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이강/ 사물 인격체로 대리되는, 정물을 재사용하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모더니즘의 형식논리에 천착한 추상미술이라면 모를까,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형상이 있고 구상이 있는 그림에서 주제는 알게 모르게 그림의 의미와 내용을 뒷받침하는 단서가 될 수 있고,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 될 수 있다. 형식이 내용이고 내용이 곧 형식이라는 세간의 논리를 인정한다면,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과 의미를 넘어 형식마저도 해석할 수 있는 계기가 열린다. 여기에 태도가 형식을 결정한다는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작가의 개인사와 같은, 그림의 이면에 숨은 뜻마저 캐낼 수 있는 또 다른 계기가 열린다. 그러므로 전부라고는 할 수 없어도, 이 모든 논리와 계기를 상당할 정도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 주제일 수 있다.
Past the present. 주제 속에 과거와 현재가 다 있다. 시간을 주제로 한 것일까. 과거가 없이는 현재도 없다는 뜻일까. 현재를 만들고 생성하는 과거 그러므로 현재를 결정하는 과거라는 의미일까. 과거 위에 현재가 쌓이는 구조 그러므로 시간의 지층을 의미하는 것일까. 과거와 현재의 사이 그러므로 그 틈에 주목한다는 의미일까. 아마도 이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관심하고 있는 축이 현재보다는 과거를 향하고 있는 것, 최소한 현재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과거에 맞춰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현재를 통해 과거를 보는 것인데, 여기에 역사(학)로 나타난 거대 담론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그 자체 일종의 작은 역사 그러므로 미시적인 서사라고 해도 좋을, 개인사적인 경험이 매개되고 있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의식적으로 과거를 주제화한 그림이 아니라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형태로 과거가 견인되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적어도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일상적인 사물 대상을 모티브로 한 정물화의 현대판 버전으로 보이고, 그런 만큼 개인사 그러므로 작가의 사적 경험과 같은 자의식과는 일정한 거리두기가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작가의 자의식은 사물 대상을 모티브로 한 그림 속 어디에 어떻게 매개되고 간섭되는지 볼 일이다. 작가의 자의식이 직접 표출되는 대신, 그림 속 사물 대상을 빌려 우회적으로 그러므로 은유적으로 매개되고 있는 그림인 만큼 그 숨겨진 의미 그러므로 사물 뒤에 숨은 의미에 주목해볼 일이다. 여기에 작가가 왜 이토록 과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인지, 작가가 관심하는 과거는 작가의 그림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그리고 실제로 과거를 어떻게 현재 위로 되불러오고 있는지 볼 일이다. 여기서 과거를 현재 위로 불러오는 계기는 말할 것도 없이 기억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현재 시제에 속하는 일상적인 사물 대상 그러므로 정물과 과거의 기억이 날실과 씨실이 되어 하나의 직물을 짜는 서사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어릴 때 작가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두 남동생과 함께 캐나다로 유학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어머니는 정착 초기에 특히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세 명의 아이와 한 명의 어른>이라는 그림을 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 위에 알 수 없는 사물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을 뿐이다. 그림 위쪽으로는 햇빛을 피하기 위한 알록달록한 가림막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 무슨 상점 같기도 하다. 어린 작가가 보기에 테이블 맞은편에 있는 사람들이 궁금했을 것이다. 당시 관공서에서 오가는 말은 대화라기보다는 알 수 없는 오리무중 같았고, 상품을 흥정하는 가게처럼 보였을 것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당시를 유추해 본 그림이다. 어릴 때 캐나다로 유학한 만큼, 그리고 이후 미국 생활을 거쳐 현재에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하는 작가는 정체성 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동안 내국인으로서보다는 국외자로서 떠도는 삶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정체성 혼란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런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 같은 그림을, 특히 <세 명의 아이와 한 명의 어른>으로 나타난 제목에 숨은 뜻을 성장한 작가(회고하는 작가 그러므로 유년의 작가가 아닌)의 관점에서 또 다르게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제목에서 세 명의 아이는 각 캐나다에서의 자기와 미국에서의 자기, 그리고 한국에서의 자기로 분열된 작가의 분신에 해당하고, 한 명의 어른은 그렇게 분열된 자기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으로 나타난 현재하는 작가 자신일 수 있다. 후기구조주의에서는 주체를 타자들(작가의 경우에는 상실된 자기, 분열된 자기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고 보는데, 그런 주체에 대한, 분열되고 우연한 주체에 대한 관념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
마치 깨진 거울을 통해서 보듯, 아니면 먼지와 얼룩으로 희붐한 거울을 통해서 보듯 불완전한 기억을 통해 소환된 분열된 자기들이 현재하는 자기를 형성하고 만든다는 의미를 함축할 수 있다. 그렇게 현재하는 자기와 과거의 자기가 만나고 대면하는 상황 논리를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자기_타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고, 현재 시제를 사는 자기가 같은 거리에서 과거의 자기를 먼발치서 알아보고 스치는 상황을 소설에서 그린 적도 있다. 그렇게 작가는 이 그림을 통해서, 특히 암시적인 제목을 빌려서 그런 상실된 자기, 잊어버린 자기와 대면하고 싶은, 여기에 어쩌면 그리운 시절을 되찾고 싶은 불가능한 욕망을,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반성적인 욕망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연극무대처럼 배경에 장막이 드리워진 그림이 있다. 살짝 들린 장막 앞 무대(일상이라면 탁자) 위에 사각 버터 조각과 버터 칼이 놓여 있는 그림이다. 그림에 그려진 소재만 놓고 보자면 보통의 정물화로 범주화할 수 있겠고, 극의 형식으로 치자면 사람 대신 사물이 등장하는, 사물이 사람을 대신하는 사물 인격체가 등장하는 사물극이 되겠다. 사물의 의인화라고 해야 할까. 극 형식을 빌려 사물에 빗대어 작가 자신을 대리하고 증언하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무대 위 사물들이 작가를 어떻게 대리하고 증언하는가. 미국산 버터와 캐나다산 나이프가 한국 집에 진열된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는, 부제가 오리무중의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캐나다에서 유년을 보냈고, 이후 미국에서 성장했고, 지금은 한국 집에 와 있다. 그런 만큼 작가의 소지품에는 이 세 나라의 물건들이 자연스럽게 섞인다. 사실은 이처럼 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물들이 한자리에 있는 정경을 통해 작가 자신의 다국적인(존재론으로 치자면 다중적인) 정체성 문제를 환기하는 그림이다.
랭보는 내가 동시에 신이고 악마고 타자라고 했다. 후기구조주의는 내가 너라고 했다.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자기_타자)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는 미친 사람 속에 군대가 주둔한다고 했다. 환경결정론에서는 환경이 주체를 결정한다고 했다. 후기구조주의는 맥락이 주체(그리고 의미도)를 낳는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건너온(건네진) 너의 그러므로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다. 그리고 여기에 주목할 부분이 장막이다. 살짝 들려진 장막 뒤편으로 하늘이 보인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캐나다를 그리워하고, 캐나다에서는 미국을 그리워하고, 미국에서는 한국을 그리워하는,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그리워하는, 정처 없는 정체성을 의미할 것이다(보들레르는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그리워했다).
그렇게 작가는 정물이라는 장르화의 형식을 빌려, 사물 인격체가 등장하는 사물극의 형식을 빌려, 인생극장을, 다중적인 정체성으로 나타난 자기반성적인 극장을 전개해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칠흑처럼 어둑한 화면을 배경으로 마치 진공 상태에 부유하듯 목마가 떠 있는 그림이 있다. 여행하다가 우연히 본 조형물을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내달리는 말처럼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그리고, 좀 더 느리게 흘러가도 좋을 것이라는 현재의 상충하는 마음을 그린 것이고, 그러므로 시간에 대한 양가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했다. 제목이 <수평선(그리고 지평선) 너머>다. 정체성 문제는 경계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깊다. 그림과 제목에 등장하는 수평선 혹은 지평선 역시 경계다. 현실과 과거를, 현재와 기억을, 여기와 저기를 가름하는 경계다. 나는 보들레르처럼 여기서 서서 칠흑처럼 어두운 한가운데 성좌처럼 빛나는 희미한 저곳이 그립다. 유년이 그립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그립고, 상실된 자기 그러므로 아득한 자기가 그립다.
그렇게 작가는 체크무늬 바탕의 식탁보 위에 놓인 케이크 조각을 그렸고, 식탁 위에 놓인 빵을 그렸고, 기하학적 형태의 색띠 문양이 프린트된 그림으로 상표를 대신한 와인 병을 그렸고(상표를 대신한 색띠 형태의 문양이 TV가 끝나고 나면 나오는, 그렇게 밤새 그대로인 화면을 떠올리는 것이 불면의 밤을 상기시키기도 하는),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칠흑 같은 바다 위로 구름이, 조가비가, 소라 껍데기가 부유하는 그림을 그렸고(아마도 그리움을 상기시키는), 파란 타일 바닥 위에 세 개의 조개가 떠 있는(아마도 자신을 포함한 두 동생을 향한 또 다른 그리움을 상기시키는) 그림을 그렸고, 당구공과 당구대를 그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외형상 정물을 소재로 한 것이고, 일상을 소재로 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자신을 정물에 빗대고 일상에 비유한 자기 정체성 문제를 주제화한 그림이다. 여기서 정체성 문제를 매개하는 것이 기억이다. 그림 역시 희미한 기억처럼, 색바래고 빛바랜 사진첩을 넘기듯 고답적인 느낌이다. 형식과 내용이 부합한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캔버스 대신 나무 패널에 오일로 그림을 그렸다. 여기서 바탕화면으로 쓰인 나무 패널은 캔버스와도, 그리고 종이와도 다르다. 종이가 오일을 먹어버린다면, 캔버스는 마치 코팅하는 것처럼 표면에 불투명한 막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나무 패널은 종이와 캔버스의 사이 정도에서 색감을 조절한다고 해도 좋다. 투명과 불투명 사이를 조율한다고 해야 할까. 작가의 그림에서 보이는 전반적인 톤이 안정되고 색감이 가라앉아 보이는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약간은 차분한 느낌의, 마치 시간을 머금고 있기라도 하듯 고답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마치 색바래고 빛바랜 사진첩을 넘기듯, 깨진 유리거울을 통해서 보듯, 먼지와 얼룩으로 희붐한 거울을 통해서 보듯, 희미한 기억 저편의 자기와 만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