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덕/ 꿈을 부르는, 잊힌 자기를 부르는,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를 부르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꿈꾸는 앨리스의 창. 원주 구도심 학성동에 희망촌이 있다.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이루고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는 마을이기도 해서 희망과 매화를 합쳐 희매촌으로 부른다고도 했다. 지금은 재개발 지구로 지정돼 드문드문 허물어진 판잣집 몇 채가 남아있을 뿐, 이따금 졸지에 살집을 잃은 개들과 길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릴 뿐, 판자촌은 온데간데없고, 찾는 사람도 없다. 희망이 무색한 현실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 강화덕은 그렇게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그곳을 찾았다. 아마도 친근함과 낯설음이 교차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양가적인 정경 앞에서 작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렸다고 했다.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지면서 현실과는 또 다른 이상한 나라를 탐험할 때와 같은, 이상한 마을이라고 생각했다. 마을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여기서 작가는 잃어버린 마을을 되찾아주고 싶었고,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고 싶었다. 동화적 판타지로 상실된 현실을 소환하고, 각색하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싶었다.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을 복원하고 싶었고, 그 사람들의 온기를 되살려주고 싶었다. 부재를 통해 존재(한때 존재했었음)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발에 차였을 크고 작은 돌멩이를 채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밟았을 땅을 떠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깨지고 터진 항아리와 밥그릇을 떠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판잣집을 떠내 판자촌을 복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첫소리로 새벽을 열었을 수탉을 떠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흔적을 떠내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떠내는가. 엠보싱(과 캐스팅) 그러므로 원형 그대로의 요철이 여실한 저부조 형식의 평면 이미지를 떠내는 것인데, 맨땅 위에 한지를 덧대거나 종이 죽을 펴 발라 두드리고 문지르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원래 누워있던 땅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채집된 돌멩이에는 한지를 덧발라 색을 입혔다. 원형이 없는 경우에는 따로 판(목판)을 만들어 원하는 이미지를 얻었는데, 판잣집이 그렇고, 판잣집이 모인 판자촌이 그렇고, 수탉이 그랬다. 판이 있으므로 판화도 가능할 것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향후 추이를 지켜볼 일이다.
그렇게 상실된 마을이 다시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판잣집을 콜라주 해 판자촌을 조성했는데, 어떤 판잣집에는 가녀린 라인 테이프로 가장자리 선을 살리기도 했다. 또 다른 집에는 창으로부터 마치 꿈이라도 꾸듯 노란 불빛이 깜박거리는데, 아마도 꿈꾸는 앨리스의 창이란 주제를 직접적으로 지시하고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해도 좋다. 마을 위에는 목마가 무슨 수호신이라도 되는 양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데, 아마도 상실한 유년의 추억과 함께 마을의 안녕을 비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가 동화적 판타지로 각색한 것이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재개발 현장은 자본주의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닥치는 사회적 현실이며 현장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에 작가는 비판적 메스 대신 안온한 온기를 불어넣어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에서 작가의 따뜻한 심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우호적인 감성과 함께, 가까운 과거 그러므로 근대생활사를 아카이빙하는 작업이라는 실천 논리를 얻고 있는 경우라고도 생각된다.
시간의 껍질. 수북한 낙엽 사이로 샛길이 있다. 너무 좁아 저 길로 지나갈 수 있을까 싶은, 그마저도 가장자리를 낙엽이 덮고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길이다. 여기서 좁은 길은 아마도 삶을 상징할 것이다. 흔히 삶을 한 편의 영화에, 연극에, 그리고 책에 비유하고, 일엽편주 그러므로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외로운 배에 비유하고, 칠흑 같은 우주를 저 홀로 떠도는 운석처럼 고독한 존재에 비유하지만, 삶의 비유로 치자면 단연 길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심지어 영화에는 로드무비라는 장르가 따로 있다). 그 좁은 길 바깥쪽으로 낙엽이 무성하다. 무성한 낙엽이 황혼처럼 무상하다. 시간의 껍질처럼 무심한 시간을 상징하고, 무상한 삶을 상징 한다고 해도 좋다.
이처럼 무상하고 무성한 낙엽 숲 위로 멀찌감치 두 사람이 바위 위에 앉아있다. 서로 의식하거나 쳐다보는 것 같지는 않고, 저마다 자기 생각 속에 빠져있는 느낌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나와 너일 것이다. 나와 또 다른 나 그러므로 자기_타자일 것이다. 사회적 주체 그러므로 가면 주체와 그 가면 뒤에 숨은 억압된 주체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 다 하나같이 머리가 없는데, 한 사람은 종이로 캐스팅한 하얀 돌을 머리 대신 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의 없는 머리 위로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 여기서 순백처럼 하얀 돌은 아마도 현자의 돌을, 현자의 사유를, 현자의 지혜를 상징할 것이다. 최소한 인간의 이성을 상징하고, 이상을 상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또 다른 한 사람의 머리에 자라고 있는 나무는 어떤가. 아마도 생각하는 나무 그러므로 사유하는 인간을 상징할 것이다. 머리를 대신한 하얀 돌도 없는 머리에서 자라는 나무도 사유를,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자체 작가의 다른 평면작업에도 등장하는 반가사유상과 그 서양 버전에 해당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또 다른 형식으로 풀어낸 경우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한 사람이 앉아있는 바위 밑쪽 바닥에 깨진 거울이 널브러져 있다(사실은 포개진 각진 거울이지만). 왜 거울이고, 깨진 거울인가. 거울은, 그리고 깨진 거울은 무슨 의미인가.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억압된 자기, 잊힌 자기, 때로 자신마저도 모르는 아득한 자기와 같은, 자기_타자들이다. 거울 앞에 선다는 것, 그것은 자기_타자(들)와 만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거울은 자기 자신과 만나게 해주는 계기가 되고, 자기반성적인 매개가 된다. 그 거울이 깨진 채로 조각나 있다. 조각난 거울은 조각난 대상을 반영한다. 조각난 자기를 반영하고, 조각난 자기_타자들을 반영한다. 그렇게 조각난 자기 중 진정한 자기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
후기구조주의는 주체는 없다고 했다. 다만, 맥락을 옮겨 다니면서 그때그때 재정의되는 주체 그러므로 맥락적 주체들이 있을 뿐(맥락이 주체를 결정하고, 의미가 주체가 될 때는 그 의미 또한 맥락이 결정한다). 그런가 하면 랭보는, 나는 타자라고 했다. 내 속에 타자들이 살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우연하고 무분별한 타자들의 집이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물었던 리어왕의 절규 이후 되물어진 물음을 묻는다. 반가사유상이 묻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묻고, 머리 대신 하얀 돌을 이고 있는 사람이 묻고, 없는 머리에서 나무가 자라는 사람이 묻고, 깨진 거울에 반영된 사람들(그러므로 자기_타자들)이 묻고,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 묻고, 작가의 작업과 만나는 사람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 모두 묻는 물음을 묻는다.
그렇게 앞으로 작가의 작업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재까지의 과정과 경과만을 놓고 본다면 근대생활사의 복원과 아카이빙을 통해 사적인 기억 그러므로 개인사를 포함한 가까운 역사적 현실을 소환하는 작업, 그리고 시간을 사는 존재의 숙명을 통해 자기 자신(그러므로 존재)의 근원을 묻는 자기반성적인 작업,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지 않을까, 예상해봐도 좋을 것이다. 비록 작가 개인에 연유한 사사로운 작업이지만, 이처럼 사적인 작업이 향후 어떻게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어느 정도 이미 얻고 있는 부분이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