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 가려진 진실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진의 [거인의 식탁] 전은 주인공은 부재하지만, 차려진 식탁이 그의 현존을 말한다. 하지만 다른 작품에서 식사 주인공은 머리가 없다. 이전 작품에서도 머리 없는 손이 등장한 적이 있는데, 십수년이 지나도 그 손이 건재한 것은 ‘보이지 않는 손’(아담 스미스)의 전능함이 여전함을 알려준다. 당시에 유령같은 주체에 상응하는 객체, 즉 대상은 대체로 분별가능했다. 하지만 마치 3D 프린터같은 기계로 뽑아낸듯한 동질이상의 형태들이 화면을 뒤덮는 최근작에서 대상은 대략 음식물로 추정될 따름이다. 그가 바라보는 현대의 먹을거리는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원래 먹을거리의 스펙터클화 또는, 스펙터클의 먹을거리화는 광고 전략의 몸통이다. 대중문화에서 AI의 마술은 그러한 볼거리를 총천연색 버전으로 무한대로 제공하고 있다. 광고는 먹이에 대한 자동반사적 반응이라는 원초적 욕구를 욕망으로 연결시키면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을 채워지지 않는 것으로 변화시킨다. 그것이 현대 소비사회의 동력이다. 




갤러리 플래닛 전시전경(이하 모든 사진의 출전은 갤러리에 있음)



먹은 것이 몸이 되는 생리 특성상, 먹는 주체의 본질 또한 비슷하리라. 음식이란 무엇보다도 동화(同化)의 대상이다. 김진의 작품은 그러한 동화의 대상, 그리고 그와 연동될 주체가 모두 깨림직하다. 캐롤 M. 코니한은 [음식과 몸의 인류학]에서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를 인용하며 신체는 사회질서와 자아를 나타낸다고 본다. ‘인간의 신체는 항상 사회의 이미지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신체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음식의 통과는 사회적 경계와 경계 침입을 상징할 수 있다’(메리 더글라스). 먹음을 통해 몸이라는 민감한 경계는 침투된다. 이러한 기제는 식인풍습부터 희생제의, 그리고 성적 관례에까지 이른다. 인류학은 신체의 통제가 사회의 통제와 관련됨을 말해주는데, 음식은 그 매개체 중 가장 강력하다. ‘날것과 익힌 것’(레비 스트로스)이라는 유명한 인류학의 분류처럼, 음식은 자연과 문화 사이에 존재한다. 음식은 자연과의 관계이자 사회적 관계를 동시에 규정한다. 


캐롤 M. 코니한에 의하면 모든 문화에서 음식 관습은 조직화된 시스템, 즉 구조와 구성요소를 통해 언어를 이루며, 이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여 자연적 사회적 세상의 조직화에 기여한다. 음식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신체이며, 사용 규약, 상황, 그리고 행동’(바르트)이다. 음식은 ‘의미 전달을 위한 주요 영역’(캐롤 M. 코니한)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소재 이상이다. 김진의 작품 속 음식과 그 대응인 (숨겨진)몸은 자연만큼이나 시스템의 산물이다. 그의 작품 속 인물의 머리 없음은 그 맹목성, 가령 시장이라는 추상적 시스템에 대한 의문을 담고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은 손’이 총괄한다고 믿어지던 자유주의도 위협받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실은 조화와 무관함을 알려준다. 우리의 식탁은 1차 생산물을 넘어서 n차 가공품으로 넘쳐나며, 이를 먹고 만들어진 우리의 몸은 상품경제의 논리와 직접 연관된다. 하지만 그 ‘자유’의 모순이 드러나고 있는 현재, 식탁은 때깔 좋은 외관 아래에서 변질되는 중이다. 








대략 정물화로 분류될 김진의 식탁 장면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의 사물의 위상’(작가)을 비유한다. 얼마 전 전시인 [핑크는 없다](2021년, 플레이스막2)의 작가 노트에서 ‘정물 시리즈는 과도한 빛에 의해 사물의 그림자와 어두움이 사라지고, 고유색은 휘발된 사태를 표현한 작업이다. 광택제와 조명으로 발광하는 듯한 과일은 실제보다 더 풍만해 보이고, 부위별로 포장된 고기는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는 살(肉)이 되었다. 흠집 나고 고통받는 살이 우리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반짝이는 것들의 매혹과 살의 관능이 대신한다. 나는 그러한 전환의 결과와 대체를 그려내고자 한다’고 쓴 바 있다. 너무 가까이 포착되어 식탁 또는 조리대, 가판대 또는 쓰레기로도 보이는 애매한 판 위의 ‘정물’은 조명에 의해 고유색이 날아가 버린  반사면으로 가득하다. 그릇 위에 놓인 먹기 좋게 잘려진 덩어리 같은 흔적은 화면에 ‘차려진’ 것들이 고기, 과일, 야채 같은 통상적인 음식물임을 암시한다. 


음식은 그것이 자연물이라고 해도 유통을 위한 가공을 거친다. 비슷한 마블링을 만들기 위해 비슷하게 사육되고 부위별로 잘려 진열된 고기들은 그 자체가 공장 가공품과 다를 바 없다. 현대 자동화 시스템의 원조인 컨베이어 시스템이 고기 공장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인간이 고기를 가공하거나 유통시키거나 요리해서 먹을 때, 그 스스로도 부위별로 잘린 고기 취급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주체가 됨으로서 대상은 아닐 수 있다는 안심은 주/객체 관계가 모호해짐에 따라 의심으로 변화한다. 김진의 작품에서 빛은 어두운 진실을 조명하지만, 결과는 불확실하다. 어디선가 조명되는 빛은 대상을 명확히 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형태와 색감으로 변조된다. 정육점의 붉은 조명이 아니라 모든 사물이 고기처럼 보이는 빛이다. 가짜스러움의 특징인 양감은 극대화돼 있다. 너무 밝으면 오히려 대상이 잘 보이지 않는데, 그러한 빛의 세례에도 색감은 남아 있다. 








얼마 전 개인전의 제목에 ‘핑크’가 있었던 것과 연관시키면, 빛에 휘발된 잔여 색감은 핑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022년 개인전 제목이 [핑크는 없다]였다. ‘없다’는 ‘있다’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으니까. 정확한 색명이 불가능한 그것은 변조의 산물이다. 마치 이 과일 저 과일이 섞인 칵테일 과일 통조림에 고유의 과일 맛은 사라지고, 나름의 질감만이 원물의 희미한 흔적을 간직한 것과 비슷하다. 한편 모든 먹을거리가 상품으로 유통되는 현재, 가격표가 붙여진 투명 포장재라는 비슷한 외관을 가진 채 상점의 조명발을 받는 점도 각자의 다름을 동일화하는데 기여한다. 과자 한 봉지에 들어가는 재료의 출처가 몇 개국인 세계화의 시대에 그것들은 자연물이 생산품이 되기 위한 조건의 결과이다. 그것이 생선과 고기라면 고통은 지워지고 그것이 야채와 과일이라면 흠집도 지워진다. 어부와 농부의 수고도 지워진다. 가격이 결정되는 유통시스템도 지워진다. 


그것은 적정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폐기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어두운 경로를 포함한다. 그것은 풍요 속의 빈곤을 유지하면서, 물신주의를 바탕으로 ‘발전’하는 사회와 관련된다. 이 전시의 또 다른 작품 군은 구체적인 대상이 등장한다. 사냥꾼의 벽에 미니 사파리처럼 연출된 컬렉션처럼, 동물의 사체는 트로피 사냥(trophy hunting)의 기념물이 되어 배치된다. 그의 배치는 트로피가 접시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트로피 사냥의 대상인 야생동물 뿐 아니라 고기로 먹는 가축들도 산재한다. 그 사이에 깔린 레드 카펫은 붉은 고기의 색이 사실은 피의 색임을 말한다. 검은색 버전의 경우 그것은 모든 사체가 돌아갈 색을 떠올린다. 먹는 동물도 먹히는 동물도 모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서로를 반향하면서 맥락을 만들어가는 전시의 방식에서, 레드 카펫이 거인의 목수건과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황금빛 의상을 입은 거인은 식재료의 가격을 결정한다. 






여의주를 든 손은 그의 권능함을 상징한다. 그는 사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거대한 존재지만 얼굴이 없는 익명적 권력을 행사한다. 먹을 수 없다면 죽고 먹어도 (서서히)죽는 식량은 가상이 아닌 실재다. 캐롤 M. 코니한은 [음식과 몸의 인류학]에서 음식에 대한 우리의 극단적인 욕구로 인해, 식량은 가장 근본적이고 명백하고 절대적 형태의 권력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 경제지표에 엄연히 ‘세계 식량 가격지수(FAO Food Price Index)’(위키백과 참조; 식량 농업 기구(FAO)에서 1990년부터 곡물·유지류·육류·낙농품 등 55개 주요 농산물의 국가 가격 동향을 점검해 매월 발표하고 있는 가격지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상품의 가격인 한 생산력과 무관하게 어느 날 생활 수준을 끌어내릴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기후 위기나 빈번한 전쟁 때문에 상황은 더욱 불확실해진다. 김진의 작품 속 거인은 저울을 들고서 대표적인 고기의 가치를 측정한다. 


육류 소비에 관한 경제적 계산은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착취와 자원의 오용을 낳는다. 난 멜링거는 [고기]에서 가난한 국가에선 부자 나라에 지속적으로 육류를 공급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소를 사육하는데 필요한 목장의 확대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짐을 고발한다. 그에 의하면 다국적 육류산업은 죽은 실체 속에 동물의 경제적 유용성이 놓인 시대를 대표한다. ‘고기 식사는  거의 쉼 없는 가동, 즉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없는 희생적인 기계에 의해서 가능하다. 모든 다른 소비재처럼 고기도 가능한 한 저생산 비용의 시장 법칙에 따른 중요한 생산품이 되었다. 고기생산은 농업의 에너지 소비와 비교하여 3배 이상이나 되는 사회적 에너지 과잉이다.’(난 멜링거) 김진의 작품에서 단내나는 풍요가 가상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펼치면 더욱 넓어질 붉은 천은 무엇인가는 일방적으로 피를 흘리고 무엇인가는 피를 빨리는 어떤 흐름이 골마다 접혀있다. 






모든 길은 그곳으로 통하고 그곳에서 나올 것이다. 삼원색이 총동원된 유치찬란한 색감의 조합은 거의 소화물에 가까운 단색조의 먹을거리와 대비된다. 관객은 이러한 조형적 언어의 도약을 통해서 작품 속 사회적 메시지를 짐작한다. 하지만 그의 주요 작업은 암중모색에 있다. 작업실 바닥이 쌓인 두터운 물감 자국들은 치열한 그리기를 통해서도 내용과 형식이 여전히 모호함을 보여준다. 멀리 있는 것에 대해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가까이 있는 것은 말하기 더 힘들다. 빛이 더욱 강조한 매끈한 표면은 본질을 붙잡으려는 모든 노력을 제치고 우리의 시각적 손아귀를 빠져나갈 것이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광명천지의 세계에는 그만큼 가려진 것도 많다. 작가는 광우병 사태 때 시위자들에게 쏘인 강한 빛에 대해 말한다. 시위 진압대에게 빛공격을 받은 이들은 빛을 쏜 이들을 결코 볼 수 없었다. 미셀 푸코가 감시 사회의 전조로 패놉티콘을 분석한 이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그렇다. 

 

빛은 매혹적일 수 있지만 폭력과도 연관된다. 작가에 의하면 폭력은 나쁘지만 모종의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매혹이 없고 폭력만 있다면 자유가 없고 억압만 있다면 그 시스템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권력은 몸에 집중되지만 일방적이지는 않다. 수전 보르도는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에서 푸코에게 근대권력(군주 권력과 대립되는 것으로서)은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몸을 생산하고 정상화한다고 말한다. ‘몸은 억압되기 보다는 개인의 자기 감시와 규범에 스스로 맞추는 자기 교정을 통해서 유지된다. 푸코의 틀 안에서 권력과 쾌락은 상쇄하지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지 응시일 뿐이다. 몸은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역사적으로 불변하고 단일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몸은 이제 자연/ 문화 이원론에서 오랫동안 차지해온 자연의 자리를 포기하고서 인간적인 다른 모든 것과 나란히 문화 안에 자리잡게 된다’(수전 보르도). 






수전 보르도는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몸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으로, 사회적 경제적 조직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본다면 몸을 이루는 음식 또한 마찬가지다. ‘몸이 싸움터’(바바라 크루거)라면, 완화된 핏빛으로 가득한 식탁 또한 마찬가지다. 잔인한 붉은 색은 견딜만한, 심지어는 끌리는 핑크가 된다. 미셀 푸코의 분석 이래 권력의 억압적 요소보다는 쾌락적 요소가 부각됐다. 대량소비 사회에서 마켓에 잘 포장되어 늘어선 각종 소비재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지루한 노동과 부당한 대우를 견디게 한다. 작가는 미시적으로 작동되는 거시 권력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가르는 거리와 위치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체계를 지탱하는데 모두 공모자가 된다, 작가는 자신을 태워버리는 빛으로 날아드는 불나방같은 시선을 참고한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소비자의 선택만 기다리는 밝은 조명 아래의 상품들은 어떠한가.


여러 크기의 캔버스에 담긴 내용물 또한 마찬가지다. 정물화 형식은 사진에서와 같이 가상적 소유가 전제된다. 거기에 담겨지는 것은 대상의 상품화와 죽음의 경고 같은, 경제로부터 철학에 이르는 알레고리 등이다. 밝은 조명 아래의 음식은 거짓된 포만과 배고픔을 야기하며 끝없이 탐닉하게 하는 욕망의 기표들이다. 이 욕망의 기표들은 세부나 색이 모호하지만 날카로운 부분 없이 부드럽고 풍부한 부피감이 특징이다. 풍선처럼 과장되고 터질 것 같은 실재의 유사물에는 얇은 표면 위에 유혹의 요소를 전면 배치한다. 손쉽게 요리하기 위해, 잘 소화되기 위해 과도하게 처리된 식재료는 배설물과 유사해진다. 빠른 속도감으로 칠해진/그려진 그의 작품은 관객의 시선이 타고 흐를 수 있는 장이 된다. 흐름은 한 작품 내에서 그리고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요리라는 방식으로 부드러워진 형태에 분홍의 기미가 있는 그의 작품에서는 단내가 난다. 






작가는 원래 핑크를 안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분법이 엄연히 작동되는 상징계에서 여성과 상투적으로 연관되는 핑크는 경멸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색채학자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여자아이는 분홍색, 남자아이는 하늘색이라는 관습이 불과 20세기에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뜨거운 색과 차가운 색이 혼합된 분홍은 타협의 미덕을 상징한다. 김진의 작품과 관련돼서 강조될 만한 핑크의 속성은 그것이 피부를 떠올린다는 점이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인간의 피부색을 회화에서는 ‘inkarnat’라고 부르는데, 이 개념은 육화(肉化)를 뜻하는 ‘inkarnation’에서 기원한다. 김진의 핑크빛 음식은 에로틱함을  생각하게 한다. 캐롤 M. 코니한은 [음식과 몸의 인류학]에서 음식과 섹스는 은유적으로 서로 겹쳐진다고 말한다. 몸의 경계를 가로질러 합체되는 두 행위는 모두 생명과 성장에 필요하다. ‘모든 문화는 음식과 섹스를 조절하는 여러 관례와 금기가 있다’(캐롤 코니한).


인류학적 맥락에 의한다면, 핑크빛 가득한 김진의 음식 풍경에 내재한 성(性)은 여성이다.  그의 핑크는 노랑이나 빨강같은 기미가 남겨 있어 핑크같지만 핑크는 아닌 색이다. 작가는 그 색감이 가장이나 가상 같은 느낌을 받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핑크는 상투적으로는 고기의 색이지만 그의 작품은 고기든 뭐든 재현은 아니다. 고기의 색을 결정하는 피색의 변조다. 흰색이 많을 때 창백한 느낌이다. 핑크의 기운은 피를 숨기는 매력적이고 달달한 분위기 연출에 적절하다. 설탕이나 크림이 잔뜩 들어간 음식물들은 인간에게 수시로 닥쳤던 기아를 대비해야 했던 시대가 지났어도 몸이 여전히 선호하는 물질이다. 그래서 그만큼의 자제도 필요하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분홍은 언제나 달콤한 사탕의 색이라고 말한다. ‘분홍은 즐거움의 색이다. 분홍을 보면 달고 부드러운 맛이 기대된다. 분홍 케이크가 더 달게 보인다. 후각적으로도 분홍은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장미 향기를 연상된다’(에바 헬러). 








김진의 색감은 색채학자가 묘사한 분홍보다 더 많은 크림 더 많은 설탕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분홍이 ‘패션 액세서리와 싸구려 플라스틱 제품의 색’(에바 헬러)이라면, 건강에 해로울 첨가물이 많은 싸구려 음식의 상징에도 적합하다. 캔버스의 크기가 달라도 색감을 통해 이어지는 작품은 14미터 길이의 전시장 벽에 설치된다. 여러 크기의 캔버스가 여러 높이로 걸리는 설치 방식은 크고 작은 화면들에 가상의 원근법을 부여한다. 그림은 창이라는 오래된 관례가 작동될 때 작은 작품은 멀리 큰 작품은 앞에 있는 듯 여겨지며, 전시장 벽은 보다 공간감 있게 설정된다. 때로 작품 속 식재료(큰 빵이나 고기)들처럼 일정한 크기로 잘려진 모습으로도 보인다. 그 경우에 전시장의 벽은 거대한 식탁의 생략된 부분이 될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그러한 방식의 먹거리나 소비재로 과포화된 현실을 말한다. 유사한 양상이 벽에 가득 채워진 것보다 여백들이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보르헤스의 픽션에 나오는 지도처럼 지도가 너무 자세할 때 전 영토를 뒤덮게 되는 파국적 사태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김진의 드로잉, 그리고 드로잉 같은 방식으로 훅훅 그려지는 회화는 그가 작업을 하면서 개념을 잡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정확한 나침반이나 지도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아닌, 가면서 지도를 그린다. 작업실 바닥에 흘러내린 물감은 그리기와 지우기가 크게 구별되지 않는 붓질의 흔적이다. 그의 작품에는 빛이 과도하게 넘치지만, 작업 방식은 광학적 투명함 대신에 미지의 대상과 밀착하여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촉각적 방식이 주를 이룬다. 그리면서 생각하는 그는 이성보다는 직관으로 파헤치며 아직도 길을 찾고 있는 중이다. 매순간 묻고 대답하며 갈림길이 나타났을 때 고뇌한다. 김진은 한 주제를 보통 2-3년 하다가 다른 것으로 넘어간다고 하는데, 정물 시리즈에 오랫동안 발이 묶여있는 상황이다. 작품에 흐르는 과도한 빛은 암중모색중인 작가를 숨겨준다. 

 

출전; 갤러리 플래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