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미술(Nature Art)’이 말하는 ‘자연’과 그 생태학적 의미〉에 대한 질의문
윤진섭 | 미술평론가
1981년에 창립된 ‘야투(野投)’가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지난 40여 년에 걸친 야투의 활동상을 되돌아보면, 사계절연구회를 시발로 금강국제자연미술전(1991-2001),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2004-), 야투인터내셔널프로젝트(Yatooi, 2011-), 야투국제레지던시프로그램(2011-),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GNAP, 2014-) 등이다.
작은 옹달샘의 물이 솟아 흘러 작은 내를 이루고, 내는 다시 여러 지류들과 만나 강이 돼 바다에 이르듯, 야투 그룹 역시 처음에는 미약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강대해져 이제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문화권의 자연미술 그룹들과 만나 지구촌의 앞날에 대해 논의하는 종주국의 자리에 올랐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분야의 맏형으로서 현재 지구촌이 직면한 다양한 위기적 상황-기후변화, 생태계의 교란 등등-에 대해 보다 면밀하게 연구하여 예술적 대안 모색 내지는 대중의 관심을 촉구하는 역할을 자임함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특히 지난 팬데믹 상황 이후 야투 그룹이 지닌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사례가 속출하였고, 야투의 자연존중 사상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덕목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야투가 올린 성과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생수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태어난 야투가 바야흐로 폐수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야투’의 존립 근거이자 의의이다. 올해 가을로 166회를 맞이한 사계절연구회 활동은 야투의 백미로서 초기의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자연을 접하며 행하는 사계절연구회의 활동은 ‘들에 몸을 던지는(野投)’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자연에 몸을 맡기는, 즉 자연과 같아짐(同化)이며, 자연과 평화롭게 한 몸이 되는 것(同和)을 의미한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데서 오는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그것들이 낳은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훼손된 자연 생태계를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발제자의 <‘자연미술(Nature Art)’이 말하는 ‘자연’과 그 생태학적 의미>라는 제하의 글을 읽으면서 질의자는 발제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발제자가 주목하는 것은 ‘도구’로서의 자연이다. 발제자는 자연의 의미를 근대를 분기점 삼아 그 이전을 “‘인간에게 숭배, 두려움, 경건함, 숭고함, 경탄의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그 이후를 “인간의 문명적 삶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자연으로 구분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구가 파행을 겪으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은 서구제국주의의 발흥과 함께 나타난 계몽주의 사상과 산업혁명 이후인 사실을 상기할 때, 발제자가 후자를 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발제자는 “‘자연’의 반대쪽에 인간을 위치시키는” 인간중심적 시각을 비판하며, 철학적 의미에서 자연의 반대편에 있는 자유의지가 예술의지를 낳았고 “예술가들이 창조와 발전이라는 이념 아래” 방만한 실험을 구가하는 반자연적 행태를 낳았다고 진단한다. 발제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정작 자유(自由)의 궁극적 의미는 도덕적 의지, 즉 자연 세계에 대한 책임이 인간 스스로에게 있다는 자각에 있음을 망각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학적 성찰에 따른다면 분명 ‘자유’안에서 인간의 윤리적 태도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발제자는 90년대 중반에 생태학을 공부하면서 ‘윤리’의 문제에 대해 착안했다고 글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은 시기를 고려해 볼 때 매우 선견지명이 있는 시각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가 직면한 당시의 생태적 상황과 오늘의 그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한 오늘의 관점에서 요구되는 자연미술가들의 윤리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란다.
- 1차 게재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