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대, 오리에서 나를 보고 우주를 보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원래부터 그런 존재를 의미하고, 그 자체로 이미 자족적이고 완전한 존재의 존재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연에는 인간의 인식을 위한 자리가 없다. 인간이 저를 뭐라고 부르든 자연은 인간의 인식 밖에 있다. 흔히 인간도 자연이라는 말은 인식을 벗은 인간, 인식을 내려놓은 인간, 인식 밖의 인간, 그러므로 벌거벗은 인간이라는 전제를 인정할 때 비로소 성립 가능한 말이다. 역설적이고, 부조리하고, 어쩌면 당연한 것이 인간은 이런 자연을 통해서만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원래의 자기, 벌거벗은 자기, 잃어버린 자기, 그러므로 원형적인 자기(칼 융)를 자연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상실한 고향(게오르그 짐멜)을 발견한다고 해도 좋고, 존재가 존재다움을 실현한 순간 그러므로 존재의 현현(하이데거)과 맞닥트리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현대인은 상실감을 앓는다.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하는 징후고 증상이라고 해도 좋다. 그가 현대인인 한 어느 정도 보편적인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작가 김상대가 그랬다. 역설적으로 상실감이 작가가 자신의 삶을 돌파하는 출구가 되어주었고,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상실감을 느꼈다. 자신을 다 태워버려 더 소진할 자신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으로의 도피를 생각했다. 그렇게 탈주한 자연에서 오리가 눈에 들어왔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채 물과 함께 흐르는 오리가 평화롭게 보였다. 그리고 하늘을 또 다른 물처럼 유영하는 오리 떼를 보고 자유롭다고 느꼈다.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즈음에 작가는 도예공방에 다니고 있었다(지금은 작가 자신이 작업실을 겸한 도예공방을 운영하고 있지만). 흙을 만지면서 처음으로 평화를 느꼈다. 아마도 물과 함께, 물만큼이나 수동적인 질료인 흙에서 자연의 본성에 부합하는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했을 것이다. 능동적인 자신을 내려놓아도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흙의 본성 그러므로 자연의 본성에 자신을 맡겨도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에 작가는 실물 크기 그대로의 오리를 빗었다. 그리고 점차 오리 만들기가 손에 붙을 때 즈음에는 오리 떼를 빗기 시작했다. 단품의 오리에서 오리 떼로 작업이 넘어오면서 덩달아 오리의 크기도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작아졌다. 하나하나 직접 손으로 빗어 만들고, 색을 칠하고, 유약을 발라 가마에 구워낸 오리 떼를 캔버스에 붙였다. 그렇게 상실감에서 비롯한 작가의 작업이 오리를 매개로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전에 없던,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업을 얻었다.
그렇게 얻은 자신의 작업을 작가는 도조첩화라고 불렀다. 도조 그러므로 도자기 조형을 화면에 붙여 고정하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회화적 평면을 확장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회화와 도조,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자기식의 탈장르를 실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할 것이다.
바탕화면을 보면, 처음에 작가는 오리가 있을 만한 물가와 구름이 흐르거나 노을 진 하늘과 같은 자연풍경을 배경 화면으로 그려 넣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자연 그대로의 닮은꼴을 화면에 옮겨 그리는 식의 재현적인 방법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점차 빨갛고 파란 그리고 때로 하얀 단색의 화면으로 넘어가면서, 평면성이 강조되고 추상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화면으로, 재현적인 화면에서 관념적인 화면으로 변화한다. 모르긴 해도 그 과정에서 평면성으로 나타난 모더니즘 회화의 준칙에 대한 형식논리가, 단색화의 형식논리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좀 설명적이다 싶은 자기반성적인 인식이 있었을 것이고, 자연에 대한 감동을 그림으로 옮길 때 꼭 재현적인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자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내면 풍경으로 자연풍경을 대신하는 방법과 과정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바탕화면이 그렇다면, 그 위에 얹히는 오리는 어떤가. 화면을 보면, 오리 한 마리 한 마리가 조형의 최소단위에 해당하는 모나드(원소, 단자)가 되어 전체 화면으로 퍼져나가면서 군집을 이루는, 그렇게 집단을 일구면서 물 위를 유영하는, 하늘을 가르는 장관을 연출한다. 밑도 끝도 없이 퍼져나가면서 가없는 우주를 구성하는 원소를, 낱낱의 점으로 화한 존재를 보는 것도 같다. 흐르는 것과 같은 역동적인 느낌의 재현적인 패턴을 만드는가 하면, 픽셀과 같은 금욕적인 느낌의 기하학적인 패턴을 만든다. 하나의 단위원소가 반복 재생산되면서 패턴을 만드는 구조를 모듈이라고 하는데, 작가의 작업에서 단위원소는 같은 듯 다른 것이므로, 차이를 생성하면서 반복되는(질 들뢰즈) 비정형 패턴에 바탕 한 생성형 모듈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멀리서 볼 때 그렇고, 세부는 또한 어떤가. 작가는 오리 하나하나를 일일이 손으로 빗어 만들었다. 심지어 오리 조형을 가만히 보면 작가의 손길이 여실하고 지문이 오롯하다. 이토록 작은 크기에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이 놀랍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일일이 손으로 빗어 만든 것인 만큼 같은 오리는 한 마리도 없다. 정형이든 비정형이든 패턴을 만드는 모나드라고 한다면 주형 작업을 거쳐 좀 더 쉽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작업을 진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작가가 오리를 발견하게 된 계기가 상실감이었고, 그 상실감을 치유해준 계기가 자연이었던 만큼 작가의 작업에서 오리는 오리 이상이었다.
단순히 오리 조형을 빗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오리 조형을 통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빗는다고(잠재적인 자기, 잃어버린 자기, 억압된 자기를 되찾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작업 전 과정에 작가가 직접 참여하고 자신이 투사되는 것 그러므로 오리가 자신의 화신(분신)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앞서 오리 조형에 작가의 지문이 여실하다고 했다. 바로 자신의 작업이 정체성 문제 그러므로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주목되는 부분이 그림자다. 작가의 작업은 평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입체로 패턴을 만든 것인 만큼 그림자가 여실하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오리 한 마리 한 마리가 그림자 하나씩을 거느리고 있다. 그림자가 없는 존재는 없다.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도 없다. 존재가 운명이라면 그림자도 운명이다. 상실감도 운명이고, 치유도 운명이고, 치유를 넘어선 승화(오리를 계기로 자기만의 형식을 얻은 것)도 운명이다. 여기에 조명 여하에 따라서 그림자가 달라지고 조형이 다르게 보인다. 형식으로는 가변적인 조형을 의미하고, 의미로는 환경 결정적인 존재(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는 그림자에 어쩌면 오리 그러므로 자연, 다시 그러므로 자기 자신만큼이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담았다.
존 버거는 다르게 보게 만드는 것, 다르게 보는 방식을 제안하는 것에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고 당위성을 찾는다. 그렇게 작가는 오리에서 나를 보고 우주를 보는 자신만의 형식을 제안한다. 새삼스럽게, 어쩌면 전혀 새삼스럽지 않게 작가의 작업은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고 물과 함께 흐르는 오리를, 구름이 흐르고 노을 진 하늘을 또 다른 물 마냥 유유자적하는 오리들의 군무를 쳐다보게 만든다. 생각도 없이. 미쳐 쳐다본다는 의식도 없이. 평화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