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한 / 같아 보이는, 그러나 다 다른
                                                                
윤진섭 | 미술평론가

 후기 단색화(Post-Dansaekhwa)의 정예작가인 김덕한의 작품은 겹과 결의 변주를 요체로 한다. 그 원리는 적층의 방식이다. 사각의 목제 패널에 옻칠 도료를 색깔별로 겹겹이 바르고 난 뒤 마른 후에 사포로 갈아내는 작업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한다. 
 결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로는 ‘성품의 바탕이나 상태’를 가리킨다. 반면에 겹은 “물체의 면과 면 또는 선과 선이 포개진 상태, 또는 그러한 상태로 된 것”(네이버 국어사전)을 이름이다.  

 이 결과 겹의 의미를 미적으로 추적하여 종국에는 하나의 단일한 덩어리, 즉 사각의 목제 패널을 제시하는 것이 김덕한의 작업이다. 그런데 이 일이 한없이 지난하다. 왜 그런가? 

 김덕한의 작업이 품은 함의가 그러하다. 김덕한의 작품은 그 안에 수많은 겹과 결을 머금고 있다. 그것들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행위’이다. 그러니까 김덕한에게 있어서 행위란 겹과 겹 혹은 결과 결을 이어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김덕한의 행위는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작업이 그런 것처럼 수행적 의미를 띤다. 반복성, 물성, 정신성, 수행성과 같은 단색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 것이 바로 김덕한의 작품이다. 

 이번에 화이트스톤 갤러리에서 열린 김덕한의 초대전 출품작들 중에서 단색화의 특징들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검정색 그림들이다. 다른 유채색 계열의 작품들이 서로 다른 색상의 적층을 형성하고 이를 사포로 갈아내 만든 것인 반면, 이 검정색 단색화들은 오직 검정의 옻칠 도료만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했다. 총 5회에 걸쳐 검정 옻칠 도료의 적층이 있었다. 그 결과 검정색의 표면은 미묘하게 아른거리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낳았다. 마치 푸른 하늘에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처럼 화면 전체에 번져나간 아른한 물감의 자취들은 기실 숱한 사포질의 결과이다. 즉 무수한 행위의 산물인 것이다. 김덕한의 작업을 선수행(禪修行)에 비유하는 이유이다. 실제로 승려 생활을 하기도 했던 김덕한은 수행의 본질적인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다. 마음속에 이는 온갖 상념과 감정을 떨구기 위한 방편으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절, 가령 3천배의 요체는 ‘스스로를 먼저 내려놓는’ 하심(下心)에 있다. 불교에서는 천지가 한번 개벽한 후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을 겁(劫)이라고 하는데, 이 겁에는 과거겁(住劫)과 현재겁(賢劫), 미래겁(星宿劫) 세 가지가 있다(불교용어사전, 네이버). 

 김덕한이 사각의 목제 패널에 대략 15번의 서로 다른 색상의 옻칠 도료를 칠하고 마른 후에 사포로 갈아내는 지난한 작업을 하는데, 이는 같은 행위의 반복이란 점에서 선수행을 닮았다. 평면 위에 넓은 붓으로 도료를 칠하거나 쇠주걱으로 바르는 같은 동작을 반복한 후 마르면 무수히 사포로 갈아내 서로 다른 층위가 캔버스의 모서리 부분에서 드러나게 된다. 이때 과거의 층과 현재의 층이 동시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예민한 손의 감각으로도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동일한 층으로 감지된다. 개념미술의 비조(鼻祖)인 마르셀 뒤샹은 식별하기 어려운 사물의 이 미묘한 차이를 가리켜 ‘앵프라맹스(inframince)’라 불렀다. 같은데 다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가을날, 공원에 수북히 쌓인 노란색의 은행잎들을 보며 우리는 다같은 은행잎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형태며 상태가 조금씩 다르다.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다.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 

 김덕한은 사물의 이 미묘한 차이에 대해 성찰한다. 사각의 캔버스에 빨간 색의 옻칠 도료를 칠하고 사포로 갈아낸다. 이번에는 말끔하게 갈아낸 평면 위에 푸른 색의 도료를 칠한다. 다시 갈아낸다. 먼저 칠한 색은 방금 칠한 색의 아래에 잠겨있다. 다른 색이 반복해 칠해진다. 또 잠겨진다. 마지막 색을 갈아낸후 모서리 부분을 공들여 간다. 미세한 여러 겹의 색층이 모습을 드러낸다. 손으로 만져본다. 그러나 각기 다른 시간의 층위를 머금은 여러 층의 겹에서 느껴지는 것은 같은 층이다. 앵프라맹스의 출현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같은 층일까?   

- 1차 게재 서울문화투데이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