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집으로 발송되는 『서울아트가이드』를 접하면 우선적으로 찾아보는 내용이 부고난이다. 그새 내가 아는 미술인이 또 죽은 것이다. 이 차갑고 무표정한 부고난의 기사는 삶과 죽음을 기계적으로 나눈다. 나는 아직 살아있고 기사 속의 작가는 더 이상 이곳에 없다.

사진계의 어른인 육명심(1933-2025)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사를 보고 알게 되었다. 나는 선생의 그 선방(禪房)과도 같은 작업실을 떠올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입구에 잘생긴 문인석 한 쌍이 놓여있어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곳에서 선생은 참선을 하거나 정신적 수양과 관련된 책을 주로 읽으셨다. 홍익대 대학원에 사진전공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던 시절에는 함께 논문 심사도 했다. 사진사와 미술이론에 해박한 육선생님은 모더니즘을 ‘모다니즘’이라고 흥미롭게 발음하면서 예리한 지적을 하곤 했다. 이후 육선생님은 항상 본인의 작품집이 나오면 사인을 해서 보내주셨다. 그것은 여간 정성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한국적인 사진에 대한 여러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육명심 Yook Myong-Shim』, (2015, 열화당) 표지


그이의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강릉에 사는 무당 박용녀의 초상을 카메라 렌즈에 가득 담은 것이다. 그의 사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상징성과 강렬함을 주는 작품이다. 그 외에도 장승, 제주 모살뜸을 촬영한 사진도 매력적이다. 무당 사진은 우리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강하게 던지는 듯하다. 똑바로 쳐다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날카롭게 묘사된 무당의 눈이 빛난다. 작가는 무당의 눈빛이 발산하는 신기를 보여준다. 그 넋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도, 쉽게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수한 시간과 사연이 각인된 주름과 형형한 눈빛이 공포와 두려움을 안긴다. 주름이 잡힌 얼굴과 매서운 눈매, 꽉 다문 입술, 무구용 모자에 딸린 영락같은 구슬들이 직사각형 화면을 날카롭게 자르며 들어오기에 보는 이들은 거부할 수 없이 온통 저 얼굴과 대면하게 되고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한국인의 얼굴을 담고자 했다. 이른바 한국인의 ‘무의식의 심층’이 표현하는 트라우마를 포착하고자 한다. 한국적인 소재가 아니라 한국적인 사고나 의식의 눈으로 본 대상을 찍고자 한다. 그것은 과연 가능할까? 한국인의 얼굴, 나아가 한국적인 사고란 무엇인가? 그는 오랜 세월 이 땅에 살아온 한국인의 전형성을 지닌 얼굴을 사진에 담고자 하는데, 그것은 결국 껍데기가 아니라 영혼이나 기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사진으로 가능할지는 알기 어렵다. 하여간 이 얼굴 하나를 보는 순간 나는 사진 속 무당의 눈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무엇인가를 방사한다. 한국인이 지닌 정신세계, 얼과 문화, 그리고 유전자에 녹아 있는 그 무엇을 사진으로 담고자 한 그의 여정이 만들어낸 결과가 저 얼굴일 것이다. 이 무당은 실제 우리 개개인이 가지는 잡다한 의미 속에 열려 있어서, 우리가 끌어모으고, 불러들이는 수많은 이미지와 함께 우리의 무당이 되어 간다.

좋은 사진은 주어진 외형에 머물지 않고 “표면에 안착된 기표들이 연쇄적으로 유희하고 충돌하면서 다양한 의미를 열어주는 사진”이다.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다층적으로 무한히 퍼져나간다. 이 무당의 얼굴이 지닌 의미 또한 그렇다. 이 사진은 단지 한국의 무당 얼굴을 찍은 것에 머물지 않는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형성해온 그간의 역사와 시간, 정서와 종교적 심성들이 스며들고 달라붙어서 여러 의미를 파생한다. 누군가의 얼굴을 재현한 사진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 비시각적인 것까지 마구 건드리면서 다층적으로 읽힌다. 따라서 이 사진은 열린 상징 체계가 된다. 작가는 사진을 통해 그 상징적 공간을 열어놓는다. 우리의 마음이 그 상징들을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한국인의 일상 속에서 체험되는 샤머니즘적 요소이다. 그의 사진은 바로 그것을 끄집어내고 있다. 이처럼 그는 우리 한국인의 마음 밑바닥에 침전되어 있는 것에 겨냥된다. 그런 소중한 작가가 사라졌다. 한국사진계가 잠시 어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