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강/ 경계를 여는, 그렇게 또 다른 현실을 여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사람들은 삶을 연극에 비유하고, 영화에 비유하고, 책(보르헤스의 도서관)에 비유한다. 일엽편주 그러므로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외로운 배와 같은, 칠흑 같은 우주에 던져진 미아와 같은, 고독한 존재(하이데거의 세계에 던져진 존재)에 비유한다. 그리고 여행과 여로에 비유한다. 저마다 목적지가 있을 것이지만, 종래에는 결국 자신에 가닿는, 잊힌 자기, 아득한 자기, 억압된 자기, 때로 자기 자신조차 모르는 자기 그러므로 자기_타자에 이르는 길에 비유한다. 예술은 이러한 비유와 관련이 깊고, 특히 자기 자신과 만나는 자기반성적인 과정 그러므로 길과 관련이 깊다. 영화에서의 로드무비가 그렇고, 문학으로 치자면 성장소설이 그렇다.
그리고 이재강의 그림이 그렇다. 잊힌 자기, 아득한 자기, 억압된 자기, 때로 자기 자신조차 모르는 자기 그러므로 원형적 자기(칼 융의 원형적 이미지)에 이르는 먼 길을 떠나고, 그 길 위에서 추수된 자신의 조각들을 그린다. 삶이 그렇듯 어떤 전제도 없이 시작하고, 그리는 과정에서 형상이 찾아지는, 어쩌면 그 자체 생성회화라고 해도 좋을, 그런, 그림을 그린다.
작가의 근작은 말년의 마티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를 바탕으로 회화로 발전한, 그러므로 본격적인 회화를 위한 스케치 같고 에스키스 같은 색종이 구성에서 비롯했다. 그런 만큼 색종이 구성으로 나타난 하나의 형태가 다른 다양한 형태의 회화로 변주되는, 일련의 시리즈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형식적으로 그렇고, 내용적인 면에서 작가는 이스라엘 성지 순례에서 받은 인상을 이미지로 옮겨 그렸다. 비록 성지 순례의 형식을 빌린 것이지만, 어느 정도 그 과정에서 잠재적인 자기, 영적인 자기와 같은 또 다른 자기를 찾아 나선 여정이었다고 해도 좋다.
그림을 보면, 언덕 아래쪽으로 갈릴리 호수가 보인다. 언덕 위에 서서 두 손 벌려 춤추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십자가가 변형된 형태 같기도 한 형상이 보이는데, 작가 본인일 수도 있겠고, 초월적인 존재의 알 수 없는 몸짓일 수도 있겠다. 작가 자신의 신앙 고백을 표현한 것일 수도,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은총)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교회 혹은 회당 그러므로 기도하는 집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품고 있는 언덕을 중심으로 한쪽에 갈릴리 호수가, 그리고 맞은 편 다른 한쪽에는 키 큰 나무가 서 있는데, 아마도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종려나무일 것이다. 종려나무는 다른 그림에서 일종의 시간 기둥으로 변형되기도 하는데, 반투명한 튜브에 흐르는 시간 속을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것이 보인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 있는데, 하늘로 올라간 숨들을 상징한다고 했다. 아마도 승천한 선한 영혼들을, 영적 존재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알 수 없는 그리고 우연한 비정형의 얼룩과도 같은 색감과 질감 위로 엷은 한반도 이미지가 보이는데, 작가의 현실 인식과 함께 존재 확인(이를테면, 네가 어디에 있든지 항상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편재하는 신의 말씀)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그림은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점차 형상이 희미해지고, 다만 신의 은총과도 같은 알 수 없는 분위기(신의 아우라)로 은근하다. 그렇게 형상과 추상의,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가, 감각적인 현실과 비감각적인 현실이 경계를 허무는 일종의 혼성회화가 실현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의 와중에 얼핏 어떤 화음(영적인 소리)이 들려오는 것도 같은데,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을 부르는, 이를테면 시각이 청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감각이 예시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영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환기되는 것에서 일종의 영성주의에 기울여진 작가의 관심사가 형상을 얻고 있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영성주의와 무관하지 않은 그림으로,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요동치는 가슴을 풀어낸, 머릿속 피의 흐름을 표현한 그림이 있다. 요동치는 가슴이나 머릿속에 흐르는 피의 흐름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을, 내적 파토스의 자기실현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우연한 존재와 생명 있는 존재에 바쳐진 생명 예찬을, 바이털리즘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한눈에도 추상화의 경향성이 뚜렷한, 보기에 따라선 추상표현주의와 특히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붓질을 수도 없이 반복 덧칠해 그린 그림들에서 작가는 비록 요동치는 가슴이나 피의 흐름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요동치는 가슴이 무색하게 담담한 내적 침잠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다. 피의 흐름이 무색한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분위기의 그림이다. 마치 쓸 것도 없는데 계속해서 마른 마당을 쓰는 스님의 빗질과도 같은,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붓질로 자신의 마음을 쓸고 마음속 번민을 쓸어내리는, 그런,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자기 속에 요동치는 가슴을 숨겨놓고 있는 관조적인, 그리고 명상적인 그림이 정중동으로 나타난 생명의 자기실현을, 존재의 존재 방식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작가가 꼬물이 회화라고 부르는, 아마도 작가의 작업에서 전형적인 경우라고 해도 좋을 일련의 그림들이 있다. 멀리 산 능선이 보이고, 파란 하늘이 보이고, 노란 들녘이 보이는, 그리고 해바라기와 같은 알만한 형상이 보이는 그림이 얼핏 풍경을 연상시키지만(작가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풍경으로, 심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타다 만 초가 보이는(아마도 기원을, 기도를 상징할, 아니면 시간을 상징할 수도 있을) 그림이 정물이 있는 풍경을 떠올리게도 되지만, 알만한 형상은 다만 거기까지다.
이런 알만한 풍경을 배경으로 그 위에 한눈에도 알 수 없는, 암시적인, 반추상적인(아니면 마찬가지 의미지만 반구상적인) 형태들이 꼬물거린다. 이를테면 꽈리 같기도 하고, 꽈리가 터지면서 그 속 알맹이를 드러내 보이는 것도 같은, 꽃봉오리 같기도 하고, 만개한 꽃잎을 절개한 속 이미지 같기도 한, 아니면 골반을 해부한 생물학적 이미지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형태들이 꼬물거린다. 다만 그림을 보는 사람들 저마다의 머리와 마음속에서 그 최종적인 형태와 의미가 결정될, 그런, 알 수 없는 이미지, 암시적인 이미지, 그러므로 열린 이미지, 생성 이미지를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생성 이미지, 생물학적 이미지, 유기적인 이미지, 우연한 이미지가 초현실주의를 떠올리게 하고, 특히 유기체적 초현실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몽글몽글한 형태가 하나로 어우러져 알 수 없는 형태를 만드는, 비정형의 형태를 만들고 비결정적인 형태를 만드는 그림이 생성회화(지금 막 생성되고 있는 회화, 그러므로 어떤 전제도 없이 시작하고, 다만 과정 중에 우연한 형태가 찾아지는 회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마도 어느 정도 자동기술법(반쯤 저절로 그려진)에, 자유연상 기법(하나의 우연한 형태가 다른 우연한 형태를 부르는)에, 의식의 흐름 기법(의식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무의식이 흐르는 대로 그린)에 착안한 초현실주의에 대한 공감을 반영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감각적 현실과 비/초현실이 그 경계를 허무는 제3의 현실을 열어놓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빛 속으로> 빠져드는 그림이 있다. 마치 빛이 시작되는 원천을 그려놓고 있는 것도 같은 그림 한가운데에, 그러므로 빛의 중심에 양팔을 벌리고 선 사람 형상 같기도 하고, 십자가가 변형된 형태 같기도 한 형상이 있는 그림이다. 아마도 빛으로 표상되는 영적 존재에 대한 감동(환희)을 표현한 것이고, 신적 존재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한 그림일 것이다. 티베트 불교(사자의 서 그러므로 죽음의 책)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죽은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빛을 향해 가라고 소리 높여 주문을 외운다고 한다. 아마도 한눈팔지 말고 자신의 원천을 향해 가라는 주문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 창세기에서는 태초에 빛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빛은 존재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다. 빛이 회오리처럼 휘돌면서 존재를 빨아들이는 것도 같고, 존재를 낳는 것도 같은, 온통 빛 천지인, 작가의 그림은 아마도 작가의 평소 영성주의 관념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물질 만능주의에 경도된 현실에 정신적인, 영적인 생활철학을 예시해주고 있어서 그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