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의 섭리
이선영(미술평론가)
김희라는 습관적 작업을 지양하기 위해 중요 전시들을 코 앞두고도 작가의 분신이라 할만한 재봉틀을 몇 달 동안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작품에는 재봉질이 나온다. 방처럼 연출된 전시장에 들어서기 위해 관객이 먼저 보게 되는 영상에는 주인 없는 재봉틀이 돌아가고 실제 바닥에는 투명한 실이 쌓여간다. 속도감 있는 상하운동을 하며 돌아가는 금속 바늘 사이로 실더미가 하얀 거품처럼 늘어난다. 누가 무엇을 왜 만드는지 알 수 없는 으스스한 상황이다. 이번 전시의 주조 색인 투명함과 화이트도 유독한 화공약품 수준의 녹인 스티로폼을 재료로 만들었다는 점도 꺼림직하다. 순결함과 위생, 시작의 상징색인 화이트의 출처는 미심쩍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하얗게 지워진 N 번째의 반복적 시작에 가깝다. 프로이트의 ‘투명 메모지’(프로이트는 글자를 쓴 면을 들어 올리면 글자는 사라지지만 눌린 자국은 남는 장난감의 메카니즘을 통해 무의식의 양상을 설명했다)처럼 흔적은 남아있다.

수많은 _만약_ 중에서, 금호미술관 전시전경
그것은 [독백Monologue]전(UM GALLERY, 2020년)에서 ‘금색으로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실행한 이전 작품의 맥과 닿아있다. 당시에 꽃이라는 도상을 가지고 그렇게 했는데, 최근 작품에서 꽃은 레이스 무늬로 투명하게 변해서 인체 형상의 표면(피부)와 일체화된다. 지우기와 그리기를 일치시킨 그 작업은 여러 경계를 문제 삼았다. 당시 전시에 사용된 노방이나 낚싯줄도 겹쳐쓰기(이전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에 적절한 재료였다. 재봉틀이 돌아가는 영상의 테두리는 이번 전시에도 등장하는 장식액자이다. 거울 또는 그림으로 동일시될 수 있는 틀 안에 배치된 재봉틀은 수십년 이상 필기구처럼 세상을 그려온 그만의 도구가 겹쳐진다. 도구와 사용자를 일치시킬 만큼의 작업을 지속해 왔다는 점에서 거의 자화상에 해당된다. 도구와 몸의 긴밀한 일치는 두더지의 손이나 새의 날개, 심해어의 눈처럼 진화적 이점을 가질 수 있다.
동시에 자신에게 익숙한 맥락을 벗어나면 불리해진다. 이미 잘 그리고 잘 만드는 작가는 많지 않은가. 김희라에게 바느질은 ‘일상속에서 마주하는 감정, 관계, 사물과의 얽힘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육아와 가사, 갈등, 사회적 역할 속에서 발생하는 트러블과 얽힌 장애물들은 작업의 원천이자 감각적 사건으로 뒤집는다. 그 트러블들을 꿰매고, 엉키고, 봉합하는 방식으로 시각화해왔다’.김희라가 전공한 섬유예술은 원하든 아니든 그의 모태 언어라고 볼 수 있는데, 아직도 그 방향성이 분명한 것은 아니며, 각자도생식으로 현대미술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현대미술도 궁극적으로 밀도와 강도를 필요로 하는 단계가 오는데, 그때서야 ‘공예적’인 기법은 재발견되곤 한다. 이러한 경향을 ‘이즘’의 차원으로 격상된 예는 ‘페미니즘과 공예’를 연결시킨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하지만 그 반대 방향도 있다. 김희라의 바느질 또한 이별과 만남이 거듭된 애증에 가득한 그의 언어다.

전시실 입구

실과 바늘도 현대회화의 붓과 캔버스처럼 투명성과 불투명성을 반복한다. 투명성은 양날의 칼이다. 자신이 속한 계가 공기처럼 의식할 필요 없는 것이 투명한 상태다. 하지만 그것은 매너리즘을 낳기도 한다. 인간이 투명성으로 가늠될 때도 두가지 방향이 있다. 우선 투명성이 기준이 되는 경우다. 가령 백인 우월주의 사회에서 백인은 투명하다. 그 외의 유색인종들은 그들을 주변화하는 체계를 통과하기 위해 백인같은 투명성을 얻고자 한다. 작가가 허름한 모텔을 작업장으로 썼을 때 만난 그곳의 장애인과 극빈자같은 타자들은 투명성을 원했다. 그들은 정상/이상 사이의 구별을 넘어서 그저 보통 사람처럼 대해주길 바란다. 타자는 여러 층위에서 출몰한다. 이번 전시에서 여성작가의 정체성을 투사한 마녀가 그렇다. 마녀는 매부리코에 구부정정한 늙은 노파로 유형화 되어 있다. 몸의 투명함은 권력과 밀접하다. 기준이 되는 몸에 꿰어맞추려는 경향은 시각성과 밀접하다.
샌더 길먼은 [성형수술의 문화사]에서 우리는 시각을 통해 세계를 조직하고 혼동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의미를 제공하는 시각적 범주들을 창조하는 ‘보는 동물’로, 보고 보여야 한다는 요구에 응답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를 담는 가시성은 억압적이다. 샌더 길먼은 (비)가시적으로 될 수 있는 능력,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능력이 타자화된 이들의 소망이다. 신체의 비가시성이란 다른 사람과 똑같아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특출해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주목받지 않는 것이 용인의 징표가 되는 지배 집단 속에 살며시 섞여드는 것’(샌더 길먼)이다. 타자화된 이들은 자신들이 타자임을 각인하는 신체를 잊고 싶어 한다. 김희라는 연금술사나 마녀의 방식과도 비교될 수 있는 그만의 비밀스러운 방식을 통해 투명성에 얽힌 몸과 가시성에 얽힌 권력 관계를 표현한다. 평범한 중산층 여자의 삶을 벗어난 작가 또한 투명한 존재가 아니다.

그럼 그럼, 닿을 수 있지

그럼그럼, 닿을 수 있지100X120
하지만 실제의 여성은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데, 이때의 투명성은 다소간 부정적이다. 가령 그녀의 가사노동은 그림자 노동(shadow work)으로 처리되어 오랫동안 사회적 생산력에 공식적으로 포함되지 않았다. 작품 속 손처럼 갈퀴같이 작업해도 남는 것이 없다. 여성에다 작가면 이중으로 손해를 본다. 침묵하는/당하는 신비의 타자다. 김희라가 최근 작품에 도입하는 투명성은 가시성과 관련하여 심리적 해석이 가능하다. 자끄 라깡의 해설서인 페터 비트머의 [욕망의 전복]에 의하면 남성성은 가시적인 것에 근거하며 이것을 기초로 논리적이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여성성은 논리를 벗어나는 것이며 파악 불가능한 심연이다.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도 않는 그 무엇인 여성은 실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동인이다. 페터 비트머에 의하면 라깡에게 남성성은 여성성에 의해 정립된다. 즉 남성성은 구조지어지지 않은 것에 의해 구조 지어지는 것이다.
라깡의 정신분석 이론이 여성에게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는 해석자의 몫이다. 하지만 ‘여성성을 하나의 실체로 파악하지 않고, 어떤 실체화도 벗어나는 범주’(페터 비트머)라고 본 것은 누군가에게는 해방적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전시실 입구에 수북하게 쌓아놓은 투명한 실은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태도를 암시한다. 천에 박혀있거나 그로부터 벗어나곤 하던 실은 그에게 평면과 공간에 그리는 선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 투명 실은 물로 쓴 글씨나 이미지 같다. 각 지역의 유력 작가 17인이 참여하는 전시에서 튀지 않고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감춤으로서 드러내는 역설적 전략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최근 수년 동안 작가에게 한꺼번에 닥친 불행이 삶과 예술에 대해 좀 더 거리감을 두게 했다. 그는 바닥을 친 김에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했다. 김희라는 이 전시에서 익숙하지 않은 자기 안의 타자를 불러냈다.

부여잡고
입출구가 다소간 산만한 공간에서 자기만의 방을 연출하여 단편적인 작업들을 보이지 않는 실로 엮어 이야기한다. 보이지 않는 실은 ‘보이지 않는 손’처럼 뭔가 마술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녀의 손은 기괴한 형태지만 색이 빠져있다. 하얀 손은 투명하다. 없으면서도 있었던 기묘한 존재인 마녀는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희생양의 하나였다. 가부장적 동일성에 의해 타자화된 여성들은 당대의 지배적 질서에 의해 고문당하고 화형당했지만, 환타지 문화부터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복권되고 있다. 메기 험은 [페미니즘 이론 사전]에서 마녀의 어원인 고대 영어 위카(wicca)가 ‘현명한 여인’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이는 여성, 어머니, 할머니를 긍정적으로 일컫는 용어이다. 유럽에서의 마녀사냥을 파헤친 저자 장 미셸 살망은 [사탄과 약혼한 마녀]에서 전승받은 지식과 주술의 힘을 혼동한 중세인은 약초의 비밀을 알고 있던 여인들을 무서운 존재로 간주하였다고 말한다.
구전되었던 민간요법의 지혜를 지니고 있던 여인들의 특별한 능력을 두려워했던 대중들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그녀를 의심하였다는 것이다. 마녀라는 캐릭터는 좋은/나쁜 여자라는 평판에 대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김희라의 작품에서 마녀는 그녀의 손이 들고 있는 둥근 구슬과 더불어 누군가한테는 부정적인 다른 누군가한테는 긍정적인 변형(마술)을 행할 것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테마를 《거대한 것들의 가소로움이여》이고 핵심 모티프는 마녀손으로 잡았다. 치유자이자 마법사로서의 공간은 투명한 마녀의 손, 공중에 떠 있는 레이스 면사포, 인물 조형물, 장식액자들로 구성된다. 그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함께 엉켜있다. 얽혀있는 공간의 안내자이며,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상징이 마녀이다. 김희라의 마녀에서 결정적 차이는 투명함이다. 작가는 전통적 마녀의 이미지에서 검정 기운을 모두 빼 버렸다.

숨 한번 고르고, 3D펜,레이스천, 110X90X32cm,2025년
동화에서 나쁜 마녀가 죽을 때 옷만 남기고 연기를 내뿜으며 녹아내리지 않는가. 작가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손만 남겼다. 그에 의하면 전시장에 놓인 흰색과 투명한 재질들은 깨끗함과 공허함, 순결과 억압, 소멸과 재탄생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품는다. 마녀의 손끝은 우리를 오래된 이야기에서 꺼내어, 다른 결말로 데려간다. 억압받던 타자이자 복권된 마녀는 성 또한 초월한다. 높은 재단 위에 앉아 있는 인물 형상의 조형물은 입구에서는 레이스천에 가려져 보이지 않다가, 전시장에 들어서면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는 사유의 존재를 상징한다. 3D 펜으로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남자 인체를 만든 후 그 위에 얇은 레이스천으로 바느질한 작품이다. 남성 조각상은 고개는 숙이고 있고, 발은 마녀의 신발처럼 뾰족하다. 남성의 근육질 몸과 다리를 레이스로 감싸면서 남성/여성의 구분은 사라지고, 마녀 신발인 듯 뾰족하여 발인지 신발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3D 펜으로 제작된 마녀의 손 형태 위에 스티로폼을 아세톤으로 녹여 얇게 펴 발라 만들었다. 마녀의 주요 소품인 구형 구슬도 3D펜으로 제작하여 레이스천으로 감싸서 만들었다. 손은 보이지 않는 관계와 기억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곳곳의 손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형태화된 천을 당긴다. 이러한 조합에는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내 옷을 잡아당기는 듯한 섬뜩함이 있다. 김희라의 작품에서 액자와 천의 조합은 작품의 주요 목록을 이루며 다양한 변주가 있다. 이번 전시에서 투명 폴리로 제작된 장식액자는 벽에서 10-20cm 떨어뜨려 걸어놓았다. 그 가운데는 3D 펜과 스티로폼을 재료로 만들어진 여성 인체가 부조처럼 튀어나오게 설치됐다. 통상적으로 액자는 거울이자 그림의 틀로 사용된다. 그것을 거울로 가정한다면 틀 너머에 있어야 반사상은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다. 고풍스러운 액자 틀은 금기가 무너지는 경계가 된다. 거울이 끼워지기도 할 투명액자는 그 앞에선 누군가를 투명하게(있는 그대로) 비춰줄까?

저요 3D펜,레이스천, 153X100cm,2025년
투명액자는 마치 유리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투명 거울의 틀에서 상반신을 내밀며 앞으로 나오는 몸이 기괴하다. 거울의 심리학은 분열된 몸이 가상의 통합상을 이루는데 투입되는 상상의 몫을 강조한다. 상상 속의 정체성은 그것이 믿어지는 만큼의 현실성을 띈다. 장식액자는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으로 이루어졌다. 거푸집에서 떼어져 나오는 듯한 그의 작품은 반사상의 재생산을 말한다. 곧 도래할 사이보그 세상 또한 인체의 시뮬레이션을 목표로 할 것이다. 만들어진 주형(鑄型)으로부터 만들어진 복제는 유성생식 없이 이루어진다. ‘사이보그 페미니즘’(도나 해러웨이)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성생식의 종말에서 여성의 해방을 본다. 거울에서 나온 인체는 둥근 구슬에 손을 뻗친다. 신이 아담을 창조했을 때의 영웅적 만남 또한 손짓의 만남이기도 했다. 평평한 거울에서 태어난 마녀는 더 진전된 형태의 마술 거울을 손에 넣는다.
마녀의 손에 들린 유리구슬 거울은 과거와 미래를 본다. 뭔가 정상적인 질서를 조금씩 비트는 김희라의 작품을 볼 때 액자는 뼈가 천은 피부가 떠오른다. 뼈는 단단하고 피부는 부드럽다. 단단함과 부드러움 사이에는 긴장과 조화가 있다. 뼈에 붙은 살은 당겨지고 찢어지고 늘어지며 기이한 형태로 증식하곤 했다. 평평한 면을 벗어나 3차원으로 튀어나온 것들은 투명하게 존재하기에 의식되지 않은 경계를 드러낸다. 이미지가 그려진 캔버스 천을 장식하는 액자라는 통상적인 짝패의 변주는 사도마조키즘적 환상이 투사되어 있다. 전례 없던 것(또는 그렇다고 믿어지는 것)을 창조하는 작업에 가학피학적인 폭력이 스며있다. 하지만 그의 가학피학성에 피같은 직접적으로 잔인한 코드가 등장하지 않는다. 최근 작품은 화이트 큐브처럼 중립적이다. 하얗거나 투명한 재료를 주로 사용하여 전시 연출에 따라서는 형태보다는 그림자가 더 눈에 띄기도 한다.

전설도 아니고 기적도 아니고 3D펜,레이스천, 175X150cm,2025년
그는 평면과 프레임에 잠재되어 있던 것을 극명하게 가시화하기 위해 몸을 호출한다. 김희라의 작품에 의상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천과 몸이 결합된 가장 일상적인 사물이 옷이기 때문이다. 레이스로 덮어 피부처럼 만든 인체상은 피부의 상처와 무늬를 일치시키는 문신처럼 밀착된다. 이는 몸과 옷의 일체성을 보여준다. 성적 하위문화의 관습 중에는 몸을 감싸는 물질(라텍스, 가죽 등)에 대한 물신적 애호가 있기도 하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설치 작품 중 공중에 떠 있는 얇은 레이스천과 면사포는 탈경계적 몸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이 오브제들은 존재의 유동성과 감각의 흔적을 드러낸다. 웨딩드레스, 면사포, 얇은 레이스천은 축복의 상징이자, 한때 여성의 몸과 운명을 규정하던 의식의 의상이었다. 이 전시에서는 더 이상 주어진 역할에 순응하지 않는다. 드레스 소매 끝에서 뻗어 나오는 마녀의 손, 액자의 경계를 뚫고 나오는 손은 가두어진 이미지에서 탈출하는 몸의 일부이자 선언이다.
마녀의 손 이전에 3D펜으로 제작한 손과 관련 작품은 [열매를 맺지 않겠다](2024, 뮤지엄 호두)전에 출품된 [당연한 것은 없다](2024)에서 보여진다. 여러 번 반복된 부정의 어법은 화이트나 투명과도 관련된다. 그것은 다시 씌여지기 위해 지워진 평판이다. [당연한 것은 없다]는 액자이자 거울의 틀로 간주되는 고풍스러운 프레임에서 난데없이 권투 글러브를 낀 주먹이 프레임 바깥으로 날아드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상반신이 나와서 틀 밖의 물건을 움켜쥔다. 레이스와 볼레로같은 우아한 패션 아이템을 장착한 권투 글러브는 하얀 백조가 우아하게 호수 위에 떠 있기 위해 수면 아래의 치열한 발놀림을 연상하게 한다. 백조가 새끼들을 두 날개 안에 품고 유영하는 장면을 본적이 있는가. 새끼들의 완벽한 아늑함과 안전을 지키는 어려운 임무 수행 중의 백조는 여전히 우아하다. 하지만 그 역시도 그 아래의 보이지 않는 투쟁들이 있다.

전설도 아니고 기적도 아니고, 앉아있는사람,3D펜,레이스천, 160X70cm, 2025년
그것은 미끈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울툴불퉁한 시간들을 말한다. 화이트 큐브에 작품이 질서있게 자리잡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전쟁같은 시간들이다. 살이 뼈에 완전히 달라붙은 듯한 갈퀴같은 손들은 방안에 편재하며 드레스를 비롯한 이것저것을 끌어당긴다. 스치로폼을 녹여서 발라 만든 딱딱한 손의 손톱은 스테인레스 재질이다. 손의 투명함은 광물질로 번뜩이는 말단부에서 비로소 그 본질을 드러낸다. 손톱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상당 기간 자란다고 한다. 손톱은 피부의 일종이지만 잘라낼 수 있는 물질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과 죽음, 유기체와 사물 등, 경계 위의 존재 또는 상태를 상징한다. 자고로 모든 첨단은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영역에 속한다. 그의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풀려난 실오라기들은 짜여짐이나 봉합에 내재된 질서나 완성도의 경계를 넘나든다. 방처럼 연출된 공간 여기저기 배치된 것들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된다. 손은 보이지 않든 말든 연결을 상상하게 한다.
그것은 삶과 작업에 도움을 주는 전능한 손일까, 발목을 잡는 사악한 손일까. 삶과 죽음을 동시에 장착하고 있는 손의 형태는 양자택일적인 판단을 유보한다. 손은 ‘작품이 아니라 작업을 평생하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표출된 모든 행위의 흔적을 상징한다. 식구들을 위해 하얀 밥도 짓고 전시를 위해 스티로폼을 녹인 독극물같은 물질도 만지는 그 손이다. 눈에 띄지 않은 색의 손들은 언제 어디에서 날아올지 또는 잡아끌지 모를 편재하는 힘이다. ‘손(手)’이라는 한자어에는 해부학적 기관을 칭함과 동시에 ‘도움이 될 행위’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갑자기 어려운 일이 한꺼번에 닥치면 운이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한국에서 여성의 삶은 거의 모든 연령대에 지뢰밭이 깔려있기 마련이지만, 김희라 나이대에는 스스로를 포함해서 일신상의 안위가 절박하다. 작업하는 손은 의식되지 않을 만큼 투명하게 움직여줘야 했다. 갈퀴같은 마녀의 손은 예술과 삶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자신의 손을 가리킨다.
출전; 지역예술도약-2025 ARKO LE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