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희/ 말을 통해 본 존재, 존재 자체, 존재다움


고충환 | 미술평론가


아무런 이치도 없는 혼돈의 세계야말로 세계 존재의 진정한 이치이고 도이다...혼돈은 존재의 근원을 의미한다...진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 존재를 알아가는 것이 내가 작업하는 이유다...나란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존재 물음에 대한 사유는 혼돈을 거쳐, 고정된 자아나 주체란 없으며, 자아란 늘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 그림은 존재 물음을 향한 외침이다.
- 작가 노트

거칠게 말해 감각적 현실을 그리는(재현적인 회화), 사회적 현실을 그리는(현실 참여를 지향하는), 그리고 원형적 현실을 그리는(존재론적인 회화) 작가들이 있다. 그중 작가 이자희는 원형적 현실을 그리는 작가에 가깝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관념으로, 신념 그러므로 태도로, 때로 이미지의 형태로 표출되는)을 원형이라고 했고, 원형적 이미지라고 불렀다. 집단무의식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비록 개인에서 비롯한 것이라 해도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보편적 사실이며 현실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고, 또한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존재의 근원(그러므로 원형)을 묻는 물음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그 물음을 매개하는 것이 개인의 기억이고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인 만큼, 마치 기억과도 같은, 존재의 흔적과 자국 그리고 얼룩이 떠올려주는(한때 존재했었음을,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 자체를 떠올려주는) 상기와 암시가 결정적이다. 예술이란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작가의 그림에서는 말을 통해서 존재를 암시하는) 기술이라는 폴 클레의 말과도 통하고, 그런 만큼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라는 정의와도 통하는 대목이다. 

그렇게 작가는 무의식이라고 해도 좋을, 아득한 기억을 좇아, 비정형의 우연한 얼룩과 자국과 흔적을 매개로 자기의 원천을 묻고 존재의 근원을 묻는다. 그 물음은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라는 정의와도 통하고, 작가가 지향하는, 그리고 실제로도 작가의 그림에서 확인되는 부분이지만,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회화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좀 극적으로 말해, 거대 담론이 가고 사사로운 이야기, 작은 이야기에 바탕 한 미시 서사가 떠오르는 시대에 새삼 존재를 묻고 자기를 묻는 정체성 담론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 역설적인 현실을 증언하고 있는 만큼 오히려 그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순수한 형식논리에 천착한 추상미술이 아니라면, 주제는 그리고 제목은 작가의 회화를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배경일 수 있다. 의미론적으로 작가의 그림을 한정할 수 있다는 지적에 일정 부분 수긍하면서도, 어느 정도, 때로 상당할 정도로 작가의 그림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단서이며 첩경일 수 있다. 작가의 경우를 보면, 존재 물음이라는 일관된 주제 의식을 Chaos와 Becoming, 우리 말로 풀면 혼돈과 되기라는 부제로 뒷받침하고 있다. 각각 혼돈과 되기의 실천 논리를 매개로 존재를 묻는 작업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혼돈은 무엇이고, 또한 되기는 무엇인가. 이를 통해서 작가는 무엇을 의미하고 의도하는가. 작가는 혼돈이 존재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무런 이치도 없는 세계가 혼돈이라고 했다. 아무런 이치도 없는 세계? 아무런 구분이 없는 세계다(노자). 스스로 그러한, 존재 자체만으로 당위를 얻는 세계다(자연). 존재가 존재다움을 얻는 세계다(하이데거). 상상계다(자크 라캉). 코라다(줄리아 크리스테바). 판단중지 그러므로 현상학적 에포케다(메를로 퐁티). 개념 이전의 세계 자체다. 개념이 없는 존재 자체다. 그렇게 작가는 이미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개념이 있는 자기로부터 개념이 없는 자기를, 개념 이전의 자기를, 원형적인 자기를,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_타자를 분리하고 대상화한다. 분리하면서 합체되는, 분리되면서 합치되는 자기를 묻고 존재를 묻는다. 이로써 어쩌면 잃어버린 자기(그러므로 분열된 자기)를 되찾는 기획을 겨냥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혼돈이 그렇다면, 되기는 또한 어떤가. 되기는 말할 것도 없이 질 들뢰즈(앙띠 오이디푸스라는 저작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에서 온 말이다. 다르게는 척하기, 모방하기, 흉내 내기를 의미한다. 체제 순응적인 척하면서 체제를 속이는, 궁극적으로는 체제를 전복하는 전략이다. 관습 순응적인 척하면서 관습을 속이는, 이로써 관습을 수정하고 재정의하는 전략이다(롤랑 바르트는 관습 그러므로 상식이 중산층 계급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계급 이데올로기라고 정의한다). 작가의 그림에 적용해 보면, 말인 척하면서, 형상에 대한 선입견을 속이고, 그 이면에서 자기를 그리고 존재 자체를 슬쩍 밀어 올리는 전략이다(작가의 그림에서 말은 말이 아니다. 작가의 자화상이면서, 존재 일반의 초상이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되기는 시제로 치자면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항상적으로 여기서 저기로 가고 있는, 이행하고 있는, 움직이고 있는, 그러므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의 상태를, 무/비규정적인 존재의 실천 논리를 의미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보자면, 말에서 말이 아닌 다른 존재 방식을 향해 이행하고 있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말이 아닌 다른 존재 방식을 향해 열려있는, 그러므로 차이(말이 아닌 다른 무엇)를 생성하는 반복(다만, 말처럼 보일 뿐인)을 향해 열려있는, 그런 만큼 말이라는 개념으로 붙잡는 순간 그 개념 바깥으로 탈주하고 마는, 그런, 무규정적이고 비규정적인 존재의 상태를, 그러므로 생성하는 존재의 상태를 지시하는 개념이다. 그렇게 작가는 혼돈과 되기, 그러므로 존재의 처음과 지향을 매개로 그 자체 일종의 생성 회화로 정의해도 좋을, 그런, 생성하는 존재의 상태를 그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고많은 소재 중에 말인가. 말은 작가에게 무슨 의미라도 있는가. 아마도 말로 표상되는 고고한 선비 정신에 공감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천마와 페가수스로 대리되는 자유 영혼에 공감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혹, 채찍을 맞고 쓰러진 말의 목을 부둥켜안고 운 이후 광기에 사로잡힌 니체의 일화에 반영된 이성의 죽음 그러므로 학문의 죽음에, 그리고 광기의 소생에 공감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디오니소스 이후 광기는 예술과 관련이 깊고, 정신분석학적으로도 욕망 그러므로 리비도와 관련이 깊고, 여기에 논객으로 치자면 미셸 푸코와 질 들뢰즈와도 관련이 있다). 

선입견이 있어서 그렇지, 작가는 말을 재현적인 방식으로 그려놓고 있지는 않다. 다만 저게 말이지 싶은, 최소한의 암시적인 방식으로만 그려놓고 있다. 그런 만큼 그림에서 말의 형태가 분명하지는 않다. 그리고, 붙이고, 긁어내고, 덧바른 흔적이 여실한, 마구 그어 내린, 화면을 가로지르는, 폭력적인, 드로잉을 떠올리게 만드는 거친 선들이, 중력을 따라 흘러내리다 아무렇게나 멈춘, 우연한, 즉흥적인, 알 수 없는 얼룩이, 흔적이, 자국이 만드는 비정형의 화면이, 파토스의 무분별한 분출과 자기실현을 보는 것도 같은 격렬한 화면이 표현주의를 떠올리게 하고, 추상표현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몸이 가는 대로 그리고, 감각이 부르는 대로 그린, 그런, 몸 그림을 떠올리게 만든다. 여기에 비정형의 패턴으로 나타난 덕지덕지한 부분도 눈에 띄는데, 콜라주와 데콜라주가 만들고 남긴 흔적이다. 정형의 패턴이 통일성을 위한 것이라면, 작가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비정형 패턴은 이런 통일성을 해체해 우연하고 무분별한, 유기적인 생명력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콜라주를 위한 재료로는 자신이 직접 그린 먹그림의 조각 부분이, 특정 활자와 이미지가 프린트된 인쇄물과 같은 생활 오브제가 혼용되는데, 아마도 사회적 주체를,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붓질과 같은 회화적인 과정과 함께, 이런 평면 오브제를 자르고 붙인 화면에는 크고 작은 면들이 부유하는데, 화면 안쪽의 소실점으로부터 화면 바깥쪽으로 확장하는 것도 같은 선들이, 면들이 건축 설계도를 보는 것도 같고, 청사진을 보는 것도 같다. 일부 그림에서는 소재로 도입된, 기계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러므로 기계주의를 떠올리게 만드는, 말의 형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도 같다. 이처럼 크고 작은 면들로 해체되고 재구성된 말의 형상이 미술사적으로 미래파를, 입체파를, 그리고 초현실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동양과 서양의 미술사적 성과를 하나의 화면에 융합하는, 그런, 형식실험에 몰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에 추상과 형상,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형식실험에 몰두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니체는 예술의 원동력으로 각각 우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들고 있다. 자기 내면에 질서의 성좌를 구축하려는 욕망이 아폴론적 충동이라면,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건강한 생명력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분출로 특징된다. 그중 작가의 그림은 디오니소스적 충동의 소산에 가깝고, 생명력의 자기실현에 바탕 한 만큼 생명주의 그러므로 바이털리즘에 경도된 부분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말의 감각적 형상을 빌려, 개념 이전의 존재 자체를, 생명 자체를,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자연 상태를 그려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