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인경/ 타자의 방, 자기만의 방, 그러므로 어쩌면 타자를 통해 본 자기라는 방 


고충환 | 미술평론가


도시_일상의 삶(2005), 도시_변화 그리고 반영(2006), 도시_시간의 공존(2007), 도시_순간의 지속(2009), 도시_조망과 은거의 풍경(2011), 상상된 기억들(2015), 장소의 기억(2016), 잊혀진 기억(2018), 마침내 드러난 기억(2018), 개인의 방_덧댄 기억(2022), 개인의 방(2012), 타인의 방(2016), 나와 그들의 방(2020), 누군가의 방(2020), 열린 방(2023), 말을 삼킨 방(2025). 

순수한 형식논리에 천착한 추상회화가 아니라면, 주제는, 그리고 제목은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배경이 될 수 있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와 당위를 추적하고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단서가 되어준다고 해도 좋다. 그림과 작가는 다르지만, 유독 그림에 자기를 투사하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이 강한 작가들이 있고, 권인경의 그림이 그렇다. 비록 그림에 작가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그러므로 무형의 주체로서 작가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는 그림인 만큼 작가의 내면을, 그러므로 일종의 마음 풍경을 그려놓고 있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 대상에 자기를 반영한, 그래서 사물 대상을 빌려 자기를 말하는, 그러므로 일종의 사물 인격체를 빌려 자기를 증언하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감각적 현실을 빌려 정작 작가적 현실을 그린, 작가 자신을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좋고, 그런 만큼 폭넓은 의미에서의 자화상을 그려놓고 있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이외에도 이런저런 주제와 제목이 있지만,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와 제목을 간추려본 것이다.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것은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일 수 있고,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첩경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칼 융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했고, 원형적 이미지라고 불렀다.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을 이면에서 지지하는(어쩌면 무의식에서 길어 올려진) 원형적 개념, 원형적 상징, 원형적 이미지라고 해도 좋다. 다른 주제와 제목이라고는 해도 사실상 이런 원형적 이미지를 대리 보충하는 서브 개념들(이를테면 개인적인 서사와 관련된 것들)이어서 그 의미와 맥락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거칠게 작가의 경향을 감각적 현실을 그리는 작가, 사회적 현실을 그리는 작가, 그리고 원형적 현실을 그리는 작가로 구분해 볼 수가 있을 것인데, 작가 권인경의 그림을 보면, 다만 감각적 현실을 참조할 뿐, 궁극적으론 감각적 현실에 투사된 자기 자신의 원형적 현실을 그리는 작가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도시, 기억, 그리고 방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여기에 서사(와 특히 개인적인 서사)가 서브 개념으로 부수된다. 도시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방으로 작가의 작업이 변화해온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도시와 기억과 방이 동시적으로 상호작용하고 간섭되는 유기적인 과정을 개인적이고 존재론적인 이야기가 이면에서 지지하고 있는 서사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도시에서 방을 보고, 방에서 도시를 보는, 도시와 방의 상호내포적인 관계를 기억이 매개하고 있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고, 도시에서 방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기억된 서사(그러므로 어느 정도 각색된 서사)가 지지하고 있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기억이 매개해준 도시, 기억이 환기해준 방을 통해 종래에는 숨겨진 자기, 잊힌 자기, 억압된 자기와 대면하는, 그러므로 일종의 자기_타자와 만나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는데, 작가의 그림에서는 도시를 통해 자기를 보고 방을 통해 자기를 보는, 그러므로 도시와 방이 그런 거울(자기반성적인 거울) 역할을 하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도시를 그리고, 방을 그린다. 도시를 그린 작가의 그림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세대 감정을, 아파트가 고향인 세대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 일반화하기는 좀 그렇지만, 도시와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는 것이 해당 세대 감정의 한 특징일 수 있고, 그 세대 감정은 작가의 그림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도시를 자연으로, 자연을 도시로 받아들이는 세대 감정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도시와 자연이 경계를 허무는 작가의 그림에서 도시는 때로 부감법으로(아마도 산행 중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리고 더러 파노라마 시점으로 도시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아파트를 전면화하면서 아파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방을 파고드는, 영화에서의 줌인 기법을 예시해준다. 모르긴 해도 전에 없던 매체(이를테면 드론과 같은, 그리고 고화질의 카메라와 같은)의 등장으로 시점의 확장과 다변화가 가능해진 점도 작가의 그림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도시 그림은 도시를 조망하다가, 아파트를 전면화하다가, 그리고 종래에는 방을 파고드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고, 방을 파고들면서부터 심리적이고 존재론적인 서사에 더 집중하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도시를 조망한 그림이 시점과 관련한 흥미를 보여주고 있다면, 아파트를 전면화한, 아파트의 벽면처럼 평면화의 경향성이 강한(큰 평면 속에 작은 평면들이 모나드처럼 심어진, 그 자체 모더니즘의 평면화의 경향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그림에서 작가의 관심은 구조로 옮겨간다. 그리고 방을 파고들면서 구조가 해체되고 서사가 강조된다. 개인적인 서사 여하에 따라서 견고한(결정적인) 구조가 해체되고, 편집되고, 재구조화되는 것인데, 객관적인 구조가 주관적인 해석의 대상으로 흡수되면서 재편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되겠다. 객관적인 현실에서 회화적인 현실(작가의 상상력으로 지어낸 현실, 각색된 현실, 아니면 기억된 현실)로 이행하는 과정을 예시해주고 있는 이 일련의 그림들이 소위 도시 회화, 도시풍경, 도시 진경, 도시 산수로 명명되는 회화적 형식실험과 관련이 깊고, 관련해서 작가는 한때 치열했던 이력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객관적인 구조가 해석을 매개로, 기억을 매개로 재편되고 재구조화되는 과정을 예시해주고 있는데, 그 예시를 견인하는 것이 방이다. 작가의 도시 그림은 어쩌면 이런 방에 도달하기 위한, 집에 이르기 위한, 그 집에 사는 사람에 도착하기 위한, 그러므로 자기에 다다르기 위한 여정이였고 과정이었다고 해도 좋다. 이처럼 도시를 소재로 한, 그리고 방을 그린 작가의 그림이 친근하고 낯설다. 알만한 모티브들이어서 친근하고, 알만한 모티브들이 의외의 방식으로 배치되는 구조가 낯설다. 이를테면 도시 한가운데 방에서처럼 놓여있는 빈 의자가 그렇고, 방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이 그렇다.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상호 간섭하고 매개되는, 그 자체 제3의 현실이라고 해도 좋을 또 다른 현실이 생성되고 창출되는 현장이라고 해야 할까. 감각적 현실 위로 기억된 현실이 소환되고, 과거가 현재의 층위로 포개지는, 그렇게 시공간이 재편되고 재구조화되는 극적 현장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방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나를 고립시키면서 보존(보호)하는 것이 그렇다. 나의 방은 안전하지만 너의 방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대상인 것이 그렇다.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라고는 했지만, 분열적이고 자기 분열적이라고 해도 좋다. 방이 곧 나고, 너다. 결국 방을 그린다는 것은 이런 분열적 자기, 분열된 자기, 그러므로 자기_타자를 인정하고 보듬는 일이다. 그렇게 도시를 소재로 한, 특히 방을 그린 작가의 그림은 억압된 자기, 잊힌 자기와 만나게 해준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고서 콜라주(시간을 소환하기 위한)와 동시성의 표현(시간이 포개지는), 그리고 고지도의 다시점 혹은 평면 시점(확장된 시점과 관련된. 그 자체 어쩌면 드론의 눈을 선취하고 있는)의 차용이 전통적인 회화 문법을 재사용하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점도 주목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