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기수, 〈Equal-창문〉, 2024-2025, 가변크기, 제공 사비나미술관.
사비나미술관의 대규모 개인전 《색죽(色竹)-비선(飛線)》을 통해서 권기수의 작업세계는 또 한번의 대대적인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전통 동양화의 묵죽을 현대적 색채의 색죽으로 전환시키고, 평면적 회화의 관계가 단일한 서사적 구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의 유기적인 통일성 속에서 전개되는 열린 형식 개념의 전시를 구성했다. 문인화적 개념이 녹아 있던 기존의 주제에서 벗어나―특히 25년 동안 주요 요소로 등장했던 동구리 캐릭터도 등장시키지 않고―오로지 색채와 형태 자체에 집중하여 평면과 설치, 벽과 공간의 해체적 융합, 아날로그적 감성과 디지털적 구성의 유희를 통한 우리시대의 몽유도원을 연출해 내었다.
먹 속에 오채(五彩)가 있다느니, 먹 속에 우주의 모든 색이 들어 있다는 전통적인 먹에 대한 개념을 역전시켜 먹에서 퍼져나온 오방색, 그들 간의 혼색인 오방간색(間色)을 500여 가지의 색으로 변주시킨 그 색채의 조합을 통해 구현된 색띠는 마치 대나무의 마디 무늬처럼 파편화되면서 수묵의 무거운 정신성을 경쾌하게 감각화 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선뜻 그의 작품 속에 만연한 대중친화적인 스토리텔링이나 팝적인 색채를 표피적으로 해석, 단순히 팝아트적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으려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다성적인 공간 속에서 회화와 디자인의 경계, 순수미술과 팝아트 간의 경계에 대한 권기수의 해체적 태도를 간파해야 한다. 팝적인 요소와 디자인적인 요소는 동일시 될 수 없다. 우리 현실 속에서 팝아트라고 규정짓는 주요한 기준이란 거의 애니메이션이나 망가의 생략적인 단순 평면 이미지, 그리고 그로 인해 유추되는 캐릭터의 창조 같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팝아트의 영역을 축소 해석하고, 팝의 전략적인 정치학을 무시한 편견이다. 어찌보면 그것은 문인화의 정신성을 기본 바탕으로 현대적이고 디자인적인 요소를 활용하여 우리시대의 표현방식과 어법으로 표현해낸 우리시대의 메타문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통의 현대화’라는 표현보다는 동시대의 시스템으로 똑같이 만들어진 동시대적 언어의 그림, 다시 말해 현대미술 속에 녹아 있는 전통적인 맥락과 어원을 재발견하는 작업이라고 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버티컬 커튼 월은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다채로운 컬러의 대나무 이미지를 우리 실생활 속에서도 설치 가능한 버티컬 커튼의 양면으로 출력하여 만든 거대한 설치물이다. 일정 시간에 따라 개폐되는 버티컬 커튼이라는 기계적 매커니즘 속에서 색의 죽림은 이곳과 저곳, 안과 밖, 더 나아가 이승과 저승,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열고 닫으면서 경계와 구분, 차이와 구별을 해체하는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구축해나간다. 예로부터 현실과 다른 비현실의 공간으로 작용했던 대나무 숲,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세상을 피해 들어갔던 유토피아의 공간 죽림의 역사적 맥락을 지금 우리의 현실 속으로 끌어온 것이다.
작가 스스로 ‘비선’이라 부른 선은 들뢰즈의 ‘탈주선(line of flight)’ 개념을 착안한 것으로 우리의 전통한옥 처마, 도자기, 버선 등의 상승하는 곡선, 공간으로 연장되며 흡수되는 선의 기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와 너(세계) 간의 경계와 구분을 확실히 하였던 근대적 시선의 분리적·구별적 태도를 해체하는 탈구축의 선을 의미한다. 비선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넘나들고 그 틈새를 만듦으로써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구조 속에서 평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게 도와준다. 근대적 의미의 이항대립적 요소가 비선을 통해 얽히고 뒤섞인다. 형식적이건 내용적이건 살아있는 지금 이곳에 스며든 전통의 중의적 현현. 그것이 전통이 생명력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권기수는 지금 이순간의 한국화의 실존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전통의 정체성과 진실성의 흔적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진정한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지속적으로 꾀하고 있다.
- 이건수(1965- ) 서울대 인문대학원 미학과 석사. 월간미술 편집장, 2014부산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2021·2023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총감독, 세종대 겸임교수 역임. 『혼을 구하다』(컬처북스, 2010), 『Editorial』(북노마드, 2011), 『미술의 피부』(북노마드, 2017) 외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