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적 실천
이선영(미술평론가)
세상과 벽을 쌓고 작업하다가 결국 벽과 유사한 것을 창조하는 사조가 있다면, 김기라만큼 그와 멀리 있는 부류도 없다. 모더니즘에서의 이상적인 예술은 그들이 비판하는 근대사회의 분업형 작업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분업형 작품은 상당부분 공예같이 돼버리며 그것은 애초의 ‘순수’ 예술과도 거리가 멀어진다. 고향 충남에서 초대한 전시 때문이어서만이 아니라, 그는 평소에도 작품에서도 발언을 많이 한다. 국내외에서 문화이론을 비롯한 여러 부분을 전공하기도 했지만, 그는 한 형식에만 전문적으로 집중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모자란 부분에 대한 협업과 대화적 상상력은 필수다. 이번 전시의 영상 작품들에도 크레딧이 한참 올라간다. 많게는 수십 명이 함께 하는 다른 분야 협업자들과의 지속적인 작업은 그의 ‘창조’에서 매개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알려준다. 세상에 대한 관심은 단지 그가 오지랖이 넓어서가 아니라, 작가다운 태도를 견지하기 때문 아닐까.

당진 문예의 전당 전시관 전시전경
잠잘 때 제외하고 항시 끼고 사는 스마트 기기는 개인을 알고리즘의 덫에 가두어 세계를 보는 창일 수 있는 가능성을 축소한다. 그러한 사회는 고립 은둔형 인간을 양산한다.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을 보는 폐쇄적인 거울의 사회는 우울하면서도 공격적이다. 하지만 작품은 세상으로부터 오고 다시 세상으로 간다. 작가는 창조의 주체가 아니라 그러한 관계망이 활성화되는 자리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땅과 인간의 관련에 주목한다. 땅은 인간사가 펼쳐지는 장이다. 그에게 우리 땅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함께 한다. 그것은 분단과 통일 문제는 물론, 제주(4.3)나 여순(여수순천10.19) 등, 이 땅이 직면한 문제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그간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김기라는 역설어법을 즐겨한다. 한쪽으로만 향하는 논리가 아니라, 양쪽으로 뻗어나가는 역설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현실에서 자주 맞딱뜨린다. 한 방향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현실의 모순을 지탱하고 연장시키는 이항 대립의 대표적 방식이다.
작가의 사유, 즉 문제의식은 모순으로부터 시작된다. 모순의 해결이 아니라, 모순을 모순으로 직시하게 하는 것이 작가의 과제이다. 문제가 제대로 가시권 안에 들어오게 한다면 그만큼 해결의 길은 가까워진다. 그것이 예술이 할 수 있는 현실 참여의 효과적인 방식이다. 김기라가 무대를 자주 끌어들이는 이유이다. 무대는 다시 영상에 담겨 무대급의 전시장을 통해 상영되곤 한다. 이번 전시에서의 영상 작품은 좌우로 길게 펼쳐지는 스펙터클 화면을 활용해 문자에 실린 메시지를 영상과 같은 급으로 부각시켜 소통의 과정을 강화했다. 뮤직 비디오 형식의 작품 [비비디바비디부_내일은 검정_우린 알아_우리가 다시]는 제주의 숲과 바다를 배경으로 심금을 울리는 기타 소리에 고운 목소리의 가수가 부르는 서정적인 분위기의 영상으로, ‘오염된 바다’ ‘죽어가는 생명’ ‘소외된 사람’, ‘갈등과 고통’, ‘끝없는 욕심과 이기적인 선택’ 등등의 사회적 메시지를 품은 가사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모두가 정말 원하는 것은 혼자가 아닌 함께 기뻐하는 것’, ‘모두가 행복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혹시 난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를 묻는다. ‘오직 나만 위해 살았던’ ‘끝없는 헛된 욕심과 이기적인 선택 끝에’ 마주한 것을 말한다. 그는 작품 속 가사를 통해서 ‘조건 없는 사랑’이 행복의 조건임을 말한다. 작가는 극도의 개인주의 사회에서 공동체를 호출한다. 물론 공동체는 자명하지 않으며 잠재적인 상태를 현실화하는 것이 관건이다. 초연결사회에서 변화의 조건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예술은 밀도 높은 형식을 통해 소통을 지향한다. 하지만 모더니즘이 그토록 강조하는 매체 내의 질적 기준은 한가지 선택지에 불과하다. 김기라는 낙서나 랩을 비롯한 대중문화의 어법을 피하지 않는다. 폐허가 된 어두운 구조물을 배경으로 허름한 옷의 래퍼가 등장하는 [비비디바비디부_내일은 검정_비겁한 유산]은 야성적이다. 현대는 양극화 때문에 위험한 슬럼 지역을 늘 품고 있다. 문명 내에 도사리고 있는 야만은 이성과 진보의 이면이다. 작품 속 래퍼는 ‘기후 위기, 바이러스, 원자력, 전쟁, 무한경쟁, 승자들의 자만과 오만, 독식...등등이 판치는’ 세상을 비판하면서, ‘너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것같아?’라고 내뱉는다.
3채널 비디오 설치 작품 [세상의 저편_표준화된 시점 X 땅, 인간, 환경, 공동체]는 전통 음악의 고풍스러운 연주를 배경으로 어린 두 남매가 험난한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담겨있다. 누나가 어린 동생을 업고 거센 바람을 뚫고 나아가며 여러 번 넘어진다. 와이드 화면의 특징을 살려서 공간을 가로 질러가는 상황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연극적인 조명으로 밝혀진다.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아니기에 이미지와 음악의 조응은 중요했다. 이 작품의 특이한 배경음악은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만든 여민락(與民樂)의 음과 악보를 차용’한 것으로, ‘음의 발생과 정지에 따라 인물의 움직임이 살아나거나 멈추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이 작품에서 흐르는 시간은 주인공의 행동을 나타내는 서사다. 느린 시간은 그만큼 느슨한 서사를 내재한다. 작가의 특정 기억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구체적인 시공간을 지우고 이를 보편화시킨다. 느린 동작으로 진행되어서 순간순간의 장면은 그림이나 조각같이 다가온다.

영상이 흘러나오는 벽면은 흙색으로 화면 주변을 발랐다. 거칠게 발린 흙의 흔적은 모든 재난 현장에 남아있는 인간의 몸짓을 떠올린다. ‘망가진 땅을 걷는 우리는 흙을 잇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그곳에 씨를 묻고 노래하기 위해 떠난다’는 말이 화면 주위에 써있다. 이 작품은 ‘재난과 기억, 그리고 공동체적 미래를 교차시킨 서사적’ 작품으로, 그가 ‘1970년대 보령에서 겪었던 홍수와 정전의 체험’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동안 저질러온 인간의 죄로 앞으로 재난이 더 빗발칠 가운데, 과거의 기억은 ‘미래 재난의 서사 속에 배치’된다. 김기라는 2000년대 이후 초기 전시부터 영상 설치작업을 주로 발표해 와서 그가 회화과 출신이었다는 것을 잊게 된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형식인 드로잉은 그의 작업의 기저에 놓여있다. 2020년에서 2025년까지 그렸던 드로잉 600여점 중 ‘땅을 딛고 바람을 넘어’라는 전시주제에 조응하는 24점을 골라 함께 배치했다. 보이긴 하지만 그 의미가 제대로 읽혀지지 않는 이미지의 시대에, 그는 기억/기록/이미지의 간극들로부터 시작한다.
검은 액자에 넣어 한 벽에 몰아서 설치한 작품은 다양한 크기의 종이 위에 쓱쓱 그린 것들이지만 향후에 더 완성감 있게 펼쳐질 씨앗같이 접혀있다. 전방위적인 작품을 하는 그에게 최초의 ‘끄적거림’은 개념의 축약이자 그자체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전시된 드로잉들은 서로 간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다. 색도 고상한 조화보다는 톡톡 튀는 색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는 형국이다. 파편화된 세계에 작가는 단편들로 대응한다. 근대를 지배했던 역사주의의 환상은 선적인 진보를 확신했지만, 그것은 20세기의 양차 대전을 비롯하여 항시적인 긴장 관계에 놓인 세계화 속에서 산산조각 나버렸다.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진보의 개념 속에는 산업 발달이 가져오는 노동력의 해방, 종교로부터 분리된 가치체계, 진선미 가치의 차별화 등이 내포되어 있다고 정리한다. 하지만 이러한 진보사상은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 모랭의 진단이다. 진보에 대한 위기와 더불어 ‘보다 나은 미래’라는 개념 또한 의문시된다.

생태적 위기와 더불어 자연 및 자연에 바탕 한 문화적 가치도 높아졌다. 현대 산업사회의 토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좀 더 지속 가능하고 평등한 삶의 방식의 실현에 필요한 원칙을 모색하는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한 사회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은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민중의 복지이며, 환경적인 면에서는 지속가능성이라고 말한다. 특히 자본 집약적으로 이루어지는 또 다른 전체주의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오래된 미래]는 부탄의 국왕이 말한 것처럼 한 사회의 복지의 진정한 지표는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국민총행복이라고 인용한다, 물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올바른 미래를 찾는 노력은 불가피하게 자연과의 더 큰 조화를 이루는 어떤 근본적인 패턴으로’(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돌아가는 것이다. 예술에서는 정치가들이 꿈꾸는 총체성의 가상과는 다른 대안들이 꿈꾸어진다. 김기라가 드로잉을 제작하고 전시하는 방식은 부분과 전체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유기적 전체에 속하지 않기에(못하기에) 전체에 의해 사용되지도 쉽게 파괴되지도 않는다. 압제에 죽은 듯하다가도 되살아나는 불씨가 된다. 씨앗처럼 접혀있다가 조건이 되면 번성한다. 낱개는 횡단적 연합을 통해서 작동한다. 그는 드로잉에 대해 ‘시각적 표현을 넘어 사회적 기억과 역사적 경험을 사유의 흔적으로 호출하는 기록 행위’라고 밝힌다. 드로잉은 과거와 현재의 여러 현실들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의 장을 열어주는 장치로 작동’한다. 그것들은 ‘문화적 기억의 파편들이며, 그것들이 서로 충돌하고 재배열되는 과정은 고정된 의미 체계를 해체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되는 은유적 언어를 만든다.’ 작품 [비비디바비디부_내일은 검정_컬러바_멈춤]은 양모 수제 카펫으로 제작되었으며, 카펫의 무늬가 마치 기하 추상 작품같다. 카펫 제조 기술이 발달한 이슬람권의 문화가 엄청나게 정교한 추상적 패턴을 발전시켜왔다고 볼 때, 그리 이상한 조합도 아니다.

작가에 의하면 ‘컬러 바와 테스트 패턴은 원래 방송이 ‘잠시 멈춤’이나 ‘조정 중’임을 알리는 기호지만, 본인에게는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문명과 사회가 멈추었을 때의 상태를 상상하게 만드는’ 이미지다. 모든 것이 연결된 사회에서 잠시 멈춤은 대재난이다. 보다 나은 생산력을 향한 무자비한 발전주의는 더 많은 희생을 낳는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그는 이 멈춤을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사유’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 ‘컬러 바를 통해, 우리가 지금 멈추지 않는다면 미래와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경고를 전하고, 동시에 멈춤을 통해 다시 사유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카펫이라는 따스한 형식은 멈춤의 시간에 대한 일방적인 결론을 유보한다. 전자 미디어는 이제 인간 자체도 뒤로하고 세상의 주인공으로 등극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다시금 인간 삶이 펼쳐지는 무대에 깔릴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간 삶의 온기를 보호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출전; 충남미술관 사전프로젝트 [땅을 딛고 바람을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