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續) 비평과 통찰/그후 33년  

윤진섭 | 미술평론가

<空間> 1992년 8월호에는 ‘미술비평의 문제’라는 대주제 아래 ‘나의 관심, 나의 비평’이란 소주제로 쓴 미술평론가들의 글이 실렸다. 참고삼아 필자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강선학, 강성원, 김윤수, 김숙경, 김영순, 김인환, 김영재, 박래경, 김현도, 서성록, 성완경, 박신의, 박용숙, 신방흔, 송미숙, 심광현, 오광수, 윤진섭, 오병욱, 유근준, 이재언, 유준상, 유재길, 윤난지, 이시우, 윤우학, 윤범모, 유홍준, 이 일, 이영철, 이석우, 이구열, 이용우, 이종숭, 이 준, 임두빈, 이영욱, 임영방, 정영목, 장석원, 최병식, 황현욱, 최태만. 그 후 서른 세해가 흐르는 동안 거진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열 세분이 세상을 떴다. 

 이번에 <미술평단>이 제시한 ‘나의 미술평론’이란 주제로 글을 쓰려하니 <空間>에 글을 쓸 당시의 정황이 선명히 떠오른다. 90년대 초반 당시는 70년대의 모더니즘 독주시대를 지나 이의 반동으로 나타난 80년대 초반의 민중미술, 후반에 이 두 거대 서사의 혼재시기를 거친 후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空間>의 특집이 마련됐던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3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와 지금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비평은 같은 비평인데, 여건이 사뭇 다르다. 내가 두 페이지 분량의 이 짧은 글을 쓰는데 고심했던 이유다. 이 시간의 흐름을 역사라고 한다면, 그 안에서 몸담고 살아온 역사적 존재로서의 나는 과연 어떤 일을 했던가? 한 사람의 비평인으로서 어떤 화두를 끌어안고 글을 썼는가? 참고삼아 당시 ‘비평과 통찰’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의 한 대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미술계에는 주도적인 흐름이란 것이 있어서 화단의 모습을 분명한 색깔로 채색했다. 90년대 초반에 해당하는 지금은 그와 같은 편향성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다원주의의 시대를 구가하는 듯한 기색이 완연하다...(중략),,,문화의 민주화를 지향하는 길목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와 같은 현상적 징후들은 우리문화의 미래를 놓고 볼 때 매우 바람직한 청신호가 아닐 수 없다...(중략)...구시대의 유물임에 분명한 학연과 지연에 의한 파벌형성,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따른 화단의 소모적 대립 등은 빨리 청산되지 않으면 안 된다...(중략)...90년대 미술의 흐름과 면모는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질문은 아직 제기되기에 이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겉보기에 멀쩡한 것처럼 보이지만 미술계의 환부는 생각보다 깊으며 그것은 우리의 공동체를 멍들게 한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부문의 병인(病因)과 깊은 구조적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비평은 분연히 일어서야 한다. 하여 지난 시절 거대한 이야기들의 틈바구니에서 숨죽여 지내지 않을 수 없었던 작은 이야기들의 숨통을 터주고, 개념의 밭을 잘 정지(整地)해 주어야 하며, 우리의 미술이 올곧게 나갈 수 있도록 이정표 세우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불은 사위어 갈 때 한번쯤 활화산처럼 피어오르게 마련이다. 지금 번져 흐르고 있는 미술계의 이 개화(開花)가 위기적 증상의 다른 표현은 아닌지 두고 볼 일이다.” 

 모더니즘에서 민중미술로, 다시 이 양자의 혼재 시기를 거쳐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기로 이행해간 이 변증법적 역사의 진행과정을 놓고 한 사람의 비평인으로써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70년대 중반에 ST그룹의 멤버로 화단에 몸을 담근 이래 나의 관심은 주로 전위미술(avant-garde art)에 쏠렸다. 비평, 창작, 전시기획이 이 토픽에 집중되었다. 그 저변에 요한 호이징하가 문화의 공통인자로 파악한 ‘놀이정신(Homo Ludens)’이 깔려 있다. 나의 삶에서 이 삼요소는 서로 영향을 미치며, 하나는 다른 것에 대한 레퍼런스로 작용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판명된 것이지만, 앞의 인용글 후반부에서 지적한 ‘활화산’은 신자유주의의 도래로 인한 ‘상업주의’의 팽배로 볼 수 있으며, 미술계의 개화(開花)에 따른 ‘위기적 증상’은 전위정신의 실종 내지는 ‘비평의 침묵’이 아닐까? 일찍이 헤겔이 지적했듯이, ‘이성의 간계’에 기인한 짝짓기가 횡행하는 비엔날레의 현장(오늘날 그것들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위의 교두보이며 실험의 각축장인가? 아니면 상업화랑에 작가들이나 공급하는 거간에 불과한가?)을 돌아보면서, 폴 발레리가 톡 쏘듯 비유한 ‘말꼬랑지에 붙은 등애’만도 못한 비평가로서의 처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 1차 게재 미술평단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