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메구로 가조엔에 설치된 〈송학도〉 일부
우) 전용복, 〈바람 소리〉, 2022, 패널에 옻칠, 182×182cm, ⓒ 전용복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의 모티브가 된 ‘백단계단(百段階段, 도쿄도 지정유형문화재)’이 있는 메구로 가조엔(目黑雅敍園)이 지난 9월 30일을 마지막으로 휴업에 들어갔다. 1931년 창립자 호소카와 리키조(細川 力蔵, 1889-1945)가 메이지 해운업 거물의 저택을 매입해 만든 화려한 연회장 겸 숙박업소로,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거대한 목욕장처럼 호화로운 장소였다. 일본 전역에서 능력 있는 옻칠 공예가와 일본 화가를 초빙하여 내부를 장식한 메구로 가조엔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숙박하는 것이 일본인의 꿈이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로부터 60여 년 후 1991년 도시계획을 앞두고 ‘백단계단’과 내부를 장식한 예술품만 남긴 채 대규모 재건축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새 건물로 이전하기에 고건축의 옻칠과 회화 등 예술작품은 오랜 세월 동안 낡았고, 목조 건축물에서 잦은 지진을 견디며 약해져 있었다. 이토록 쉽지 않은 예술품 복원이었으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업인 만큼 일본의 수많은 장인이 참여하고자 했고, 그 중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전용복(1952- )이 뛰어들었다. 300대 1의 엄청난 경쟁과 수개월에 걸친 논의 끝에 전용복은 메구로 가조엔의 옻칠 작품 복원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전용복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과거 일본을 오가면서 옻칠 산지와 장인들의 기술을 배워둔 경험을 바탕으로, 메구로 가조엔의 작품은 옛 모습을 되찾아 갔다. 그중 전용복은 처음부터 전율을 느꼈던 작품이 있었다. 나가토(長門) 방을 장식한 〈송학도(松鶴圖)〉였다. 칠흑 같은 검은 바탕에 반짝이는 나전으로 된 소나무와 학이 가득 찬 모습에선, 조선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탐스러운 소나무와 살아있는 듯한 학의 세부에서 주름질과 꺾음질을 사용하는 조선의 나전기법을 발견하면서 전용복은 과거와 만나는 듯했다. 그 미지의 조선 장인은 작품 오른편 아래에 일본 장인인 ‘죽파(竹波)’와 함께 작게 이름이 새겨져 있던 ‘광신(光信)’이었다. 1930년대 조선의 나전칠기는 192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수상을 계기로 수출 주력상품이었고, 조선뿐 아니라 일본 상류층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니 조선 장인이 메구로 가조엔에서 역할을 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 대우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전용복은 일본에서 만난 선조의 흔적에 힘입어 1988년부터 1991년까지 3년여의 시간 동안 한국에서 온 동료들과 함께 메구로 가조엔을 화려하게 수놓은 옻칠 작품을 모두 복원해냈다. 미술품 복원에만 350억 원이 들어간 방대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전용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현대식 설비인 엘리베이터에도 세계 최초로 옻칠을 입혀 그 화려함을 이어갔다. 또한 그간 익힌 옻칠과 나전기법을 활용하여 2층 대회의장 입구에 길이 23.6m의 당시 세계 최대 옻칠 패널화인 〈사계산수화〉를 자신만의 화풍으로 제작하였다. 이후 옻칠 장인으로서 전용복의 위상은 일본에서 높아졌으며, 한국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전용복은 옻칠 장인의 영역을 뛰어 넘어 전통 방식을 지키되, 이를 현대화했다. 엘리베이터나 시계 등의 현대 생활용품에 적용하고 현대미술에 담았다. 생칠에 암채(岩彩)를 섞어 만든 다양한 색을 붓으로 칠한 회화적 표현으로 자연의 움직임을 만든다. 그리고 일본 기법을 발전시켜서 작가가 고안한 구치부키마키에(口吹蒔絵) 방식으로 색면에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을 주어 밤하늘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또한 우리 전통 나전의 주름질과 꺾음질로 생동감있는 갈대의 선과 소나무의 잎을 구현한다. 올해 제자들과 《옻칠 특별한 동행》(7.16-7.21, 갤러리라메르)전을 열었던 그에게 있어 옻칠은 옛 문화가 아니라 현재에도 예술가로 살 수 있게 하는 방식이며, 만년이 가도 남아 미래에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 허나영(1980- )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 충남대와 목원대, 홍익대, 추계예대 등 강의, 한국연구재단 인문학술연구교수, 시각장 연구소 대표. 『다시 쓰는 착한 미술사』, 『모네-빛과 색으로 이룬 회화의 혁명』, 『이중섭, 떠돌이 소의 꿈』 등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