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이 품은 빛을 꺼내다

 

이선영(미술평론가)

  


관객 참여에 의해 추동력을 가지는 이은주의 도자 작업은 따스한 기운이 감돈다. 하얀 컵들에 금빛 점들이 찍힌 그의 최근 작업은 빛을 담고 있다. 수많은 작은 컵에 담긴 것은 활활 타오르는 횃불은 아니고 반딧불같이 미미하지만 다수의 참여에 의해 폭발력을 가지는 그러한 빛이다. 그의 작품에서 영감이 된 것은 촛불이다. 촛불 앞의 한 개인은 실존적이지만, 그러한 개인이 다수가 될 때 사회적 차원을 가진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제로섬 식의 계산을 벗어난, 많을수록 좋은(多多益善)인 경우다. 시공간적인 한계는 있지만, SNS 같이 비교적 근자에 조성된 새로운 기술적 문화적 환경은 촉매 역할을 한다. 그의 작품에서 컵이나 집의 형태를 가진, 자그마한 단위 구조가 배치됨으로서 의미를 생성하고 증폭시킨다. 구조적으로 확장되는 설치미술의 어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현대 도자예술의 방향과도 함께 한다. 물론 그것은 부분들의 반복으로 전체를 장식하는 공예의 특성이기도 하다. 




한국공예관 갤러리 2-1 전시전경



작가가 제공한 하얀 도화지 같은 도자기 표면에 관객도 함께 그린 금빛 점들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작품을 생산한다. 전시가 끝난 후 작품은 참가자들에게 나눠 주는데, 자기가 한 것을 가져가는 것은 아니어서 다름의 의미와 감각을 되새길 수 있다. 그릇은 같아도 각자 담는 것은 다를 수 있다. 점으로 찍어 무늬를 만드는 방식이기에 문자적인 방식의 배열로도 보인다. 맞은편 벽의 설치 작품에는 문장이 새겨져 있어 비슷한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 문자는 잠재적인 소리가 되어 둥근 가장자리를 돌며 발언한다. 하나의 점은 여럿으로 증폭되며, 참여가 더해질수록 할 말도 많아진다. 때로 그것은 말보다 더 큰 메시지인 침묵의 기표로도 다가온다. 컵 작업이나 판 작업의 경우 촛불을 담았던 일회용 컵이나 액정화면 속에서 명멸하는 문자를 넘어서 기념비적인 영구성이 구축된다. 가령 돌 위에 새겨진 계율같은 방식 말이다. 물렁한 흙도 수천도의 열을 견디며 돌이 되지 않는가. 


그것은 최초의 인간이 흙으로 빚어졌다는 신화가 생겨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도자예술의 무게에 힘입은 것이다. 열은 빛을 동반하기도 한다. 흙 또한 자연 상태에서 그 내부의 여러 요소 때문에 빛을 발하기도 한다. 이은주의 여러 작업들은 흙에 잠재된 빛을 꺼내 사회적 온기로 승화한다. 무명의 영토에서 자발적으로 생성된 메시지는 아전인수격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인 그들의 고무줄 법조문에 대응한다. 점의 나열은 관료제도에 의해 유기적으로 조직화 된 권력과 달리, 하나씩 첨가될 뿐이다. 그 속성은 자발성과 개방성이다. 하얀 바탕에 점점이 찍힌 금빛 형태는 그자체로 아름다운 장식적 효과를 자아내지만, 그빛의 출처는 현실이다. 한국 사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하나둘 광장에 모여 촛불을 함께 밝히던 체험과 감수성이 반영돼 있다. 촛불 이전에도 우리 사회의 금빛에 대한 기억은 나쁘지 않다. IMF 때는 많은 국민이 장롱 안의 금붙이들을 하나둘씩 가지고 나와 모으기도 하지 않았나. 




Each In Our Light, Together 디테일샷(각자의 빛으로, 함께)



Each in Our Light,Together 각자의 빛으로, 함께



We, Connected (연결된우리)



위정자들의 치명적 과오에 의해 어두워진 현실을 밝히던 촛불은 예술작품 속에 기념비적인 형식으로 자리한다. 물론 전통과 함께 와해된 이상적인 공동체에 근거한 기념비는 아니다. 도자 방식의 기념비는 일회적이면서도 단단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예술만의 특징을 밝히기 위해 예술과 가까이에 있는 철학 및 과학과 비교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철학은 개념들을, 과학은 전망들을, 그리고 예술은 지각과 정서(지각작용이나 감정들과 혼동되어서는 안될)들을 끌어낸다. 세가지 사유들은 서로 교차되고 얽히지만 종합되거나 동일화되지는 않는다. 철학은 개념들을 통하여 사건을 발현시키며 예술은 감각들과 더불어 기념비들을 세우며, 과학은 기능들에 의하여 사물의 상태를 구축한다...’(들뢰즈와 가타리) 흙으로 빚어지고 고온의 불에 단련되는 도자의 제작 방식은 유동적인 현대사회에서 점차 드물어지는 기념비성을 부여하는 요소이다. 


한편 기예로서의 도자는 과학이기도 하며, 개념이 중요한 작품에서는 철학이기도 하다. 도판에 직접 문장이 새겨지고 읽히는 이은주의 작품은 개념미술적 요소도 있다. 그것은 차갑고 어둡게 다가오는 현실을 밝히려는 선한 의도를 가졌다는 의미뿐 아니라, 함께하기라는 방식을 통해서 더욱 그러하다. 이번 전시도 이전 전시와 이어지는 순차성을 통해서 소통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고자 한다. 하지만 예술이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그친다면 지속가능성이나 효율성이 떨어진다. 더구나 도자예술이 그러한 순발력을 가질 수 있을까. 흙으로 빚거나 물레를 돌리고 가마에 넣는 등의 전형적인 도예 작업은 뭔가 고상하고 고풍스러우며 현실의 일희일비(一喜一悲)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하며 본질적인 그 무엇이 있는 듯 여겨진다. 하지만 그러한 장점이 도예를 현실의 장식물에 머물게 한다. 그 현실이 옳든 그르든 말이다. 전통의 고수이든 새로움의 신화에 고무돼 설익은 실험을 남발하든 불통이라는 결과는 마찬가지다. 




We, Shine 1(빛나는우리) 



We, Shine 2 (빛나는우리)



We, Shine 디테일컷(빛나는 우리)



이은주가 늦게 대학원에 진학해서 집중적으로 작품을 발표를 하던 시기의 한국은 격동기였다. 물론 현대의 모든 시기가 과도기이긴 하지만, 최근의 팬데믹이나 내란 등이 야기한 연이은 충격은 컸으며, 그 시기에 제작되고 발표된 그의 작업은 우리가 같이 통과해야 했던 고난의 시간이 담겨있다. 그 전에 어린 두 딸의 어머니이기도 한 작가로서 감내하기 힘들었던 세월호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2014년 사회적 파장이 컸던 그 사건이 터진 당시에 이를 우연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한 작가는 광장으로 나가 세월호 진실을 알리는 운동에 참여했다. 도자기에 문구 새기는 등의 작업을 했고, 빛을 내는 반딧불이라는 개념을 새겼다. 들불같이 번진 빛의 혁명은 우리 사회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되살려졌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빛이 진리의 은유가 되면서 초월과 형이상학적 경향을 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빛이 충만할 때 빛은 진리가 출현할 정도로 압도적이고 명약관화한 명백함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빛은 소비되면서도 줄지 않는다’는 점, ‘빛은 대가없는 증여이며 강제 없이 지배할 수 있는 계몽’이라는 점이다. 이은주가 의도하고 결과로 만들어 낸 빛은 하나의 중심이 아닌 편재하는 빛에 가깝다.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의하면 그리스 종교에는 자연신이 풍부하게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의 신은 없다고 말한다. ‘빛이 신으로 포착되기에는 너무나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빛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이 존재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빛의 은유는 ‘계몽(enlightenment)주의를 거치면서 행해져야할 대상의 영역 쪽으로 비춰진다. 진리가 이렇게 스스로 빛을 발하면서 침투한다는 견해는 계몽주의에서 빛의 은유가 반전된다. 중세 시대처럼 진리가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은 가상에 불과하고 진리는 드러내야 한다는 것’(한스 블루멘베르크)이다. 



We, Together 1 (함께한 우리)



We, Together 2 (함께한 우리)



We,Shine, 컵



여기에 실천의 필요가 생겨난다. 기득권은 결코 다수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스스로 내어놓는 법이 없다. 빛은 두 번이나 무혈혁명을 이룬 우리사회의 성숙함을 비춘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변화의 와중에 이루어지는 이번 전시의 구성 크게 네 부분으로 구별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보이는 맞은 편 벽에 영상, 좌우로 도판으로 만든 집과 컵들, 그리고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실린더 형태의 조형물이 그것이다. 영상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은 작가와 참여자들이 하얀 도기에 찍은 골드펜으로 찍은 점들에 상응한다. 오른쪽 벽면에 수백개의 작은 컵들이 왼쪽 벽면 표면에 메시지를 넣은 집 형태의 판 작업이 자리한다. 판 작업의 경우 흙판을 밀어 만든 타일 위에 화장토와 흙의 색감 대비를 이용해 텍스트를 표현하였다. 그는 슬립캐스팅 기법으로 똑같은 크기로 성형된 기물에 온라인에서 수집된 각자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전 작업에서 그는 SNS를 통해 각자의 사진과 이야기를 전달받아 도자 집 위에 전사 소성 후 설치하기도 했다. 


집은 처음에는 작가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보편적 의미로 확장되었다. 자신을 보호해주기도 하고 바깥으로 확장할 수도 있는 밝고 따스한 집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며 그래서 희망의 빛이 된다. 하나의 단위 구조로 작용하는 집 형태는 평면으로 연결될 때 퍼즐과도 같은 느낌이다. 이전 작품에서 집은 세울 수 있는 입체물로 제작되어 여러 방식으로 배치되기도 했다. 그것은 개인이 모인 다중처럼, 정겨운 마을처럼 다가왔다. 그 위에도 찍혔던 금색 점이나 선의 형태는 덩어리가 작동 중임을 알리는 기표같이 보였다. 집은 벌집처럼 연결되기도 한다. 벌집 모양의 경우 여러 접면으로 이어 붙여지며 미지의 지형도를 만들며 나아간다. 집이나 판모양의 단위들도 그 위에 새겨질 문장만큼이나 길이는 늘어날 수 있다. 구조적 단위를 통해 연결의 접면을 마련하는 그의 작품은 열려있다. 작품의 구성 원리는 체계이기 보다는 배치이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이다. 




We're Connected 1(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We're Connected 2



We're Connected 3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언어는 전혀 수학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언어의 구조는 차용, 혼합, 접착, 오해로 이루어져 있는 일종의 헛간이 화석화한 것에서 생기는 것이며, 정합성은 모든 방향에서 끌어들일 수 있는 배열체계 혹은 모든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규칙 체계이다. 이를 통해 폐쇄된 체계로 간주되는 언어의 제약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의 독특함을 잃지 않고 언어학적 구조들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펠릭스 가타리)는 예술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은주의 작품은 풀뿌리 민주주의처럼 리좀적으로 연결된다. [기계적 무의식]에 의하면 리좀적인 방식을 통해 한 점을 임의의 다른 한 점과 연결할 수 있다. 리좀의 성격은 ‘해체가능하며 연결가능하며 역전가능하며 끊임없이 개조할 수 있다.’(펠릭스 가타리) 관객 참여 오브제 작업은 컵 이외에도 실린더 형태의 쓰임이 있는 수공예적인 도자기가 관객의 세라믹 금 펜을 기다린다. 


그것은 영상 작업에서도 등장하는 반딧불이를 구성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작은 불빛들이 모여 큰 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수백개의 컵에 찍힌 골드점 또한 연대와 연결을 표현한다. 맞은편 벽의 도판 작업에 새겨진 텍스트는 지난 겨울 거리와 광장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들을 반영한다. EVERYTHING WILL BE OKAY(괜찮아)/ WHEN WE ARE TOGETHER (함께한다면)/Revolution of Light(빛의 혁명)/Together, We Shone (함께 빛나다)/Light Becomes Us (빛이 우리다)/ Let's hold hands(손잡고 가자) 등의 문장은 조형 언어를 통해 또 다른 울림을 가진다. 그의 작품은 개념미술과 달리 문자 이외에 조형적으로 조율된 부분이 많다. 영상 작품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공간을 배경으로 보는 이에 따라 깊은 밤 혹은 동이 터오는 희망의 새벽’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각각 빛을 내는 작은 불빛들이 모여 ‘We’re Connected’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참여용무지컵



Each In Our Light, Together 1(각자의 빛으로, 함께)





영상 작품에서 반딧불이라는 소재는 어린 딸아이에게 읽어주던 [반딧불 니노]에서 영감을 받았다. ‘작고 약한 반딧불이들이 밤새 세상을 비추는 달을 쉬게 해주고자 작고 작은 날개짓으로 하늘로 날아올라 세상을 크게 밝혀준다’는 내용의 동화이다. 반딧불로 가정된 작은 빛 하나하나는 개인을 상징하며, 빛은 무리가 된다.  다양한 개인이 함께 한 작업물이 모여 큰 울림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는 참여형 프로젝트에서 함께하기는 그의 작품 근저에 놓인 중요한 가치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다름 속에 존재하는 고유한 존재 임을 말하면서, 이 고유한 존재가 함께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더 큰 연결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비어 있는 도자기와 도자용 금색 펜이 준비된 전시장은 시선만 교차하는 고요한 전시장이 아니라, 자유롭게 참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떠들썩한 공간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참여로 이루어진 전시이며, 지금 누군가의 참여로 다음 전시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