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킴(김순란)/ 애도의 형식, 여로 그러므로 삶의 길에 꽃을 바치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예술에서 결정적인 것이 동기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가 정해지지 않으면 형식을 정할 수도 없다. 창작 이유가 흔들리면 그림도 흔들린다. 동기가 불분명하면 그림도 불분명하고, 동기가 절실하면 그림도 절실해진다. 그리고 그 절실함이 창작 주체를 넘어 관객을 전염시키고 감동을 준다. 비록 개별 주체의 사적 경험이지만,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하이데거는 예술이 하나의 세계를 낳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의 세계를 여는 것이라고 했다. 가능한 세계 그러므로 잠재적인 세계를 현실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작가 란킴의 작업이 그렇다. 작가의 작업은 절실함으로 하나의 세계를 여는(자기라는 세계를 여는, 보편적으로는 존재 일반을 열어 보이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개인적인 서사에 바탕하고 있는 그림, 개인적인 서사를 절실함으로 응축하고 있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절실함의 다른 이름인 내적 필연성이 밀어 올린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 만큼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을 그린 그림, 자기반성적인 그림, 그러므로 일종의 자화상(어쩌면 존재 일반 그러므로 모든 우리 저마다의 자화상)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이처럼 개인적인 서사를 응축하고 있는 절실함의 성분이 무엇인지 볼 일이다. 상처다. 결핍이다. 결여다. 토마스 만은 예술은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결핍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고 했다. 롤랑 바르트는 상처 그러므로 트라우마를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이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남기는 푼크툼이라고 했고, 질 들뢰즈는 표상 없는 기호(표상이 없으므로 알 수도 단정할 수도 없는 기호)라고 했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개인적인 서사에 함축된 절실함을, 내적 필연성을, 상처를, 결여를, 결핍을 밀어 올리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고, 자기 내면의 어둠을 열어 보이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자기 내면의 어둠이 존재 일반의 어둠을 상기시키는, 그렇게 확대 재생산되면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정작 작가의 그림 어디에 결여가 있고, 결핍이 있는가, 상처가 있고 어둠이 있는가. 엄밀하게 말해 작가의 작업은 그림은 아니다. 페인팅 대신 섬유를 소재로 한 섬유 조형이다. 섬유를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회화적 평면을 실현한 것인데, 소재의 확장을 통해 회화적 평면의 확장을 꾀한 경우로 보면 좋을 것이다. 더욱이 섬유를 소재로 재구성한 형태가 추상이다. 흔히 추상은 의미 내용보다는 순수한 형식논리에 천착한 유의 그림으로 알려진 만큼 상처와 같은, 어둠과 같은, 결여와 같은, 결핍과 같은 존재론적 사실이나 서사적인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표면(형식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사실)이 그렇다면 그 이면에서 의미 내용을 찾을 수밖에. 작가의 작업이 그런 경우로서 추상의 형식을 빌려 구상적 사실을 표상하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고, 그렇게 서사적 현실을 암시하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라고 했는데, 그런 암시의 기술이 자기표현을 얻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여기에 작가의 작업을 그저 추상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이,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여로>라고 부른다. 삶의 길이고, 살아온 길이다. 온통 검은 천으로 빼곡한 사각형의 형태를 두고 하는 말이고, 더러 일부 화사한 색채를 덧입고 있는 원형의 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삶이란 검은 천처럼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 8할이고, 밝은 원색의 천처럼 나머지 2할의 화사한 봄날이 있을 뿐이라는 세간의 염세주의(어쩌면 진실?)를 반영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여기에 작가는 검은 천이 먹색의 오색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주지하다시피 먹색을 오색이라고 한 것은, 다만 오색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사실은 오만가지 색을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색감으로 표상되는 모든 종류의 삶의 질감을 함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색감도 그렇지만 질감이 인상적이다. 작가의 조형에 엿보이는 질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이며, 또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작가는 근 35년간 원단을 소재로 옷을 만드는 일과 작업을 병행하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원단을 만지면서 기억의 질감을 더듬고 그 질감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 과정에 핑킹가위가 있다. 천을 절단하는 데 쓰는 가위로 절단할 때 천의 가장자리에 톱니 모양의 요철을 만드는, 말이 가위지 사실상 재단기(계)라고 해야 할 도구를 이용해 천을 재단한다. 기계가 천을 재단할 때 열을 발생시켜 가장자리 선을 녹이는, 그렇게 올이 풀리지 않고 고정되는 것인데, 올이 풀려 헤어지거나 흩어지지 않는 삶의 염원을 담았다고 했다(작가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삶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재단한 천 조각을 접어서 50호 캔버스에 만 송이가 빼곡한 검정 카네이션을 피워올렸다. 카네이션? 검정 카네이션? 죽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큰엄마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했다. 화면을 가만히 보면 빼곡한 카네이션 사이사이로 움푹 파인 길들이 보이는데, 밭을 갈 때 한쪽 다리가 없는 큰엄마가 엉덩이를 끌며 지나간 자국이라고 했다. 그 자국이 꼭 하늘에 떠가는 뭉게구름을 닮았다고도 했다. 삶의 질곡이 만든 자국 그러므로 상처의 흔적을 자유자재한 구름에 비유한 것이, 구속과 자유를 대비한 것이 작가의 심성을, 성정을, 애틋한 마음을 엿보게 만든다. 최근 담론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으로 치자면 타자와 윤리 이후 애도가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상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여전히 상실에 붙들린 상태가 우울(멜랑콜리)이라고 한다면, 상실을 받아들이고 놓아주는 것이 애도다. 카네이션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이 이런 타자와 윤리와 애도를 관통하고 있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검정 카네이션을 바쳐 사자를 향한 애도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는 핑킹가위로 자른 천 조각을 접어 카네이션을 만든다. 요철이 있는 천 조각을 중첩해 가장자리가 가지런한 금욕적인 느낌의 기하학적 패턴을 만들고, 가장자리의 단면 사이사이로 색상 띠를 강조한 상대적으로 경쾌한 느낌의 패턴을 만든다. 천 조각을 돌돌 말아 단단한 심을 만든 연후에 마치 모를 심듯 화면에 심어나가는 방법으로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운동성이 강한 패턴을 만들고, 자연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비정형의 유기적인 형태를 만든다. 아마도 앞으로도 또 다른 형태와 패턴에 대한 형식실험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또 다른 얼굴과 표정의 삶의 질감을 열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작가는 자신의 작업 소재로서 새로이 화선지를 도입하고 있다. 천을 소재로 한 작업이 선명한(어쩌면 인공적인 그러므로 현대적인 느낌의) 색상을 얻을 수 있다면, 화선지를 소재로 한 작업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부드럽고 우호적인 느낌의 색감과 질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지금까지 섬유에 주력했던 것을 넘어 종이로까지 소재 확장을 꾀한 경우로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소재가 달라지다 보면 형태 또한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다. 

작가는 섬유를 소재로 한 이 일련의 작업을 <기억의 촉감>이라고 부른다.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이며, 작가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다. 앞서 작가는 원단을 만지면서 기억의 질감을 떠올린다고 했고, 그 질감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을 한다고 했다. 기억을 매개로 작가의 개인사를 소환하는 것인데, 그렇게 기억을 더듬는 주제(의식)와 섬유라는 소재가 부합하는 면이 있고, 형식과 내용이 부합하는 면이 있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작가는 반복(사실은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적인 상징(작가의 경우에는 패턴)을 매개로 어쩌면 이런 원형에, 원형적인 이미지에, 원형적인 존재에 가닿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결여와 결핍, 상처와 어둠으로 숨은, 그 자체 이미 치유와 위로를 위한 계기라고 해도 좋을, 저마다의 원형적인 자기 앞에 서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