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운/ 연대, 너에게 가는 길, 나에게 이르는 길 


고충환 | 미술평론가


나는 미래의 우리가 인간의 도구화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나는 전시를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에서 (저마다) 자신의 삶을 마주하기를 바란다...나는 예술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 노트

작가 김여운의 작업은 인간의 도구화에 반대하는 실천 논리에서, 존재의 삶의 현실을 반영하는 참여미술에서,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도구로서의 예술을 실천하는 것에서 예술의 존재 의미를 찾고 당위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상황주의 미술(기 드보르), 행동주의미술, 그리고 정치미술에 접맥된다. 특히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여전한 신념과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토피아와 함께 이상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도구화와 관련해서 누구든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를 떠올리게 된다. 거대한 기어에 맞물려 돌아가는, 한갓 기계 부품으로 전락한 인간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의 노동이 어떻게 소외되는지 예견한 마르크스의 <소외론>에 대한 반응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아마도 자본주의가 인간의 노동을 도구화하고,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신념을 도구화하고(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호명할 때, 개인은 비로소 주체로서 성립한다고 했다), 첨단의 미디어가 인간의 자유를 도구화하는 작금의 현실에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변혁의 도구로서의 예술이 요셉 보이스의 사회 조각(소셜 스컵쳐)을 떠올리게 된다. 예술을 교육과 계몽의 수단으로 본 것이며, 사람들의 의식을 조각하는 것, 그러므로 사람들의 의식을 개조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본 것이다. 

의미론적인 측면에서 그렇고, 형식적인 면에서 보자면 이런 이상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실현(재연)하기 위해 작가는 이런저런 개념적 도구(장치)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념미술과 설치미술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런 이상주의자로서의 예술관이며 실천 논리를 실제 전시(그리고 작업)를 통해서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를 보자. 핀 조명으로 집중력을 높여주고 있는, 마치 연극무대 같기도 한, 어둑한 공간에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액자 속에 턱없이 작은 크기의 배지가 부착돼 있고, 그 아래로 아마도 배지의 내용에 해당할 영문자가 아로새겨져 있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상호보충적인 의미기능을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심장에 뿌리를 박고 피를 양분 삼아 자라는 새싹으로 사랑을,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 형상으로 공감을, 서로 맞잡은 두 개의 손으로 연대를, 퍼즐 맞추기로 포용을(퍼즐 조각이 아무리 많아도 꼭 맞는 자리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마다 저만의 위치가 있음을 암시하는, 그렇게 저만의 위치를 지킬 때 비로소 타자에 대한 포용도 가능해진다는 의미로 읽히는), 나뭇가지에 앉은 새로 이해를(인간과 새의 차이만큼이나 주체와 타자의 차이도 크다. 그러므로 이해란 다름 아닌 그 차이를 인정하고 극복해가는 과정임을 암시하는), 작은 배로 인간다움을(나에게 배가 있다면, 물에 빠진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그리고 새싹을 보듬어 키우는 손으로 이타주의(이타심)를 표현했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흔히 그렇듯 공적이거나 상업적인 배지를 차용했다기보다는 사랑과 이해와 연대와 같은, 작가가 생각하는 삶의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을 배지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고 보면 되겠다. 일종의 개념 배지라고 해야 할까. 표면적으로는 사랑과 이해와 연대의 필요성을 새삼 강조한 것이면서, 동시에 실제로는 사랑도 없고, 이해도 없고, 연대도 없는 시대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읽힌다. 작가의 이상과 시대적 현실이 충돌하는, 양가감정을 표현해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여기에, 앞서 배지의 크기가 턱없이 작다고 했다. 실제로는 실물 크기 그대로라고 했다. 여기서 실물 그대로는 배지의 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수 놓은 자수로 만든, 배지 자체라고 생각했다. 빛에 반사되는 색감이며 색실의 질감이 그대로 만져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미지가 그랬고, 텍스트가 그랬다. 영락없이 그래 보였다. 그런데, 자수가 아니라고 했다. 일일이 세필로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캔버스의 표면을 찢고 그 벌어진 틈으로 고개를 내민, 새싹이며 풀잎을 그린 전작에서도 그랬다. 크기가 그랬고, 영락없음도 그랬다. 전작이든 근작이든 화면과 비교해 턱없이 작은(실제로는 실물 그대로의) 크기도 그렇거니와 하나하나 세필로 그린 것이 노동의 집중도를 높여 예술의 경제화(예술의 효율을 극대화하는)를 실현해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관련해서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오브제를 넘어, 오브제 회화를 넘어) 일상적인 존재 자체가 되기를 의도했다고 했다. 재현된 현실이 아닌, 현실 자체를 제안한 것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비록 재현된 현실이지만, 사실은 현실 자체로서 추체험 되기를 바랐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현실 자체와 재현된 현실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고 재정의하려는, 작가의 또 다른 기획의 한 축이라고 해도 좋고, 그런 만큼 향후 작가의 작업에서 그 전개를 지켜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평면작업과 함께, 일련의 설치작업이 있다. <너에게로 가는 길>, <이해>, 그리고 <너의 변수를 대하는 나의 자세>와 같은 작업이 그렇다. 

먼저 <너에게로 가는 길>을 보면, 무대를 가로지르는 길의 중앙에 게이트가 서 있다. 세로로 길게 서 있는 게이트 상단에는 천이 덮여 있는데, 그 천에는 각 너에게로 가는 길, 우리에게로 가는 길, 그리고 나에게로 가는 길이라는 영문자가 자수로 수놓아져 있다. 길의 양쪽 끝에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걷다가 게이트의 발판을 딛고 서서 포옹하면 종이 울리는, 그러므로 혼자서는 종을 울릴 수 없는,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를 위한 설치작업이다. 너에게로 가서 우리를 이루는 길이 결국 나에게 이르는 길이라는, 너를 향한 이타심이 결국 나를 찾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게이트는 그 길에 이르는 과정에서 거쳐야 할 너라는 관문을, 우리라는 통로를, 너와 나를 가르는 경계를 상징한다. 작가는 감지 센서와 같은 자동장치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철저하게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이 설치작업을 만들었는데, 인간의 도구화에 반대하는 평소 관념이 반영된 것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 

그리고 <이해>를 보면, 반쯤 누워있는, 비스듬하게 서로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두 개의 의자가 있다. 의자 위에는 각 Under와 Stand라는 영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작품의 주제와 쓰임새를 말해준다. 두 사람이 서로를 믿고 힘의 균형을 유지해야만 앉을 수 있는, 그러므로 혼자서는 앉을 수 없는 상황 논리를 표현하고 있는 설치작업이다. 이해란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삶이란 기우뚱한 와중에 중심을 잡고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라는, 김지하의 <기우뚱한 균형>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되는 작업이다. 

그리고 <너의 변수를 대하는 나의 자세>를 보면, 변수를 상징하는 큰 공이 매달린, 그리고 반대편에는 우리라는 영문자가 새겨진 작은 접시가 매달린, 저울이 있다. 저울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긴 나무막대의 양쪽 끝에 공을 매달고 접시를 매달아 놓은 아날로그 방식의 조형물로, 역시 인간의 도구화에 반대하는 작가의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저울 중간 아래쪽에는 좌대가 있고, 좌대 위에는 작은 조약돌이 담긴, 너라는 영문자가 새겨진 접시가 올려져 있다. 너라고 적힌 접시에 담긴 돌을 우리에 해당하는 접시에 옮겨 놓으면 균형을 유지할 수도, 힘의 균형을 우리 쪽으로 기울어지게 할 수도 있는, 역시 관객이 참여해야만 의미가 작동하는 설치작업이다. 사회적 현실에는 개인을 억압하는 예기치 못한 허다한 변수들이 있고, 그 변수에 대응하기에 개인의 힘은 너무 미약하지만, 너의 참여로 우리가 연대하면 마침내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 역사적 인식과 이데올로기로 대변되는 거대 담론(큰 이야기)의 시대가 가고 개인적인 서사(상상력을 포함한)와 사사로운 이야기에 바탕을 둔 미시 서사(작은 이야기)가 시대의 주류로 부상하는 시대에 인간성에 대한 여전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는, 예술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입장은 새삼스러운 만큼이나 그 의미가 오히려 크게 와닿는 부분이 있다. 

한편으로 이런 인간성에 대한 신뢰에 바탕 한 이상주의자로서의 면모는 주제에서도 확인되는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너에게로 가는 길(2025),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하여(2024), 그리고 너의 변수를 대하는 나의 자세(2023)와 같은. 주제에는 하나같이 내가, 네가, 그리고 우리가 등장한다. 나는 네가 없이 설 수 없고, 너는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정의될 수 있다. 그렇게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증명하는 관계 속에서 우리라는 관계가 비롯한다. 그리고 마침내 연대도 가능해진다. 그렇게 작가는 관계성 상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인간관계의 상실이라는 징후와 증상을 앓는 시대에 다시금 관계의 회복 가능성을 묻고 연대의 가능성을 묻는다. 

그리고 너에게로 가는 길은 우리를, 관계를, 연대를 전제로 나에게로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타자와의 관계 그러므로 이타주의를 매개로 자기 정체성을 묻는 것인데, 여기에는 진정한 자기(불교에서의 진아)를 찾는 자기반성적 사유가 있고 실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