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을 따라가는 여정
이선영(미술평론가)
흔들리는 순간은 대개 멈춤이나 무너짐으로 다가오지만 이영희는 흔들림이 야기한 균열을 길삼아 걸어왔다. 세상은 끼어들 여지가 없을만큼 단단하게 구조지워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어딘가 틈새는 있기 마련이고 이 틈새에서 새로움이 생겨난다. 틈새가 어디서 생길지 모르기에 선형적 논리에서의 새로움과는 다르다. 반복되는 것만이 진실임을 강조했던 반(反)근대주의자인 니이체를 따른다면, 새로움은 직선의 첨단이 아니라 되돌아오는 것, 즉 보편적인 것의 재출현이다. 이영희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대지와 식물 이미지는 보편적이다. 그의 주요 방법론이었던 바느질 또한 옷을 입어야 하는 금기를 가진 인간 사회에서 보편적이다. 이번 전시도 브라운 계열의 대지에 초록 새싹같은 것이 짝을 이루며, 바느질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 기조를 이룬다. 여기에 사천왕상이라는 소재가 새로 들어왔다. 사천왕상이 생겨난 전통의 시대는 자연과 문화가 긴밀한 관계를 이루었다.

두나무아트큐브 갤러리 전시전경(사진 백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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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역사의 새로움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역사 또한 길게 보면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 탈각되거나 찢어진 피부같은 대지는 치유와 생성의 시공간을 도입한다. 이번 전시에서 단편들이 이어져서 만들어진 판의 틈들은 후방의 조명에 의해 빛난다. 틈이 방향성을 암시한다면 별빛처럼 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흔들리는 순간 Follow the crack II)] 전은 ‘틈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작가는 ‘틈과 균열의 자리에서, 삶이거나, 예술이거나 라며 설치 작업을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3D VR 영상을 비롯한 작품에서는 영상과 함께하는 나래이션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드러낸다. 그에 의하면 ‘균열은 상처가 아니라 새로운 통로였다. 닫힌 세계를 흔들어 깨우고, 또 다른 숨결을 불러내는 문이었다.’ ‘흔들림은 춤이 된다. 균열은 길이 된다. 그 길 끝에서, 또 다른 내가 태어난다.’ 틈에서 틈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도약은 필수다. 물론 도약에는 움츠림이 전제된다.
압력을 반등의 힘으로 역전하는 태세는 삶과 예술에서 공통적이다. 균열이 만들어낸 길은 잘 닦인 길이 아니라 끊어질 듯 이어지며 이 과정에서 우연 또한 상당 부분 개입된다. 자동차로 달리지만 걸어서도 가야 하는 예측 불가의 길이다. 작업하는 삶은 어떤 내비게이션으로도 안내받기 힘든 길을 포함한다. 전모를 다 알고는 가기는 힘든 여정에서 우연과 맹목은 배제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 등장해 왔던 자연적 요소와 더불어 틈에 대한 사유는 세계를 불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고대 및 현대의 사상에 닿아있다. 그것은 허공, 생성, 우연, 기원과 목적에 대한 일관성 있는 방향의 거부 등으로 이어진다. 그에 대한 최초의 사상이 고대 원자론이다. 이영희의 전시장에 깔린, 밟으면 먼지처럼 부스러질 바싹 마른 낙엽은 만물이 생겨나고 순환하는 과정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고대의 원자론자들이 존재가 본질적으로 불연속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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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에는 틈이 없지만 불연속에는 그 필연적 상관물로 무(허공)이 존재해야 했다. 그것이 운동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무덤덤한 물질적 입자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햇살 사이로 브라운 운동을 하는 먼지들처럼 운동이 가능한 자유로운 공간이다. 이 공간의 중요성은 허공 속에서 입자들이 춤을 추는 듯한 비전으로 이어진다. ‘원자들이 운동하는 공간인 허공은 ‘안티페리스타시스, 즉 꽉 찬 공간에서 줄지어 일어나는 순간적인 대체 순환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과는 명백히 대립’(장 살렘)된다.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원자론적 사고에서 새로운 세계들은 이제는 사라진, 영원히 분해된 세계들에서 흘러나온 잔해들로부터 형성된다.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원자들의 운동, 복합체 내에서 원자들이 진동하고 서로 충돌하고 되튕기고 이런저런 식으로 뒤얽힌다고 할 때, 원자들과 허공은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는 시작이 없다. 그것은 특권과 관련될 기원에 대한 사유를 거부한다.
기원이 없다면 미리 세워진 의도에 따라 사물들의 본성을 규제한 최고의 지성이 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장 살렘은 이런 철학을 우연의 체계라고 부른다. 역으로 어떤 것도 무(無)로 되돌아갈 수 없다. 원자론에 의하면 물체들은 분해되면서 물질 원소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다. 소멸하는 듯이 보이는 어떤 것도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는다. 이영희의 작품에 편재하는 균열은 원자론의 허공처럼 예외가 아닌 몸통이다. 작품의 몸통은 유기적 전체로 질서 있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편들의 엮임으로 이루어진다. 무엇을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기에 엮이는 방향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매 순간 갈라지는 두 길의 선택은 작업 과정 중에 이루어진다. 자유로운 드로잉 수준으로 그의 모태 언어가 된 재봉질은 엮임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이번 전시에서 벽에 걸린 평면 작품은 배접 광목천 위에 평판 인쇄된 파편화된 흔들리고 초점이 나간 사천왕상의 이미지들을 담은 것이다.


사천왕상은 널리 알려진 도상이고, 굵은 선을 가지고 있지만 사정없이 흔들린 사진의 일부는 거의 추상화같이 다가온다. 하지만 부라리고 있는 눈 부분은 워낙 강력해서 원래의 도상을 의식하고 작품들을 보면 사천왕상을 이루고 있는 풍부한 색감 사이에 빛의 궤적으로 나타나는 점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이러한 흔들림을 통해 사천왕상의 형태가 아닌 그것이 작동하는 순간을 강조한다. 사천왕상은 무엇보다도 제압할 대상을 밟는 동작이 중요하다. 그것이 작동한다면 뭔가 천둥같은 호통 소리와 함께 지축을 울릴법한 진동을 야기하지 않겠는가. 그가 다른 형식을 통해서 사천왕상의 춤동작을 상상한 것도 보다 역동적인 과정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한 컷의 정지된 이미지에서 움직임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원본 사진이 배접 광목천에 옮겨짐으로서 균열과 흔들림은 추가된다. 재봉질에 의한 선은 사진 이미지에 다양한 굴곡을 만든다.
‘솜으로 채워진 천의 굴곡, 울퉁불퉁한 표면은 오랫동안 작업의 토대였던 대지의 질감을 다시 불러온다.’ 단편으로서의 대지는 낙엽처럼 얇고 가벼워 바닥에서 들려지고 벽과 나란히 세워진다. 하나의 판이 아닌 여러 판의 덧붙이기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은 30여년 전의 세월을 견디고 다시 나타나 지금의 단편과 연결된다. 작가는 이전 작품에 대해 ‘시간의 파편들을 덧대고 우려낸 오래전 작업(1995/1997)들은 장막이 되어 흔들리는 빛을 감싸거나 새어나가게 한다’고 말한다. 각각에는 서로를 알아보는 접속의 지점들이 있다. 그의 작품이 지닌 개방성은 작품의 단위 구조가 유연한 점에 있다. 이러한 연결은 그의 작품 내외부에 존재하는 간격들에 의해 가능하다. 주요 직장이 따로 있는 와중에 30여년을 작업을 지속해온 그에게 노동과 예술의 관계는 중요하다. 재봉질은 양자의 관계를 비교하는 좋은 예가 된다. 이영희에게 재봉질은 디자인처럼 특정 기능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자유로운 드로잉같은 방식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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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모든 활동에 일 모델을 강요하는 것, 모든 활동을 가능한 또는 잠재적인 노동으로 번역하는 것, 자유로운 행동을 규율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국가 장치의 일부’이며, 이는 ‘표준적인 인간’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표준적인 인간은 국가주도의 전쟁이나 생산활동에 필수 요소다. [천개의 고원]은 노동과 예술을 두 가지 유형의 천으로 비유한다. 하나는 직물처럼 규칙적으로 짜여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펠트처럼 섬유의 얽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직물과 펠트처럼 직조에 관한 구별되는 두 가지 생각, 나아가서 실천이 존재한다. 이러한 대조에 의하면, 이영희의 바늘로 하는 드로잉은 직물이 아닌 펠트적 방식과 비교된다. ‘권리상으로 무한하며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어 한계를 갖지 않는다. 앞면과 뒷면도 또 중심도 갖지 않으며, 고정된 것과 유동적인 것의 구별도 없으며 오히려 연속적 변주를 분배한다.’(들뢰즈와 가타리)
[천개의 고원]에서는 모든 구체적 형태들의 교차인 ‘고른 판’을 말하는데, 그것은 익명의 물질, 즉 다양한 연결 접속을 행하는 미세한 물질의 무한한 미세 조각들이 서식한다. 고른 판이란 어떤 것이 지지하고 설 수 있는 일관되고 균일한 판으로, 만물의 존재 기반이 되는 내재성의 판이다. [천개의 고원]은 온갖 책략을 이용해 자신의 배치물들을 끊임없이 만들고 해체하는 자연의 판을 말한다. 이 판은 무한하여, 천 가지 방식으로 그것을 시작할 수 있다. 새로운 매체에 접근하는 방식 또한 정석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가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배운 사진은 온통 흔들려있고, AI를 활용한 영상 작품은 불안정하다. 물론 그것은 표현의 방식이지 기술의 미숙은 아니다. 작가는 ‘빛은 흔들리고, 영상은 떨리며, 이 흔들림 속에서 삶이 여전히 진동하는 현재임을 느낀다. 사천왕상의 사진과 영상은 단단한 신체가 흔들리는 불안의 순간을 드러낸다. 고정된 신체를 일부러 흔들며, 단단함의 틈, 믿음의 균열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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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적 인과관계에 기반한 관념을 거부하는 작가는 모니터나 프로젝터로 상영되는 작품의 기계는 반듯한 선들을 낙엽들로 가렸고, 천이나 전시장 바닥재에 직접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을 통해 오래된 필름처럼 스크래치 등이 걸러지지 않고 함께 흘러가게 한다. 이러한 역전(逆轉)은 정보 대신에 잡음을, 코드 대신에 탈코드를, 중심 대신에 주변을 주인공으로 삼는 그의 방식의 연장이다. 탈선이나 변형은 시간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관련된다. 이영희의 작품에서 시간성은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지속으로 대체된다. 순수예술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의 정점에 있는 모더니즘은 지속을 순간의 순수함을 침해하는 불순한 요소로 간주했다. 하지만 제도적 공간 외에는 존속하기 힘들었던 모더니즘은 이후 시간성을 중시하게 된다. 모더니즘에서 예술의 기준은 ‘예술계’(아서 단토)의 인정이라는 관념인데, 이러한 동어반복적 사유가 생겨날 정도로 제도 맞춤형 미학이 모더니즘 아닐까.
예술 또한 사회적 분업처럼 전문적이 되었지만, 분업의 전제인 평등한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순수하고 자율적인’ 예술은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물신숭배에 의존하기까지 한다. 순간만이 가능할 수 있는 미학이 아니라, 시간성을 축으로 가는 예술은 ‘연극적’(마이클 프리드)이다. 이영희는 이번 전시에서 관객은 무대 안으로 끌어들인다. 관객은 구별되는 3개의 공간을 통과하면서 벽과 바닥과 천정까지도 활용한 작품의 세부를 보고 체험하게 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장막같이 드리워진 작품도 걸려 있어 공간의 밝기도 달라진다. 이러한 연극적 장치는 영상에서도, 벽에 설치한 평면 작품에서도 유지된다. 그의 작품 형식은 서로를 참조하는 메아리같은 관계다. 어디가 시점이고 어디가 종점인지를 따지기 힘들다. 흔들림 속에서 그가 건져낸 순간은 흔들림의 멈춤이 아니라, 그 정점이다. 소재에 대한 깊은 탐구는 있었지만, 이내 그것을 지우고, 그 과정 중에 언뜻언뜻 드러난 장면들이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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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부터 출발한 것인지는 암시만 될 따름이다. 작가가 흔들림이라는 교란적인 요소를 적극 끌어안는 것은 삶의 현실을 반영한다. 인간이 ‘생각하는 갈대’(파스칼)라면 흔들림은 변수가 아닌 상수처럼 작동한다. 흔들림 속에서 지속하는 갈대는 어떤 면에서 더 강한 존재다. 작품만큼은 무균 무중력의 시공간으로 밀폐하려는 노력도 있지만, 그만큼 삶의 현실과 진실로부터는 멀어지는 것 아닐까. 물론 그것은 그가 적당히 아마추어적으로 작업을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올해만도 두 번째 개인전을 열만큼 강행군에다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는데도 적극적이다.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에서 보기 힘들었던 유머 코드도 담겨있다. 8분 8초 분량의 영상 작품 [흔들리는 순간]은 올해 전시 차 나간 유럽을 배경으로 VR painting 장비의 ‘path through’ 기능도 일부 활용했는데, 사천왕상에 작가 얼굴을 짜깁기해 여러 상황 속에 놓은 작품은 웃음 또한 흔들림, 그것도 극심한 흔들림임을 말한다.
원래 사천왕상은 잡귀들을 헤치고 나아가야 할 삶에 대한 묵직한 상징이었다. 종교나 미신은 인간의 유한한 존재 조건의 산물로, 현대가 되었다고 사라진 것도 약화된 것도 아니다. 다만 변형된 방식으로 엄존한다. 영상 작품 [흔들리는 순간]에서 절 입구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도입부 나레이션에 의하면 사청왕상은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무너진 사찰과 마음을 복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그것은 전란의 치욕 위에 선 위엄의 얼굴이자 불교 부흥의 상징’이었다. 작가의 조사에 의하면 사천왕상은 2023년 보물로 지정됐다. 구례 화엄사, 여수 흥국사, 보은 법주사 등 8개 사찰의 사천왕상이 그 대상이다. 사천왕상의 발아래에는 언제나 제압당한 자들이 있다. 대부분은 마귀를 밟지만, 외적과 탐관오리 등도 그 대상이었다고 한다. 사천왕상은 그자체로 매력적인 예술적 소재이기는 하지만, 작가에게 독특한 체험을 안겨주었기에 여러 형식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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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법주사에 도착한 후 사천왕상에 대한 인상과 체험에 대해 말한다. ‘그날 밤, 피로에 뒤척이던 나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수리 중인 상은 현실과 환영을 오가며 흔들렸고, 사천왕상의 들어 올린 발끝은 오래 머뭇거리는 떨림처럼 보였다. 밟으려는 결단이 아니라, 밟지 못한 채 멈춘 고요. 그 주저함, 그 흔들림이야말로 내게는 깊은 울림이었다.’ 사천왕이 해야할 주요 임무는 괄호쳐지고, 작가의 상상은 할머니 사천왕상으로 뻗어나간다. 작품 속 법주사 소조사천왕상 스틸 사진은 할머니 사천왕상으로 변한다. 무서운 얼굴, 한 발을 높이 들어 올린 채 굳건히 선 위엄으로 가득한 사천왕상은 유머 감각 넘치는 할머니 사천왕상으로 변주되었다. 할머니 사천왕은 ‘역사의 짐과 시대의 상처를 짊어진, 또 다른 수호자의 얼굴’을 가졌다. 작품 속 할머니 사천왕은 사찰과 나라뿐 아니라 가족도 지켜야 했음을 토로한다. 사천왕이 ‘나는 검을 들었다’고 말할 때, 할머니 사천왕은 ‘나는 국자를 들었다’고 응수한다.
사천왕이 딱딱한 목소리로 ‘너는 왜 밟지 않느냐?’고 물을 때, 할머니 사천왕은 조용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밟는 건 쉽지 않더라. 밟는다고, 부서지지 않거든....여자의 무릎은, 밟으려다 부러지는 게 아니다. 들고 버티다 망가지는 것이다’ 라고 답한다. 여성 특유의 체험이 깃든 이 러한 대화는 할머니 사천왕이 작가와 겹쳐짐을 말한다. 뼈있는 농담을 하는 할머니 사천왕은 유쾌한 요소가 있다. 작품 속 노인은 무기력하지 않다. 그는 자신을 바닥으로 내리끄는 중력에 역행한다. 3D VR 영상으로 제작된 남녀 사천왕상의 세계여행에서는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즐거움을 나누어주는 세상의 수호자가’ 된다. ‘그 틈새로 두 존재는 춤을 추며 멀리 날아올랐다. 법주사의 마당을 넘어, 유럽의 성당 앞에도, 낯선 광장의 소음 속에서도, 양들이 뛰노는 들판에서도 춤은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뒤를 따라 날아 들어갔다. 이상한 나라의 노인 앨리스가 되어, 틈새를 지나 또 다른 세계로 비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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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에 설치된 프로젝터가 바닥을 비추는 작품 [251-Ellipsis](2016)의 영상은 마치 거대한 책이 펼쳐진 듯하다. 10여년 전 작품이지만 전시장 중심에 배치했다. 거대한 책의 페이지 처럼 보이지만 그 안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읽히지는 않는다. 발표 당시에 소책자로도 출간한 작품은 책이라는 형식에 내재되는 명증한 선형적 논리와 거리가 있는 내용과 형식이다. ‘틈을 따라가는 여정’에 호출된 작품으로 ‘말의 파편들로 더듬거리며, 빛 속을 떠돈다’는 점에서 연속적이다. 작품의 내용은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 자기와의 대화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생각이야말로 자신과의 대화이며 그러므로 생각하는 사람은 일인칭인 동시에 이인칭이 된다는 야콥 그림의 말을 단서로 출발한다’고 밝힌다. 인터뷰 내내 ‘youngheelee’는 자신인 동시에 당신이며 당신인 동시에 그녀로 느리게 확장되거나 분절된다. [251_ellipsis]은 더듬거리기와 침묵 사이로 작가의 생각을 슬쩍슬쩍 내보인다.
이번 전시와도 관련되는 극히 몇대목만 원본의 표기법을 살려서 추려 읽어본다; ‘... 세계...가...연속적 스펙트럼이라...쳐요...으...음...스...스펙...트...럼이...늘... 느... 을... 늘...불편하기만 한...걸.요...’ 라는 문장은 그의 작품이 선형적 논리가 아니라 분절과 연결로 이루어진 이유를 밝힌다. 그 결과는 단편의 조합이다. ‘...뜻...깊은 세부...놓쳐버린 부분 ...다른 모든 가능성을 제외하고 남아있는 것... 남아있는...그것이...진실이닷...’ 인간이 언어적 존재라고 할 때 확고한 정체성 또한 언어와 함께 느슨해진다. ‘...정의가 실현되는 것...자신인 동시에 당신이며 당신인 동시에 그녀인 그녀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 ‘정의 구현되는 날...은... 바로...자신인 동시에 당신이며 당신인 동시에 그녀인 그녀의 전성기가 되리라...’ ‘(숨죽이며) 아직...전성기가 안 왔어요...자신인 동시에 당신이며 당신인 동시에 그녀인 그녀가...진...실..이지...’ ‘...미..세...하게... 흔...들거리는... 소.오...리..없...는 반복.. 소...소...리..없...는 무...한... 무...무...한 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