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 퍼포먼스의 전개와 양상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8.15해방 이후의 한국근현대미술사에서 퍼포먼스(performance art) 1) 는 회화나 조각 등 다른 장르에 비해 도입이 매우 늦다. 가령 회화만 하더라도 서양화의 경우 고희동의 도일(1909)을 기점으로 잡는 것이 정설이나, 퍼포먼스는 그보다 훨씬 늦은 1967년의 [청년작가연립전]에 나타난 해프닝(happening)을 첫 사례로 삼는다.
[청년작가연립전](1967.12.11.-16)은 중앙공보관 전관에서 열렸는데, 홍대 출신의 ‘무’, ‘신전’, ‘오리진’ 그룹이 참여하였다2). 이 전시에서 두 개의 해프닝이 발표되었다. 첫 발표는 전시 개막일인 12월 11일에 벌어진 <가두시위>였다. 1967년 12월 11일 밤 10시, ‘무’동인과 ‘신전’ 동인의 멤버들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피켓의 내용은 ‘행동하는 화가’를 비롯하여 ‘좌상파 국전’, ‘추상이후의 작품’, ‘현대미술관이 없는 한국’, ‘국가발전은 적극적 예술의 진흥책에서’, ‘4억의 도박 국립종합박물관’ 등 주로 미술과 관련된 것이었다.” 3)
이들이 이처럼 과격한 행동을 벌인 것은 당시 <국전>의 폐해가 컸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때의 <선전(鮮展>을 본따 만든 <국전(國展)>은 화단내 최대의 작가 등용문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이른바 ‘S대파’니 ‘H대파’니 하는 학연과 파벌 속에서 각종 심사비리가 횡행하였다. 따라서 정의감이 넘치고 피가 끓는 20대의 청년작가들이 벌인 시위는 사회적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당시 시위는 시청 앞을 출발, 세종로를 거쳐 종로 2가, 삼일로, 소공동으로 이어졌다. 이때 사고가 터졌다. 피켓을 든 시위대가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는 순간, 교통경찰에 걸려 참가자 중 일부가 종로경찰서에 연행되는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 퍼포먼스의 역사에서 <국전>을 겨냥한 퍼포먼스는 <가두시위> 외에도 또 하나가 있다. 이듬해에 제2한강교에서 벌어진 <한강변의 타살>이 그것이다. 1968년 10월 17일 오후 4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은 제2한강교 아래에서 해프닝을 벌였다. 신문기자를 비롯하여 관객 등 수십 명이 운집한 가운데 이들은 자신의 몸이 들어갈 정도의 모래구덩이를 팠다. 이들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행위자의 목만 남기고 삽으로 흙을 밀어넣었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관객들이 이들의 머리 위로 양동이에 가득 든 물을 쏟아부었다. 얼마 후에 행위자들이 구덩이 밖으로 나와 중앙에 머리가 들어가게끔 커다란 구멍이 뚫린 색 비닐을 뒤집어썼다. 세 사람의 행위자는 길게 드리워진 비닐 위에 흰색 페인트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서로 써 주었다. ‘문화사기꾼’, ‘문화실명자’, ‘문화기피자’, ‘문화부정축재자’, ‘문화곡예사’ 등등이었다. 행위자들은 그 문구를 큰 소리로 읽은 다음 색 비닐을 모아 태우는 화형식을 가진 후에 땅에 파묻었다.
‘문화사기꾼’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미술계를 좀먹는 사이비 작가를 지칭했다. ‘문화부정축재자’는? 사이비 대가. ‘문화곡예사’는? 사실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사실로 줏대없이 오락가락하는 ‘시대미학의 편승자’를 의미했다. 어쨌거나 당시 국전을 둘러싼 잡음을 한판의 퍼포먼스로 풍자한 예리한 사회비판의 사례가 아닐 수 없다.
Ⅱ.
서양에서는 20세기 초반에 다다(Dada)를 비롯하여 미래파, 초현실주의, 러시아구성주의 등의 사조에서 퍼포먼스가 벌어져 전위적 활동의 전선을 구축했다. 로즐리 골드버그(RoSeLee Goldberg)는 퍼포먼스를 다룬 기념비적인 저서 <행위예술(Performance Art_from futurism to the present)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또한 각 분야에서 전통과의 관계를 끊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예술가들, 즉 전위예술가들의 역사에 있어서 20세기의 퍼포먼스는 그러한 활동의 최전선, 따라서 전위의 전위에 위치하여 왔다. 미래주의자, 구성주의자, 다디이스트, 또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작업에 관하여 오늘날 쓰여지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각기 그 시기에 제작된 예술작품에 중점을 두어왔는데, 그러한 운동의 뿌리가 퍼포먼스였으며, 또한 퍼포먼스에 의해서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측이 훨씬 많았다. 그러한 그룹의 멤버가 20대나 30대 초반 무렵 그들이 그 이념을 시도했던 것은 먼저 퍼포먼스에 의해서였으며, 그것이 나중에 와서야 작품으로 표현되었다.”4)
그렇다. 로즐리 골드버그의 말처럼 퍼포먼스는 ‘전위의 전위’임에 분명하다. 퍼포먼스는 온갖 미학적 실험이 난무하는 전위의 최일선에 위치하며, 작가는 ‘몸’으로 돌격하는 격전장의 전사들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앞 장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가두시위>와 <한강변의 타살> 해프닝의 동기와 미술사적 의의가 밝혀진다. 그들은 <국전>이란 제도에 저항하며 투쟁했다. 그것은 한국근현대미술사의 진행과정에서 보기 드문 정치적 참여였다. 행위미술사의 측면에서 볼 때, <가두시위>를 비롯하여 <한강변의 타살>, 그리고 제4집단이 벌인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1970) 등등의 해프닝들은 당대의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퍼포먼스의 선례가 된다. 이 행위들은 “기존의 제도에 대한 전복이나 도전, 저항 등 아방가르드적 속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초기 해프닝으로써, 80년대에 등장한 민중미술이 제도권 미술에 대해 보인 강한 저항적 태도보다 앞선 것이었다. 본격적이진 않았지만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맹아가 된다는 점에 초기 해프닝이 지닌 미술사적 의의”5) 가 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이보다 앞선 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민중미술이 ‘정치적 아방가르드’로서 제도권 미술에 대한 이의제기였다고 한다면, 행위미술은 기존 미술의 언어에 대해 형식파괴적 성격이 짙다는 점에서 비록 그 내용이나 지향하는 목표는 다르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른바 아방가르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급진성은 이 두 경향을 관류하는 공통적 성격으로 기존의 미학을 해체하고 공격하는 데 그 주요한 목적을 두고 있다.” 6)
Ⅲ.
“이 거사 7) 를 기점으로 한국의 전위미술은 도도한 물줄기를 이루며 화단의 변방에서 점차 미술사의 중심으로 위치이동을 해왔고, 50년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미술사를 써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 ‘행위미술’이 있다.” 8)
전위미술과 겹치는 ‘행위미술/퍼포먼스’는 마치 일란성 쌍둥이와도 같다. ‘저항과 도전의 정신’을 바탕으로 급진성을 생명으로 하며 과감한 실험정신으로 표현의 방법론과 영역을 확장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전위로서 행위미술의 역사적 행보는 미술의 중심을 향한 끊임없는 전진과 도전의 발자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이후 80년 미술의 역사에서 퍼포먼스는 비록 후발주자에 불과했지만 그만큼 숨 가쁘게 새로움의 역사를 써왔다.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가는 증기기관차처럼 흰 김을 내뿜으면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신경지를 개척해왔다. 만일 이 과정에서 새로움을 가장한 구태나 교활이 있었다면 그것은 미적 사기이거나 사이비 전위일 것이다. 지금도 일부 행위예술가들에게서 보이는 후안무치한 동어반복의 방법론은 그런 의미에서 경원의 대상이거나 정리의 품목에 들어가야 마땅하다. 전위의 대명사이자 작가의식의 최전선에 서 있어야 할 행위예술가가 도전과 실험을 그친다면 그것으로 작가적 생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퍼포먼스는 60년의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고난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복된 순간을 맞이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이 공동주최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전이 그것이다 9). 이 전시는 AG와 ST, 제4집단 등 한국 실험미술의 대명사 격인 단체들을 필두로 김구림, 이승택,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이건용, 이강소, 성능경 등등 행위예술을 기반으로 한 전위미술가들을 대거 초대함으로써 한국 실험미술과 전위미술 내지 행위미술에 대한 역사적인 조명을 했다. 이로써 한국 행위미술은 60년에 걸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헌정되기에 이른다.
Ⅳ.
나는 2017년에 코엑스에서 열린 KIAF를 위해 특별전을 기획했다. [한국 행위예술 50주년 기념자료전-실험과 도전의 전사들]이 그것인데, 이는 50년에 걸친 한국 행위미술의 역사를 총 4개의 시기로 구분한 것이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기 한국 행위미술의 태동기(1967-70): 실험과 도전, 해프닝이 한국화단에 처음 나타나면서 제도권에 대한 행위미술가들의 도전과 실험이 극단적인 형태로 벌어진 시기다. 정부정책을 비판하는가 하면 전위예술가들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른바 전위예술에 대한 대중의 몰이해와 함께 이들의 행위를 장발과 미니스커트, 대마초 흡연 등 퇴폐풍조로 낙인찍는 정부의 탄압이 동시에 발생했다. 대표작품으로는 <한강변의 타살>(1968), <투명풍선과 누트>(1968),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1970).
제2기 한국 행위미술의 정착기(1971-1980) : 논리와 사유
7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해프닝에 대한 열기가 가시면서 개념미술의 연장선상에서 논리와 사유가 중시되는 이벤트가 성행하기 시작했지만 작가는 극소수에 국한되었다. 이건용의 로지컬 이벤트, 성능경의 언어 및 신체 이벤트, 김용민의 명상적 사유 이벤트, 장석원의 선불교적 이벤트 등이 이 시기에 나타났다. 관념적이며 사유적인 행위미술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제3기 한국 행위미술의 확산기(1981-1999) : 융합과 충돌
8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의 행위미술은 점차 장르간의 융합을 가져오면서 토탈화되기 시작한다. 비단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무용, 연극, 마임, 실험영화, 의상 등 장르 간 크로스 오버와 퓨전이 이루어지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돼 나갔다. 80년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집결돼 마침내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의 출범을 여는 중대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한국의 행위미술은 점차 다변화되었으며 미술의 내적인 문제보다는 작가들의 다양한 내면 의식이 일종의 서사적 형식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행위미술이 나타났다. 대전의 [19751225], [78세대](1980)와 [금강야외현대미술제](1980), 공주의 [야투](1981), 대구의 [12월-퍼포먼스](1981), [현장에서의 논리적 Vision](1982) 등등.
그 가운데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야투]의 다양한 활동이다. 야투의 활동에는 여럿이 있지만 특히 1981년 이후 현재까지 무려 40여년간 지속되고 있는 <사계절연구회>는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린 최근의 팬데믹 상황에서 그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졌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마다 전국의 산야를 찾아 자연을 소재로 단순한 행위를 벌이는 야투 특유의 퍼포먼스가 바야흐로 셰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날로 황폐해져 가는 지구촌 환경에서 생태의 문제가 시급한 이슈로 떠오르는 가운데, 자연과 인간과의 동화(同和)를 목적으로 삼는 야투의 정신이 비단 예술뿐만이 아니라 인문학의 지평에서 조명되기에 이른 것이다. 펴포먼스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는 세계에도 유례가 없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 생수가 없던 시기에 태어나 이제 생수가 없이는 인간이 살기 힘든 시기를 지나며 [야투] 회원들의 혜안과 선견지명이 더욱 돋보인다 하겠다.
제4기 한국 행위미술의 국제화 시기(2000- ) : 상승과 교류
2000년대에 접어들자 한국 행위미술계에 큰 변화가 찾아오는데, 국제 교류가 그것이다. 2000년에 창설된 [서울국제행위예술제(SIPAF)]에 프랑스의 올랑(Orlan)을 비롯하여 호주의 스텔락(Stelarc), 일본의 타스미 오리모토 등 저명한 행위예술가들이 초대되었으며, 김백기가 주도한 [한국실험예술제(KOPAS)]에도 유럽과 미국, 아시아 등 많은 외국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홍오봉이 창설한 [부천행위예술제(BIPAF)]와 문재선이 설립한 [Performance Art Net Work in ASIA : Pan ASIA]도 국제화를 겨냥한 행사였다. 특히 2000년대에는 행위예술제가 성황을 이루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0)
Ⅴ.
60년대를 점유했던 해프닝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70년대에 접어들자 1972년에 반포한 유신헌법으로 인해 사회는 더욱 심하게 얼어붙었다. 군사정권이 낳은 공안정국은 언론검열과 고문을 통해 시민의 알 권리를 제한하고 인신을 구속했다. 이러한 폭압 앞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특히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으로 대변되는 퇴폐문화 추방은 자기표현의 위축 내지 말살이란 부정적 사회심리를 확산시켰다. 퍼포먼스 역시 여기서 예외일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양풍(洋風)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더욱 핍박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한국 최초의 히피로 기억되는 정찬승의 경우가 대표적이다11).장발에 마리후아나를 피고 자유분방한 복장이 특징인 그는 주간지의 표지를 장식할 만큼 유명했다. 물론 장발단속이란 퇴폐와 관련된 일화이긴 했지만.말이다. .
1974년에 성능경은 신문작업을 했다. 당시 동아일보를 정기구독한 그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ST그룹 정기전에 신문을 펼쳐 핀으로 꽂고 기사를 면도칼로 오리는 행위를 전시기간 동안 매일 반복했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행위에 이름을 붙인 사람은 이건용이었다. 이듬해인 1975년의 일이다. 이건용은 백록화랑에서 열린 전시에서 <이벤트-현신(現身)>이란 제목 하에 <동일면적>과 <실내측정>이란 두 개의 이벤트를 선보였다. 국내 최초의 ‘이벤트(Event)가 탄생했다. 성능경은 이건용 보다 1년 일찍 실제 이벤트를 행하였으나 명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이틀을 놓쳤다.
1960-70년대에 걸친 한국 퍼포먼스의 전개과정에서 60년대의 해프너들이 보인 사회적 비판과 저항, 도전정신은 70년대에 접어들자 계승되지 못하고 급속히 지하화(地下化)하기 시작했다. 이는 앞에서 말한 공안정국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70년대의 이벤트는 침묵의 시대가 낳은 침묵의 언어이다. 이벤트는 60년대의 해프닝이 지녔던 우연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건용의 <건빵먹기>는 팔에 붕대로 감아 댄 부목의 길이가 증가함에 따라 입에 들어가는 건빵의 빈도가 점점 더 희박해지는 논리적 관계를 물은 작품이다. 행위자인 이건용은 말을 한 마디로 하지 않았다. 성능경은 1976년에 행한 <신문읽기>를 통해 침묵의 금기를 깼다. 이강소는 1973년에 발표한 <소멸-화랑내 술집>을 통해 화랑에 시끌벅적한 술집의 풍경을 연출, 예술과 일상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김용민의 선(禪)을 연상시키는 <걸레짜기> 이벤트 역시 침묵적이었다. 장석원의 이벤트 또한 불교적이거나 선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지만 침묵적이긴 마찬가지였다. 70년대 말엽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진 이우환은 이 시기를 가리켜 ’꽁꽁 얼어붙은‘ 시대로 기억했다.
Ⅵ.
탕, 탕, 탕. 궁정동에 울린 몇 발의 총성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서곡이었다. 10.26 사태로 대변되는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치 종식이 ‘민주화의 봄’을 가져왔다. 그러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3김씨의 등장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봄’은 1979년 12.12 사태를 통해 등장한 신군부에 의해 사라졌다. 전두환 장군의 대통령 취임과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개최가 상징하는 경제적 풍요, 1987년의 민주항쟁으로 얻은 ‘6.29 민주화선언’과 노태우 후보의 13대대통령 당선 등등 굵직한 사건으로 점철된 80년대는 숨 가쁘게 흘러갔다.
1980년대의 퍼포먼스는 이처럼 숨 가쁘게 흘러간 세월의 와중에서 탄생했다. 미술의 경우, 특히 전위와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이른바 중앙보다는 지역미술의 활성화이다. 그 선레는 대구였다. 섬유산업의 발전으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한 대구에는 일찍부터 화랑업이 번성했다.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의 창설은 대구가 실험미술의 메카로 자리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70년대 중반 대구화단의 번성은 지역미술의 정착과 확산을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 것은 1970년 이후 10년간에 걸쳐 미협 부이사장‧이사장을 역임하는 동안 [앙데팡당]전을 비롯하여 [에꼴드서울], [서울현대미술제]를 통해 화단의 중앙집중화와 단색화의 확산을 꾀한 박서보 사단의 권력에 대응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대구현대미술제의 일환으로 열린 강정과 냉천에서의 이벤트와 1980년 [금강현대미술제], 이어서 81년에 창설된 <야투>는 퍼포먼스의 관점에서 봤을 때 지역 중심의 새로운 세력의 발흥으로 주목되는 현상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수원에서 컴아트 그룹이 결성된 사실 또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중국과 수교를 하여 이념적 해빙기의 문화교류를 열어간 의미있는 행동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다. 이 기록은 90년대에 들어서 행해진 퍼포먼스 교류사를 빛낸 쾌거로 남을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김석환을 비롯한 수원 컴아트 그룹의 멤버들이 어떻게 난관을 극복하고 운명을 개척해 나갔는지 급박한 순간들을 보여준다.
“전시기획과 관련하여 당시 중국의 상황은 썩 좋은 편이 못 되었다. 내일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듬해인 1994년 전시에 앞서 선발대로 북경에 간 김석환의 다음과 같은 술회는 이 무렵 중국과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실감케 한다....(중략)....그런 사정이었기 때문에 베이징에서의 공식적인 퍼포먼스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게릴라 퍼포먼스’였다. 김석환, 이경근, 박이창식, 황민수, 홍오봉 등 행위예술가들은 공안원의 눈을 피해 천안문광장을 비롯한 자금성, 만리장성 등지에서 퍼포먼스를 펼쳤다. 당시만 해도 중국 사회는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공안원들의 감시가 삼엄했다. 대중이 많이 모이면 집회로 오인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퍼포먼스가 이루어질 리 없었다. 황민수는 자금성 앞에 있는 인민광장 한복판에 서서 두 팔을 번쩍 들어 양손의 손가락 끝이 멀리 보이는 자금성의 지붕 끝에 일치하도록 한 퍼포먼스를 했다. 홍오봉은 《북경-한국현대미술의 육성(肉聲)-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의 전시 오프닝에서 얼굴에 자신의 명함을 덕지덕지 붙이는 퍼포먼스를 하려고 했으나, 미술관 측으로부터 “왜 당신의 얼굴을 가려지게 하는가? 불손하게.”라는 항변을 듣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으며, 나중에 자금성 안에서 비밀리에 행했다. 김석환은 1993년 자금성의 입구에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앉아 있는 해태 석상과 마주 보고 서서 입을 벌리는 퍼포먼스를 하여 한국과 중국 간의 교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승택은 1994년 커다란 짐자전거를 빌려 짐칸에 자신의 작품인 바람빠진 대형 지구풍선을 싣고 천안문 광장을 도는 퍼포먼스를 수행하였다. 1994년, 북경 근교의 만리장성에서 이경근은 검정색 선글라스를 쓴 채 온몸에 신문지를 붙이고 이승택의 대형 지구풍선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는 퍼포먼스를 했으며, 박이창식은 그 옆에서 연신 콘돔을 부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만리장성에 관광차 왔다가 이를 목격한 중국인들은 힐끔거리고 지나치거나 호기심에 다가가 유심히 쳐다보기도 했지만, 공안을 의식해선지 많은 사람이 현장에 모이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12)
Ⅶ.
그동안 퍼포먼스에 관해 많은 기록을 했으면서도 정작 부산의 행위예술은 다를 기회가 없었다. 내 기억으로 80년대에 활동을 한 부산의 행위예술가로는 남순추가 유일하다. 그는 1986년에 서울의 아르꼬스모미술관이 주최한 [86행위설치미술제] 참가를 비롯하여 바탕골미술관 주최의 [80년대의 퍼포먼스-전환의 장](1986), 나우갤러리 기획의 [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그리고 소통](1989) 등을 통해 퍼포먼스 작품을 남겼다.
강한 엑센트의 부산 사투리가 인상적인 남순추는 아주 개성이 강한 작가로 작품 발표회가 끝나고 이어지는 작가들의 뒤풀이에도 참석한 적이 없다. 바탕골미술관 주최의 행사에 참가한 그는 퍼포먼스가 끝나자마자 “서울역으로 간다”는 멘트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러나 퍼포먼스 작업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의 퍼포먼스는 늘 쾌도난마식으로 간단명료했는데, 1989년 나우갤러리의 퍼포먼스 행사에서 그는 직육면체의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도끼로 깼다. 13)
1990년대에 부산에서 활동한 행위예술가로는 이상진, 김춘기, 윤성원을 들 수 있다. 이상진은 일상과 예술의 통합을 꿈꾸는 작가였다. 일상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일상인 플럭서스 풍의 작업을 주로 펼쳐나갔다. 그의 퍼포먼스 작업은 위트가 있고 유머러스했는데, 자신의 상의 속에 옷걸이를 넣어 빨랫줄에 매달리는 형국을 연출한 ‘빨래’(1993)가 대표작이다.
2020년에 작고한 김춘기는 1999년 12월 31일 밤 10시에서 2000년 1월 1일 새벽까지 홍대앞 씨어터 제로에서 열린 필자 기획의 밀레니엄 기념 [난장, 퍼포먼스 페스티벌 1999-2000]전에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다른 작가들의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극장의 입구, 화장실, 로비, 무대 등을 다니며 양면 테이프로 거미줄 형상의 구조물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계속해 나갔다.
1990년대에 이상진과 김춘기는 부산 행위예술의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상진은 2004년의 부산비엔날레에서 행위예술 파트를 기획한 바 있으며, 2010년에는 부산항국제퍼포먼스아트페스티벌을 조직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후의 활동은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 김춘기 역시 부산행위예술가회를 조직하는 등 2010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나 2020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산은 1974년에 [대구현대미술제]를 창설한 대구가 지척이고 바다 건너 일본과 잦은 문화예술 교류를 하면서도 퍼포먼스가 타지역에 비해 활기를 띠지 못한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에 개최된 [부산국제아트페스티벌](부산비엔날레의 전신)의 공식 행사 중 하나인 [행위예술전]이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려 2천년대 퍼포먼스 활성화의 단초가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김광훈, 김춘기, 문정규, 안치인, 이건용, 홍오봉 등이 참가한 이 행사는 마침 열린 국제아트페스티벌의 열기와 맞물려 부산 시민들에게 퍼포먼스의 존재를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14)
이상 간략히 서술한 내용은 이 땅에 처음 퍼포먼스가 나타난 1960년대 후반부터 2000년 밀레니엄 시기 이전까지 행위미술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 외에 자세한 것은 필자가 쓴 다른 글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1차 게재: 아트인컬처, 202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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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퍼포먼스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행위미술 또는 행위예술이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퍼포먼스로 통일해서 사용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미술계에서는 행위미술이란 용어가 폭넓게 사용되고 있고, 또 ‘행위예술’이라고 쓸 경우 범주의 폭이 지나치게 넓어서 음악이나 무용, 연극, 마임 등 공연예술 분야에서 나타난 퍼포먼스까지 망라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2) 각 단체의 동인 명단은 다음과 같다.
‘무’동인: 김영자, 문복철, 이태현, 임단, 진익상, 최붕현 ‘신전’동인: 강국진, 김인환, 심선희, 양덕수, 정강자, 정찬승 ‘오리진’동인: 김수익, 서승원, 신기옥, 이승조, 최명영
3) 윤진섭, <한국의 초기 해프닝(Happening)에 관한 연구>, 행위예술의 이론과 현장, 진경, 2012, 73쪽.
4) RoseLee Goldberg, <Performance Art_from futurism to the present/행위예술-퍼포먼스 아트 미래파에서 현재까지>, 심우성 역, 동문선, 1991, 9쪽.
5) 윤진섭, <저항과 도전, 전위와 실험-변방의 이단아들: 한국 행위미술 50년 약사(略史), 한국 행위미술 50년: 1967-2017 저향과 도전의 이단아들, 도록, 대구미술관, 2018, 27쪽.
6) 윤진섭, <한국의 초기 해프닝(Happening)에 관한 연구>, 예술논문집, 대한민국예술원, vol.49, 2010, 114쪽.
7) 청년작가연립전을 가리킴.
8) 윤진섭, <저항과 도전, 전위와 실험-변방의 이단아들: 한국 행위미술 50년 약사(略史)>, [한국 행위미술 50년: 1967-2017 저향과 도전의 이단아들]전 도록, 대구미술관, 2018, 25쪽.
9) 전시기간은 다음과 같다.
2023년 5월 26일-7월 10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지하 1층, 6,7 전시실
2023년 9월 1일-2024년 1월 7일 솔로몬R. 구겐하임미술관, 뉴욕
2024년 2월 11일-2024년 5월 11일 해머미술관, 로스앤젤리스, 캘리포니아
10) 윤진섭, <저향과 도전의 이단아들, 한국 행위미술 50년사>, Art in Culture, 2018년 4월호, 92-5쪽.
11) 서양화가 김령의 평.
12) 윤진섭,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역사와 비평>, 미술사학보 제49집, 2017년 12월, 19-21쪽.
13) 윤진섭, <부산행위예술약사>, 2022
14) 윤진섭, 부산행위예술약사,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