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현, 실험과 도전의 역사 70년
윤진섭 미술평론가
Ⅰ.
지금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하종현 5975]전(2025.2.14.-4.20)은 어느덧 망백(望百)에 이른 하종현(1935- )의 초기작을 망라한 매우 중요한 전시이다. 전시 제목이 의미하듯 1959년부터 75년까지 하종현의 작품활동을 돌아보는 이 전시는 이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을 대상으로 한다. 1959년은 하종현이 홍대 회화과를 졸업한 해이다. 이번 전시에 같은 해에 그린 자화상 한 점이 출품되었다. 하종현의 경우 구상화를 접하기란 드문 일인데, 젊은 시절의 내면 풍경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자화상 1점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화면 속에서 흰 셔츠를 입은 한 젊은이가 검초록색 배경을 바탕으로 왼편을 응시하고 있다. 약간 마른 편인 얼굴이 길고, 검정 옷을 입은 왼쪽 어깨가 급경사를 이룬 모습이다. 포즈가 얼핏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눈이 작은 반면에 코가 길고 도톰하여 젊은 시절 작가 자신의 모습이 잘 포착됐다.
또 한 점의 자료를 본다. 1963년 <제2회 신상회 공모전>이 열린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실에 걸린 자신의 작품 앞에서 찍은 화종현의 기념사진이다. 석 점의 그림들 앞에서 포즈를 취했는데, 맨 왼쪽에 하종현의 <작품C>(163x113cm,1962)가 보인다. 검정색 신사복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맨 작가가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얼굴에 살이 도톰하게 오르긴 했지만약간 갸름한 게 삼 년 전에 그린 자화상의 모습을 그런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시기는 제2회 파리 청년작가비엔날레(1961)를 비롯하여 제2회 신상회 공모전 출품 등 청년작가로서 도약을 시작하던 때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아카이브 자료 중에서 머리 위에 눕혀져 있는 대형 캔버스 아래서 작업을 하는 모습의 사진이 유독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림의 표면을 응시하며 불로 그을리는 장면이다. 이 시기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하종현이 회화 작업에 기울인 실험의식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또 한 점의 작품을 본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무제A>(1965)다. 전형적인 앵포르멜 스타일로 그린 이 작품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화면의 상단에 나 있는 입술 모양의 형상이다. 실에 유성물감을 듬뿍 묻혀 캔버스 표면에 부착했다. 일종의 꼴라주 회화다. 이 입술을 연상시키는 모양은 이태 뒤에 패턴화돼 <탄생 67> 연작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른바 기하학적 추상의 시작인 것이다. 전후 한국 현대미술사상 기하학적 추상의 대두에서 선두를 차지하는 이 <탄생> 연작에 이르러 비로소 하종현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물론 이는 시대사적 고찰이지만 관용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 이전의 앵포르멜 시기는 김창열, 박서보, 하인두 등 1957년에 창립된 현대미술가협회의 회원들이 주역이었다. 그 앵포르멜(Informel) 즉, 비정형 회화 시기가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작품C>를 통해 살펴볼 수 있듯이, 하종현이 앵포르멜 화풍의 작품을 제작한 것은 나이에서 오는 태생적 한계였다. 1935년생인 하종현과 31년생인 박서보는 불과 사 년의 나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당시 미술 현장에서 우선권을 쥔 것은 박서보(1931-2023) 였다. 이는 전위미술(avant-garde art)의 측면에서 볼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기하학적 추상에 오게 되면 사정이 바뀌게 된다. 자료상으로 볼 때, 하종현의 <탄생>이 처음 모습을 보인 연도가 1967년인 반면, 박서보의 기하학적 추상 작품인 <유전질> 연작이 탄생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68년이었다. 그러나 단색화에 오면 또 사정이 달라진다. 박서보가 1973년에 동경의 무라마쯔 화랑과 서울의 명동화랑에서 <묘법>을 발표한 반면, 하종현이 최초의 단색화적 경향의 작품(<접합>을 제작한 해는 1974년이었다.
Ⅱ.
하종현이 <탄생>을 제작한 1967년은 한국현대미술사상 중요한 전위미술의 열풍이 불던 때였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무, 신전, 오리진 1) 등 세 단체가 연립하여 구성한 [한국청년작가연립전](1967.12.11.-16)이 소공동에 있는 국립공보관 화랑에서 열렸다. 설치와 오브제, 해프닝 일색의 탈평면적 경향이 두드러졌다. <가두시위>,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 ‘무’동인을 중심으로 이 전시 기간에 벌어졌다. 이들보다 선배인 하종현은 이 전시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종현이 본격적으로 전위미술 운동에 뛰어든 것은 그로부터 이태 뒤인 1969년에 <AG>그룹이 결성되면서부터였다. 하종현은 이 그룹의 회장이었다. 이 무렵의 화단 사정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70년대 전위미술의 포문을 연 것은 1969년에 결성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였다. 명칭에서도 보듯이 유난히 전위의식을 강조했던 이 단체는 청년작가연립전이 모태가 되어 결성된 것이었다. 김구림, 곽훈, 김차섭(이상 ‘회화68’), 이승조, 서승원, 최명영(이상 ‘오리진’), 김한, 하종현, 박종배, 박석원, 심문섭, 이승택, 신학철 등이 참여한 이 단체는 1973년까지 모두 세차례의 테마전을 가졌다. 이들은 <확산과 환원의 역학>(1970), <현실과 실현>(1971), <탈관념의 세계>(1972) 등 주제의식이 분명한 전시회를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A,G'라는 동명의 협회지까지 발간하여 이론의 진작에 힘썼다.
“전위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선언문은 당시 이 그룹의 이념이 어디에 있었는지 잘 알 수 있게 해 준다. 김인환, 오광수, 이일 등 미술평론가들과 전위작가들이 연대한 이 단체에 이르러 본격적인 모더니즘 시대의 막을 올리는 전기(轉機)를 이루었던 것이다. [70년, A.G전]에 부친 ‘확장과 환원의 역학’이란 제하의 선언문은 당시 이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2)
실험과 전위로 통칭할 수 있는 70년대 초중반의 상황은 하종현의 이번 전시에서 회화를 제외한 오브제와 설치작품의 시기와 맞물린다. 초기 앵포르멜 회화를 위주로 한 <1부: 전후의 황폐한 현실과 앵포르멜(1959-1965)>과 <탄생>과 <도시계획백서> 연작을 다룬 <2부: 도시화와 기하학적 추상(1967-1970)이 회화를 주제로 삼은 것인 반면에, <3부: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새로운 미술운동 시기(1969-1975)>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실험과 전위’에 해당한다. 전시는 다시 회화로 넘어가 <4부: 접합-배압법(1974-1975)>을 살펴보고 끝이 난다.
Ⅲ.
비록 아트선재센터의 이번 전시가 근 칠십여 년에 달하는 하종현의 전 작업에서 삼분지 일 정도만 보여준 것이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시기의 정수(精髓)들만 골랐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제4부: 접합-배압법(1974-1975)> 이후의 단색화는 어떠한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종현의 단색화가 50여 년간 지속된 긴 흐름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하종현 예술의 기조는 역시 ‘실험’과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종현의 그러한 실험의식을 보여준 대표적인 작품이 <접합 08-101>(마포에 유채, 콜라주, 244X366cm)이다. 2008년에 제작한 이 작품은 그전까지 캔버스의 뒷면에서 성긴 마대 틈새로 유성물감을 밀어넣는 배압법(背押法/뒷누름법)에 의한 <접합> 연작을 마감하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한다는 선언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하종현은 세로 244센티에 가로 366센티에 달하는 대형 캔버스 안에 1974년에 제작한 <접합 74-11>를 뒤집어 놓고 가시철사로 촘촘히 묶어버렸다. 마치 과거를 부정하듯이 결박해버린 것이다. 기존의 미학을 부정하는 하종현의 결연한 전위적 의지가 담긴 이 작품을 끝으로 <이후접합> 연작이 탄생했다.
이때 재등장한 가시철사는 과거 70년대 초반에 하종현이 사용한 주재료 중 하나였다. 당시 하종현은 석고를 비롯하여 신문용지, 목재, 나무판, 로프, 솜, 헝겊, 용수철 등등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 등등 사물의 물성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1972년을 전후한 이 무렵은 이태리에서는 ‘아르테 포베라’가 일본에서는 ‘모노하’가, 미국에서는 ‘미니멀리즘’이 유행하고 있었다. 회화보다는 사물이 작가들의 관심을 더욱 끌었다. 하종현을 비롯한 <AG> 멤버들의 사물에 관심과 물성 실험이 왕성하게 일었다.
<이후접합>의 시기를 연 작품은 <이후접합 10-1>(2010, 캔버스에 유채)이다. 사이즈가 <접합> 시대를 마감한 <접합08-101>과 똑같은 세로 244센티에 가로 366센티의 대작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접합> 연작이 단색에 배압법으로 제작한 것인 반면에 <이후접합>은 다색에 간압법(間押法:사이누름법)에 의한 것이란 점이 다르다.
기실 하종현의 이 새로운 기법은 형태상 1974년의 첫 <접합>으로 돌아간 것이다. 종이에 유채로 제작한 1974년도의 첫 <접합>(120X175cm)은 종이로 싼 여러 개의 나무판자 사이에 유성물감을 넣고 눌러 판자 사이로 비져나온 물감의 표정에 주목한 작품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물감에서 배어나온 기름이 종이에 스며 시간의 아우라를 짙게 풍기는 걸작이다.
하종현의 2008년 <이후접합>은 캔버스의 뒤가 아니라 캔버스의 공간구조에 주목한 작품이다. 시골의 농가에서 흔히 보는 볏광의 구조가 이렇게 생겼다. 추수한 벼를 광에 넣을 때 벼가 찰 때마다 한 칸씩 높이며 칸막이를 쌓아가는데, 완전히 차면 고리를 걸고 열쇠를 채운다 3) . 완성된 모양이 꼭 하종현의 <접합>(1974)과 <이후접합>의 모양을 닮았다. 캔버스의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넣는 <접합>의 배압법이 수수깡을 격자로 묶고 흙을 이겨넣는 전통 한옥의 공법에서 온 것이라면, <이후접합>은 시골농가에서 보는 볏광의 구조에서 온 것이다. 루치오 폰타나가 캔버스의 평평한 면을 면도칼로 예리하게 그어 이면의 공간을 탐색했다면, 하종현의 공간실험은 주지하듯이 한국 전통문화의 자료체에서 온 것이다. 4)
<이후접합>의 시기에 들어서 하종현은 왕성한 회화적 실험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고수해 오던 단색의 제한이 풀리면서 원하는 모든 색이 거침없이 사용되었다. 다색에 대한 실험과 함께 기법과 재료에 대한 탐색이 뒤를 이었다. 각목에 아사천을 감싼 뒤 이어붙여 거대한 하나의 판목(캔버스)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서 비져나온 형형색색의 물감들이 다채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세에 대한 유비이다. 어디선가 하종현이 사물을 놓아준다고 했을 때의 허허로움과 선선함이 행위의 이면에 배어있다 5). 시간이 지나면서 <이후연작>에 거울과 천을 사용한 실험이 수반되었다. 거울은 이번 전시에도 등장한 것처럼 오랜 소재 가운데 하나다.
Ⅳ.
돌이켜 보면 <탄생>(1967) 연작 역시 발상의 측면에서 볼 때 전통에서 온 것이다. 왕골로 만든 화문석이나 바구니 등 민속공예품에서 보는 것처럼 하종현의 이 작품들은 평면 위에 채색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직조에 의한 공간탐색의 의미를 띤다.
<탄생 A.B>(200X300cm,1967), <탄생1,2>(200x300cm,1967)에서 여성의 자궁을 연상시키는 둥근 도형의 원형은 1965년 작인 <무제>이다. 굵은 실에 유성물감을 듬뿍 묻혀 캔버스 위에 붙인 이 꼴라주 작업이 진화한 것이다. 사방연속 무늬의 패턴을 지닌 이 연작은 하종현의 치밀하고도 정교한 성격을 대변한다. 색깔이 다른 캔버스 천을 잘라 직조해 낸 패턴들은 한결같이 계조(gradation)를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기하학적 형태의 사방연속 무늬의 연장이다. 그것은 얼핏 정교한 공예작품이나 타피스트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당시 하종현의 제작 의도가 시지각적 미적 가치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입체적으로 보이는 캔버스의 패턴들이 착시나 허상이 아니라 평면 위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에 있지 않았나 짐작된다. 즉 사물과 시각적 착시에 관한 실험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다음에 주목해 볼 것은 <도시계획백서 67>(캔버스에 유채, 112x112cm, 1967) 이다. 이 작품은 이미지를 둘러싸고 평면과 입체 간의 상이한 관계를 추적한 것이다. 작품의 상단부는 평면, 하단부는 입체로 구성돼 있는 것이 다른 작품과 달리 특이한 점이다. 이 작품은 긴 평면 위에 기하학적 패턴의 도형을 그린 뒤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 천을 밑에서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접다가 점차 간격을 넓혀 중간 부분에 이르러 평면으로 펼친 입체회화이다. 따라서 접힌 캔버스의 부분에 그려진 기하학적 도형은 모습이 가려지거나 어둠 속에 묻히게 된다. 관객은 캔버스의 상단에 그린 기하학적 패턴에 비해 하단의 패턴이 천을 접는 행위에 의해 실제보다 왜곡된 모습을 보게 된다. 하종현의 이 그림은 접힌 캔버스 천의 양태에 따라 빛에 의해 음영이 생기며 그러한 속성이 관객의 보는 관습에 새로운 조건을 재공할 수 있다는 회화적 실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종현의 이러한 실험은 다시 <도시계획백서 68>(캔버스에 유채, 120x120cm, 1968)에 이르면 허상과 평면에 대한 상호관계의 대비로 전개된다. 이 기하학적 추상화는 <도시계획백서 67>보다 한해 뒤에 제작된 것인데, 흰색 바탕 위에 지그재그 형태의 백, 청, 적, 황, 흑의 오방색 띠들을 근간으로 삼고 여기에 약간의 사이색을 넣어 그린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면의 중간을 세로로 가로지른 다섯 개의 넓거나 좁은 그림자가 깃든 막대처럼 보이는(혹은 도시를 상징하는 형광등일까?) 도상의 존재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앞에서 설명한 작품이 시각적 허상에 대한 작가 나름의 입체적 증명이라면 이것은 허상에 대한 부정일까? 즉 캔버스 평면은 오직 평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존재론적 증명에 관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는 흰 막대들을 가로지른 다수의 마름모꼴의 흰색 도형들의 존재 때문이다. 아무튼 이 연작은 <도시계획백서>라는 제목을 참고하고 산업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척됐을 당시의 한국 대도시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하면 그 상징으로 산업화되고 디자인된 도시를 소재로 삼은 기하학적 추상화처럼 보인다.
하종현의 기하학적 추상화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개념적인 측면은 60년대 후반 당시 기하학적 추상의 일반적인 풍경과는 다른 좀 색다른 면모다. 이 시기의 한국 기하학적 추상이 순수기하학적 추상이나 단청을 비롯한 전통의 민속적 소재를 도입한 반면, 일찍 개념의 훈련을 한 흔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하종현의 작업에서 보이는 이러한 면모는 70년대에 접어들어 사물의 물성 실험에 연결되면서 보다 확장된 사고의 진폭을 보여주게 된다.
Ⅴ.
다시 이 전시의 3부로 돌아가자. <3부: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새로운 미술의 운동 시기(1969-1975)는 30대 중반에 도달한 하종현이 <AG>의 회장을 맡아 실험적인 활동을 보인 시기였다. 이번 아카이브 전시에 제시된 4권의 <AG> 잡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공간을 제외하곤 변변한 미술잡지조차 없는 열악한 문화적 상황에서 이 잡지는 미술지식 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 잡지가 상징하는 것은 개념미술이 팽배했던 1970년대의 화단풍경이다. ‘개념’과 ‘논리’로 대변되는 이 시기는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들이 사물의 존재 의미를 물었다. 건축종합예술잡지인 <공간>을 비롯하여 <미술수첩>, <Art in America>, <미즈에> 등등이 미술인들이 즐겨보던 잡지들이다. 일본의 모노하를 비롯하여 미국의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퍼포먼스 등이 빈번히 미술잡지에서 다루어졌다. 조셉 코주스의 <철학 이후의 미술(Art after Philosophy)>이나 이우환의 <만남의 현상학적 서설> 등이 번역돼 전위미술그룹 ST의 스터디 교재로 사용되었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사물과 물성에 더 친근해 있던 시기였다.
하종현의 <작품 72-7>은 두루마리 휴지를 반으로 잘라 양쪽으로 수북하게 펼쳐진 바닥의 부드러운 휴지가 딱딱한 심봉을 품고 있는 듯한 형국의 작품이다. 1972년 작이다. 물성의 대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와 유사한 작품으로는 사각 입방체로 된 실내 건축물의 기둥 주변에 흰 석고가루를 부어놓은 작품인 <관계(Relation/1971)>가 있다. 딱딱하고 견고하며 긴 사각형의 상자 안을 관통하는 구불구불한 가는 밧줄의 표정을 심플한 구조로 제시한 <무제(Untitled, 1972)>도 이번 전시에 출품되었다. 가시철망이 부드러운 솜으로 뒤덮인 사각의 평평한 판재를 격자형으로 감싼 작품 <무제(Untitled, 1973)>와 용수철을 늘려 사각의 판 중간에서 밖으로 빼서 커다란 용수철의 덩어리를 만든, 상황성이 돋보이는 설치작품 등등이 이 시기에 발표된 하종현의 오브제 대표작들이다.
Ⅵ.
1974년에 이르러 하종현의 사물들은 캔버스 평면과 만났다. <접합(Conjunction)>의 시기이다. 앞에서 상세히 밝힌 것처럼 맨 처음에 나무판자와 판자 사이에 주목한 하종현은 이 실험 이후에 곧바로 캔버스의 뒷면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세계미술사에 유례가 없는 배압법의 등장이다. 크고 육중한 각목으로 사각의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마대천을 팽팽하게 맸다. 흑, 백, 베이지, 갈색 등등 원하는 단색의 유성물감을 갠 뒤에 커다란 주걱이나 페인팅 나이프로 물감을 떠서 마대천에 얹고 누르면 반대편에 물감이 송글송글 맺히는데, 거기서 다양한 조형적 실험이 이루어졌다. 하종현의 단색화에서 변화는 주로 색과 운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배압법에 의한 조형실험은 1974년에서 단절을 선언한 2008년까지 약 30년간 지속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2008년부터는 간압법의 시기가 전개된다. 좁은 나무판을 아사천으로 감싸고 그사이에 물감을 넣어 누를 때 나타나는 물감의 표정에 주목한 작품이다.
간압법의 변용은 시간이 흐르면서 판재 위에 붓질이 된 단색의 천이나 다색의 천을 뒤덮는 방법으로 전개되는가 하면, 판재를 사선으로 부착하는 방법 등 다각적인 표현술이 동원되었다.
그렇다면 하종현에게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어느덧 100세를 바라본다는 망백(望百)의 반열에 오른 하종현 화백에게 더 이상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기력이 세 보이는 그는 다시 <접합>으로 돌아간 이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 안에서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어 붓질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70여 년에 가까운 화력을 통해 다양한 미술의 실험을 했고 또 새로운 세계를 찾아 끊임없이 도전해 온 자유인 하종현! 그가 추구하는 세계의 도착지는 과연 어디일까? 이러한 질문이 유효하고 의미가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도전과 실험으로 점철된 그의 삶과 예술이 가져다줄 후배들에 대한 교훈 때문이다. 하종현의 단색화와 다색화의 기나긴 족적은 서로 비슷하리라는 예측과는 달리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다르며 그 안에서 또 다른 실험이 이루어진 다양한 양태를 인식하게 된다. 하종현의 미술을 대하는 태도는 단색화 이전의 물성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로 실험적이며 도전적이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역시 하종현 화백이다!
- 1차 게재: 아트인컬처, 2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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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세 단체의 동인은 다음과 같다.
‘무’동인: 최붕현, 김영자, 임단, 이태현, 문복철, 진익상
‘신전’동인: 강국진,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정찬승
‘오리진’ 동인: 최명영, 서승원, 이승조, 김수익, 신기옥
2)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연구>, 재원, 2000, 93-4쪽.
3) 이때 농부들은 판재의 순서가 헷갈리지 않도록 밑에서부터 일련번호를 써넣었다.
4) 창작 당시 작가의 발상은 반드시 그러하지 않더라도 비평의 근거를 필요로 하는 작품해석과 작가의 발상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도 된다. 창작과 비평은 때로 별개의 문제이다.
5) 자세한 발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능한 한 물질 자체가 물질 그 자체인 상태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말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 -하종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