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모태를 찾아서

 

이선영(미술평론가)

 


북한강 하류 청평과 두물머리 사이에 살고 작업하는 양화선의 작품 키워드가 물인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강물과 어우러져 작업하니 행복하다고 말한다. 작가는 수십년째 살고있는 풍광 좋은 그곳을 재현하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강물은 그를 보다 근원적인 시공으로 인도한다. 유년기에 전주 외곽에 살았던 작가는 방학에 외갓댁 초입에 있었던 옹달샘을 기억한다. 당시 초등학생인 그는 수도도 병에 담긴 생수도 없었을 1950년대에 십리 길을 걸어 샘에 도착했다. 한여름 같은 경우 두레박으로 퍼올린 그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었을까. 사막의 오아시스까지는 아니어도 물의 소중함을 평생 각인시키기에는 충분했으리라. 최근 작품들로 가득 채운 이번 전시 제목 《샘》은 유유히 흐르는 강처럼 거대 서사를 떠올리는 규모보다는 숨겨진 보물같은 곳들을 가리킨다. 다양한 색과 형태로 빚어진 물머리들을 보면 샘의 원천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을 품은 산, 2025, 도자(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전북도립미술관에 있음)



여러 작품들이 산재하며 지도처럼 이어지는 전시장은 미지의 원천들을 가정한다. 작품 <물을 품은 산〉에 나타나듯이, 그의 작품에서 물은 유연한 흐름보다는 솟아오르는 순간 덩어리로 포착된 모습이다.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된 낙수가 쌓여 아래에서 올라오는 석순같기도 하다. 북한강은 금강산까지 원천(강원도 금강군신읍리 단발령이 그 발원지다)이 닿고 있는 만큼, 작은 지류들이 있는 산은 마치 낙타 혹처럼 물을 품고 있다고 여겨진다. 샘은 식물이 있어야 물이 생성되므로 나무도 빠질 수 없다. 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은 가상의 원근법이 작동하는 전시장 벽 곳곳에 여러 크기와 모양새로 자리한다. 안 쓰면 말라 버리는 샘은 사용자들 또한 불러낸다. 작가만큼이나 자연을 향유하는 인간들이다. 양화선의 작품은 산-물-나무-인간이 두루 합쳐진다. 이전 작품에서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는데, 그의 주요 작업이 조각에서 도자로 전환하면서 바뀌었다. 


인간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근대 이후 자연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기댈 것은 자연의 섭리이니만큼 그의 자연관에는 긍정적 요소가 지배적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시켰던 초인적인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그들이 직접 나오는 것은 아니고, 산, 물, 나무 등과 함께 했던 족적이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여성인데, 이는 여성 작가로서의 자의식임과 동시에, 여성과 자연의 끈끈한 관계를 말한다. 물에 성(性)이 있다면 그것은 여성이다. 알레브 라이틀 크루티어는 『물의 역사』에서 거의 모든 문명에서 생명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상정하고 있기에 많은 언어에서 바다라는 단어는 여성의 성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수메르 어에서 ‘mar’라는 단어는 바다라는 뜻도 있지만 자궁이라는 뜻도 있다. 『물의 역사』는 자신을 감추고 상대방을 드러내는 물의 소극성을 지적하면서, ‘물은 타자를 위한 존재’이며 ‘구체적인 것(분화된 만물)의 어머니’(헤겔, 『자연 철학』)임을 인용한다. 




물의 덩이, 2025, 도자



물, 불, 공기 등 근원적 물질에 대해 형이상학적 상상력을 펼친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물은 불보다도 여성적이라고 말한다. 예술과 관련해서 물의 상징적 여성성은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운명’이며 ‘물이 가지는 유동성은 흘러가기를 바라는 언어의 욕망’(바슐라르)같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양화선의 작품에서 단어와도 같이 작동하는 요소들은 한 작품 속에 모여있기도 하고, 설치의 방법론을 통해 다른 작품과의 관계 속에 각 요소의 관계를 맺으면서 문장, 즉 서사를 형성한다. 벽과 바닥, 전시장 모서리 등을 활용한 작품들은 영문 전시명 《a map of water》처럼 일종의 지도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가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생각한 최초의 부제는 “어느 수맥 탐험가의 지도”였다. 관객의 동선은 미지의 풍경 속 길이 되는 셈이다. 가마 크기의 한계 때문에 그가 이전에 했던 금속 조각처럼 규모를 키울 수 없지만, 단단한 덩어리들은 작아도 기념비적인 느낌을 잃지 않는다. 


도자는 3-4년부터 주로 했지만, 1970년에 조소과를 졸업한 이후 1986년 관훈미술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 때 이미 테라코타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이후에 주재료를 보다 견고한 브론즈로 바꾸었다가, 최근 들어 손맛이 살아있는 도자로 돌아왔다. 무엇보다도 도자는 물을 표현하는데 유연했다. 다양한 잠재적 형태와 색감, 그리고 촉감이 그렇다. 흙과 물, 불의 결합체인 도자는 보다 더 근원적인 자연을 표현하고자 했을 때 적절한 어법을 제공했다. 작품 <물을 품은 산>은 나무 뿌리가 흙과 함께 물을 움켜쥐듯이 물을 모아 바다로 흘려보내는 물길이 내재된 산의 모습이다. 수원에서 물이 퐁퐁 솟아오를 때처럼 둥근 머리들이 <물의 덩이>들을 이룬다. 수원의 상황에 따라 물머리 또한 다양할 것이다. 또한 물은 어디에 담기냐에 따라 형태가 결정되는 유동성을 가진다. 샘솟는 물의 덩이는 그만큼 불확실하고 다양하다. 이러한 속성은 물의 잠재적 속성과 관련되며, 서로 반대되는 두 속성도 포함한다. 




샘, 2025, 도자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사개론』에서 흐르고 살아있으며 동요하는 물은 파괴와 동시에 생명을 싹트게 하는 물은 죽이는 동시에 탄생을 돕는다고 말한다. 유약을 발라 고온에 구워 발색되는 색감 또한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조각보다는 규모가 작아서 작가가 전 과정을 주도적으로 조율할 수 있지만, 도자의 매체적 특성은 자연을 대할 때 같은 겸허함을 요구한다. 강은 선적인 흐름으로 보이지만, 샘물의 흐름은 선적 연속성 보다는 간극이 포함된다. 샘은 도약한다. 재현에 충실한 작품은 대상과 이미지, 의미 사이의 연속성을 가정한다. 양화선은 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샘솟는 과정을 표현한다. 샘은 과정과 형태가 중첩되는 자연적 소재이다. 나무 또한 양분과 수분의 통로를 따라 이루어지는 형태가 있지 않은가. 샘솟는 과정은 나무의 도관처럼 오름과 내림이 함께한다. 프랙털 이론이 말하듯이 나무는 줄기와 가지, 엽맥 등에서 물길에 상응하는 형태가 있다. 


일상적 표현에서 ‘샘솟다’는 영감, 기운 등이 활성화된다는 의미로, 작가에게는 소중한 존재 또는 양태다. 작품 <샘>에서 다양한 굴곡을 가지는 덩어리는 물과 관련되는 색감으로 구현됐다. 하얀 모래사장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해수욕객의 모습을 표현한 <섬>은 인간이 작아짐으로서 자연을 상대적으로 크게 보이게 하는 형식 내지 태도를 보여준다. 작품이 크지 않아도 기념비적인 속성을 유지하는 이유이다. 작품 <숲>은 기둥은 각각인데 가지들이 한데 엉켜있다. 거센 물의 흐름처럼 바람을 맞는 나뭇가지들은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었다. 나무와 물의 관계에 대해서는 2018년 개인전 제목인 《흐르는 숲》(교보아트스페이스)이나, 2002년 개인전 《水·木–생명의 뿌리》(인사아트센터)에서도 비슷한 개념으로 이어진다. 보이는 부분인 나뭇가지가 보이지 않는 부분인 뿌리와 대칭을 이룬다면, 지하의 뿌리 또한 지상의 가지들처럼 한데 엉켜있을 것이다. 




섬, 2025, 도자



숲, 2025, 도자



그렇게 표면적을 늘린 숲은 물을 담아둔다. 따라서 숲을 훼손하는 것은 샘을 마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연의 대표자 격인 물은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관행에 노출되어 있다. 작은 방 하나를 차지하는 또 다른 작품은 묘목들을 한데 모아 장차 그것들이 만들어낼 숲을 상상하게 한다. 묘목이라는 잠재적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흙의 물성을 그대로 살렸다. 장차 물을 모이게 할 그 잠재적 존재들은 풍요의 기원을 담은 손길을 보존한다. 그 작품은 케냐의 환경운동가 왕가리 마타이(Wangari Muta Maathai, 1940-2011)의 실천에서 영감을 받았다. ‘나무의 어머니’로 불리우는 그녀는 파괴된 숲을 복원하기 위해 30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었다. 화려한 민속의상을 입고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모습은 이국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대부분 여성인 당사자들에겐 고난이 아닐 수 없다. 전시 작품에 나무가 다양한 양태로 등장하는 것은 나무와 인간 간에 형성된 오래된 유비와 관련된다. 


모든 것을 주는 나무라는 동화의 관념도 있듯이 나무는 우주의 축소판이다. 양화선은 나무의 강한 생명력을 사랑한다. 그는 2023년 작가노트에서 버드나무와 북한강을 비교했다. ‘...버드나무는 강인한 번식과 생존의 나무, 바람과 비의 나무이다... 나는 강가 버드나무를 가까이 바라보고 그 주변을 걷기도 하고 나무 아래 앉아 바람을 느끼거나 잎이 늘어진 수면에 발을 담근다...’ 그 밖에 러시아의 프리 다이버인 나탈리아 몰차노바(Natalia Molchanova, 1962-2015), 네팔 최초 여성 세르파인 락파 세르파(Lhakpa Sherpa, 1974-) 등이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세 명의 여성들을 모티브로 전개’된 이 전시에서 여성들은 나무, 물, 산 등 이 전시의 지도를 이루는 자연의 요소와 관련된다. 작가는 자연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서 사회적 의미를 던진 여성들을 호명한다. 이 여성들은 양화선의 작품을 통해 내적으로 연결된다. 예술은 멀리 떨어진 우연적인 것들로 필연적인 그물망을 짤 수 있게 해준다. 


출전; 전북도립미술관 서울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