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학적 코드화의 세계에서 그림그리기
이광호 전 (8.29—10.26, 부산조현화랑)
김홍주 전 (9.27—10.25, 스페이스21)
이선영(미술평론)
정보화된 세상은 점차 시각적인 코드로 변화해 간다. 육안이 아니라 스캐너만 대면 되는 코드는 빨리 처리되어 생산과 소비의 주기를 더욱 빠르게 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코드는 매끈해야 잘 읽힌다. 빛을 직접 갖대 대고서 정보를 해독하는 메카니즘은 시각성의 단축적이고 자동적 실행이다. 바코드나 QR코드로 환원되는 문자나 숫자는 코드만으로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정보로 압축된 세계는 다시 수수께끼가 되었다. 수수께끼에 접근하는 문턱들은 창과 방패의 싸움으로 점차 고도화되어 간다. 온갖 이해관계로 점철되어 뿌옇게 된 현실을 그대로 지각하는 것은 어렵다. 예술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에 가깝게 지각하기 위해 이러한 겹겹의 불투명성을 걷어내려는 움직임과 함께 한다. 감각이 갱신되는 시대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자리했다. 예술은 코드와 코드 사이의 빈 틈에서 코드로 환원될 수 없는 영역을 탐구한다. 정보화 사회 이전에도 근대적 시각성의 근저에는 코드화 경향이 내재되어 있었다.
시각보다 촉각은 코드화가 되기 힘든 영역이다. 하지만 보다 직관적이다. 촉각은 가장 먼저 켜지고 가장 나중까지 남아있는 감각이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김홍주와 이광호의 전시는 광학적 코드로는 환원될 수 없는 촉각적 영역을 활성화한다. 그들은 그 마술과도 같은 필치로 인해 극사실주의와 연관되어 읽히기도 했지만, 이번 전시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났듯 세필을 구사한다는 점 외에 큰 연관은 없다. 추상미술과도 다른 점은 그들의 붓질이 허공이 아니라 참조대상과 나란히 있다는 점이다. 세계는 그들의 출발이며 예술적 여행 이후에 복귀해야 하는 장이다. 그들의 소재인 자연이나 인물은 아직도 그 전모를 파악하지 못한 실재로 남아있다. 온갖 ‘포스트-’ 증후군의 이론들이 주장하듯 실재에 닿기 힘들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뭇잎 한 장 속에 겹쳐 그린 김홍주의 지형도나 풍경을 작은 화면에 나눠 담아서 거대한 벽에 펼쳐낸 이광호의 작품은 보이는 세계를 보다 세밀하게 구현하려 한다.
하지만 총체성에 대한 야망은 포기한다. 대신에 각자 선택한 항목에서 세계를 다시 발견한다. 김홍주의 나뭇잎 한 장, 이광호의 습지 한 모퉁이가 바로 소우주와 대우주를 연결하는 지각의 문이다. 여러 차원이 교차되는 그들의 작품은 세밀한 붓질에도 불구하고 참조대상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갖가지 부대적 장치를 통해 변형을 일삼는다. 눈앞에 놓인 무엇을 그리는 듯하지만, 끊임없이 다른 길로 미끄러지는 김홍주의 작품은 작가의 일탈을 관객 또한 반복하게 한다. 흐릿하게 나온 사진도 참조하는 이광호의 초상은 명확하지도 불명확하지도 않다. 그들에게 대상은 그리기를 위해 잠시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붓질은 호흡 하나하나가 실린 집요한 것이지만, 추상화같은 조형언어의 자율성을 쉽게 가정하지 않는다. 추상미술은 피상적인 리얼리즘 만큼이나 쉽게 장식화나 관념화에 빠질 수 있다. 김홍주와 이광호의 전시는 미학적으로 이항대립을 이루는 듯한 두 길을 동시에 피하는 또 다른 길로 안내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충만한 잠재적 촉각성을 그림으로 현실화하는 길이다.
촉각적으로 본 세계
전시장 1층에 동일인을 그린 세 점의 초상화는 흐릿한 표현 덕분에 들어온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눈동자가 움직이는 듯한 편재하는 시선이 있다. 전시부제 ‘시선의 흔적 Traces of Gaze’은 고정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시선을 말한다. 응시(Gaze)는 시각성(opticality)과 달리 일방적이지 않다.(새로운 미술사를 위한 비평용어 31의 ‘응시’(마거릿 올린) 참조) 하나의 본질을 재현하겠다는 관념적 자세가 아니라, 마주한 세상과 같이 무수한 반복과 차이를 실행한다. 뉴질랜드의 습지를 그린 작품은 인물의 배경에 불과했지만, 이내 작가의 눈을 찌르는 푼크툼이 되어 작품 전면을 차지하게 된다. 물도 뭍도 아닌 습지는 생태학적으로도 생물다양성의 보고이며, 그만큼 다양한 요소들로 가득한 장소다. 이리저리 뒤얽히는 식물은 그대로 회화적 궤적과 일체화된 야생적 바탕이 되었다. 식물들은 위로 자라나는 중인지 쌓여있는 것이지 불확실하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여 착종된 무분별한 섬유질적 요소는 자연의 겹과 결에 상응한다. 그가 본 풍경의 재현은 아니며 원시적이고 미분화된 상태의 무엇을 가리킨다.

부산 조현화랑 이광호 전시전경(사진 출전은 갤러리에 있음)
그것은 인공과는 차별적이고, 자연이라는 두툼한 실재의 양상이다. 작가는 겸손한 자세로 한구역씩 그려나간다. 원근법같은 일괄적 시점은 자리잡지 못한다. 한계 없음은 풍경 전체를 일괄하기 힘든다는 점으로 나타난다. 맞은편 벽 한 귀퉁이에 걸쳐 설치된 초상은 관객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초상화 시리즈는 핀홀 렌즈라는 원시적 광학 장치를 통해 포착된 흐릿하고 불완전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긴 노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낮은 해상도의 렌즈로 잡힌 명확치않은 초상의 눈동자는 고정되지 않고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야기한다. 재료는 다소 틀리지만 대부분 유화이며, 모두 [무제]로 붙여진 가로 19점, 세로 4점이 격자형으로 배치된 76개의 작품들은 유기적 전체로 구성되는 것이 아닌 집합적 나열이다. 거대한 벽에 그리드 형식으로 배열된 작품은 한눈에 볼 수는 없다. 작가가 100x90cm의 캔버스 하나하나에 담은 풍부한 촉감의 세계를 하나하나 향유할 수 있을 따름이다.
<Blow-Up>연작은 ‘수천 장의 습지 사진을 참고하여, 촉촉하게 적신 캔버스 위에 붓질을 하고, 판화용 니들로 밝은 부분의 라인을 긁어내며, 고무붓으로 흰색 이끼 부분을 표현하는 등 이미지의 경계를 해체하면서도 밀도감을 높였다'고 한다. 여기에 뿌리기 기법까지 가세하여 촉각성은 더욱 강조된다. 물론 장면들은 끊어질 듯 이어지지만 명확한 이음매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잘 보이지 않은 듯 미간을 찌뿌리는 듯한 늙은 여인의 초상은 작가가 그동안 너무 열심히 그려와서 시력이 약화된 상태도 반영하는 것은 아닐지. 금발로 염색한 동양 여성의 초상은 형태를 이루는 외곽선은 불확실해도 풍부한 색감은 전달된다. 형태가 매끈한 화면에서 선의 활주로 정확한 재현이 가능하다면, 색은 촉감과 더 밀접하다. 색은 머릿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인물이 입은 옷의 재질 또한 색감을 다르게 한다. 눈 색은 눈을 이룰 세포들의 배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촉각에 대한 관심사가 더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은 그가 자주 그려왔던 선인장인데, 그 매력적인 식물은 가시의 촉각성이 형태와 색채를 결정한다.
전시장 초입에 그물망 속 김홍주의 초상은 한 화면에 여러겹의 이미지를 교차시킨다. 대지와 함께 요동치는 인간은 양자의 긴밀한 관계를 말해준다. 그에게 자연은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작업을 시작하고 이끄는 동력일 따름이다. ‘어딘가의 풍경: Scenes from Elsewhere’ 전은 이것저것이 한데 모여있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풍경의 속성을 활용한다. 그의 풍경은 어디인지를 확정하지 않는다. 무엇도 누구도 확실하지 않다. 불확실한 것을 자세하게 그린다는 것은 역설이다. 불확실하니까 확실하게 하기 위한 도전적 태도이자 피상적으로 고정되는 이미지에 대한 불신이다. 화가의 불신은 다소간 분명해 보이는 것이 이질적인 것으로 꿈틀꿈틀 변형되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은 만져질 듯 실감나는 것이지 본 것을 확증하는 것은 아니다. 김정은(미술평론가)은 그의 작품을 ‘털 몇 개로 이루어진 동양화용 세필이 캔버스 천 표면의 올 하나하나에 부딪힐 때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면서 그림을 그릴 때 몸으로 느껴지는 접촉 감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촉지적 회화’라고 평가한다.

스페이스 21 김홍주 전시전경(사진 출전은 갤러리에 있음)
김홍주의 작품은 그림 속에 또다른 그림들이 있다. 모더니즘의 이상처럼 한눈에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는다. 여러 이국적인 건물과 글자들이 자유롭게 배치된 작품에서 산과 강은 에로틱하게 얽힌 인체로 변모한다. 여러 도상의 스티커를 떼어 붙이는 아이의 놀이처럼 비어있는 곳에 적당한 이미지를 끼워 넣는다. 그것은 르네상스 원근법이 확립되기 이전의 지도의 방식이나 동양화의 여러 시점과 비슷하다. 물론 그 지도의 모델은 현대와 같은 기호적 지도가 아니라, 미지의 장소와 괴물들도 우글거리는 그림지도이다. 창자나 그 안의 배설물을 떠올리는 덩어리들은 몸의 안과 밖을 동시에 풍경화한다. 세필로 자세히 그렸지만, 화면 아래에 흘러내리는 물감들은 그것이 화가의 진액을 빼내서 생산한 것임을 말한다. 이러한 흐름은 중층적 화면에 무슨색이 사용되었는지를 스펙트럼처럼 펼쳐 보인다. 잎의 실루엣을 가진 거대한 형상은 그 내부가 생략되어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재현의 역사는 그림자에서 거울로 그 모델이 이동함으로서 타자보다는 동일자가 강조됨을 보여준다.
그는 무언가를 자세히 그리면서도 눈밖의 이질성으로 끝없이 탈주한다. 꽃이나 잎이 크게 그려진 것은 한 시인이 모래알에서 우주를 본 것과 같은 차원이다. 꽃 한송이 이파리 한 장은 수없이 갈라지는 두갈래 길의 연속인 작업 선택지의 보고인 셈이다. 둥근 물방울로 연상되는 푸른 얼룩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는 수많은 흐름들이 있으며 그려진 그림임을 잊지 않도록 흘러내리는 물감도 있다. 김홍주는 배설물을 많이 그렸는데 대표적인 것은 똥으로 그린 글자다. 온 힘을 잔뜩 주고 내보내야 하는 똥은 유기체가 원활하게 살아가는데 필수적이다. 자신이 먹은 것을 완전히 소화해서 밖으로 내놓은 것, 그것이 타자로 이루어진 동일자가 타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하는 푸른 이파리 한 장에는 수많은 길이 연결되어 있다. 여백같은 빈 배경에 뚫려있는 길(엽맥)은 있음과 없음, 생과 사, 생성과 소멸 사이의 문턱을 낮춘다. 누렇게 변색된 이파리는 힘든 배변과 광배를 두른 부처상이 동시에 보인다. 미시와 거시의 관계처럼 비천함과 숭고함이 자연적 형상 안에서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출전; 아트인컬쳐 2025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