상 앵포르멜 세대), 하종현(AG), 이건용(ST), 이강소(신체제) 등이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단색화 인기작가 8) 로 각광을 받을 뿐, 대다수의 실험작가들은 70-80대에 이른 현재도 미술시장과 무관한 채 작업을 하고 있다. 단, 예외가 있다면 성능경인데, 70년대 초반에 <ST> 그룹 회원으로 실험과 전위미술에 투신한 그는 80세에 이른 지금까지 일관되게 실험작업을 계속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그도 작년의 백아트갤러리 초대전 이후 현대화랑과 최근의 리만머피갤러리 초대전 등 유명한 국내외 상업화랑과 연계돼 있어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 1차 출처 『미술세계』 실험미술 특집 원고 202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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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리진’ 그룹 회원들은 참가하지 않음

2) 개항100년연표자료집, 신동아 1976년 1월호 별책부록, 268쪽. 

3) 윤진섭, 70년대 한국 단색화의 태동과 전개,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마로니에 북스, 2015, 78쪽.

4) 2013년 기준, 한국미술협회의 회원 수는 30,030명이며, 산하에 등록된 미술단체 수는 128개이다. 김달진, 1950-90년대 미술단체 흐름, 그 실상을 보다, 참조.

5) 윤진섭, 앞의 책, 71쪽.

6) 윤진섭, 앞의 책, 78쪽.

7) 전시기획자 및 ‘Dansaekhwa’의 명명자는 필자임.

8) 이건용은 단색화 작가는 아니나 좀 애매한 작업을 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