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te On/Off를 계기로 본 한국현대판화의 현재
_월인천강, 천 개의 강에 비친 하나의 달은 판화인가
고충환 | 미술평론가
한국현대판화가협회가 기획전 형식의 정기전을 열었다(2025/10.17-11.15. 답십리 아트랩). 협회 정기전과 함께, 중국 허베이 미술대학과의 교류전과 연례 공모전 수상작 전시가 동시 진행되는 한중판화교류전 형식의 전시라고 했다. 협회의 존재 자체가 한국현대판화의 역사이며 산 증인으로 받아들여지는 만큼(1958년 한국판화협회가, 그리고 1968년 한국현대판화가협회가 각각 창립했다) 전시가 주목받고 있다. 매번 전시 때마다 제기되는 것이지만, 성과를 자축하는 장으로서보다는 시대정신과 시대 감성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는, 이로써 한국현대미술의 한 축으로서 거듭나야 한다는 과제를 남기고 있다. 그런 만큼 이 전시를 계기로 한국현대판화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전시 주제가 흥미롭다. Plate On/Off. 판을 켜다/끄다. 판이 있다/없다. 판이 있는 판화와 판이 없는 판화. 판이 없는데 어떻게 판화라고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아예 회화라고 불렀다. 그렇게 전시 주제는 판화와 회화의 관계를 묻는 것이 되었고, 판화와 회화의 사이를 탐색하는 것이 되었다. 사실 이 물음(판화와 회화의 관계를 묻는)은 좀 우문 같은 부분이 있다. 진즉에 판화는 회화의 한 형식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에서 물음은 우문이 된다. 결국 판화의 장르적 특수성을 견지할 것인가 아니면, 판화를 확장해 회화와는 또 다른 회화의 가능성을 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어떤 식으로든 판을 매개로 해서만 존재 가능한 판화(여기서 간접성이라는 판화의 본질이 제기된다) 그러므로 정통판화는 제외된다. 시장이 어떻든, 현대성을 담보하는 것과 같은 세간의 평가가 어떻든 정통판화는 판화 고유의 미덕이 있고 영역이 있다(판화에 따라서 현대성과 무관한 판화도 있고, 고유성이 요구되는 판화도 있다. 그러므로 현대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 모든 판화에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희망 고문이라고도 하겠지만, 시대가 첨단으로 내달릴수록 오히려 그만큼 더 아날로그 판화와 오리지널 판화의 물적 가치는 대체 불가능한 가치가 된다. 회화가 그런 것처럼.
2000년대 초 새로운 밀레니엄의 광풍이 불 때 회화의 섣부른 죽음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영상작업이 대세가 되면서 영상작업이 회화의 자리를 밀어낼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회화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더 멀리 소급해보면, 19세기에 사진이 발명되면서 회화의 죽음이 거론된 적이 있었다. 사진이 회화의 재현 능력을 대체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때 회화는 오히려 비구상과 추상회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가깝게는, 백남준이 머잖아 종이책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지만(공교롭게도 판화의 역사는 인쇄의 역사 그러므로 종이책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런다고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종이책을 보고 읽고 만지는 것에서 오는, 물질과 직접 대면하고 교감하는 것에서 오는 감각적 쾌감은 대체 불가능한 쾌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정통판화가 아니라) 판이 없는 판화가 되고, 판화의 확장 가능성에 있다. 여기서 판이 없는 판화는 판화라기보다는 사실상 회화가 될 것이지만, 이보다는 판을 매개하지 않으면서 이미지를 생산하는 판화, 판이 있다 해도 사실상 판 개념이 무의미한 판화, 그러므로 어쩌면 비물질 판화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판화와 관련해서 정작 논의가 집중되는(그리고 의미 있는) 부분으로 치자면 여전히 판을 매개하면서 판화의 확장 가능성을 형식 실험하는 쪽에 있고, 가상현실과 결부되면서 판화의 정의가 재정의되는 비물질 판화에 대해서는 그 이후에나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판을 매개하면서 판화의 확장 가능성을 형식 실험하는 쪽과 관련해서는 발터 벤야민의 소논문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가상현실과 결부되는 비물질 판화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는 장 보드리야르의 저작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가상 이미지, 원본 없는 이미지,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이미지, 들뢰즈식으론 원본 되기, 그러므로 원본인 척하기. 여기서 가상현실이 시뮬라시옹이라면, 그 존재 방식이 시뮬라크르에 해당한다) 개념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벤야민의 논문을 거론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복제가 그것이다. 논문 제목에 이미 복제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이지만, 판화를 복제로 볼 것인가 아니면, 복수(멀티플)로 볼 것인가와 관련한 논쟁이 그렇다. 현재는 판화는 복수미술이지, 복제미술과는 다르다는 것이 일반적인 입장인 것 같다. 아마도 복수미술이 갖는 미술사적 성과(독일 플럭서스 그룹과 요셉 보이스)와 동일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복제물(그리고 인쇄물)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이겠지만, 크게 보면 좀 무의미한 논쟁이라는 생각이 든다. 복제가 복수이고, 복수가 복제이기에 하는 말이다. 하나의 현상 혹은 사물 대상의 질적인 존재 방식이 복제라고 한다면, 그 양적인 표현이 복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의 사물 대상의 존재 방식에 있어서 그 질적인 측면과 양적인 측면이 다른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논문을 보면, 최초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의 달라진 존재 방식과 그 위상을 논한 것이지만, 이후 전자 복제 시대와 디지털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논의로 확대 재생산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달라진 존재 방식과 위상이라고 했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라는 논의와 결부된다는 점에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고 하는, 그러므로 미디어가 달라지면 메시지도 달라진다는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론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판화를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판화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미지의 복제 재생산이 가능한 매체, 그러므로 사진과 영화와 같은 신종 매체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이미지의 존재 방식을 규정하던 개념인 오리지널리티(일품성)의 아우라가 상실된 것을 아쉬워하면서,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미지의 민주화가 실현되었다고 긍정 평가한 것으로 논문의 내용을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 이전에 이미지는 미술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일부 한정된 소수 계급의 전유물이었지만, 복제 이미지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모든 사람이 쉽게 자신의 일상처럼 이미지를 접할 수 있게 된 현실을 긍정 평가한 것으로 볼 수 있겠고, 그 자체 책의 등장으로 지식이 널리 확장되고, 판화로 인해 이미지가 공유될 수 있었다는 현실 인식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예술에 대한 벤야민의 논점은 아우라의 상실과 이미지의 민주화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인데, 복제 이미지에 대한 양가감정과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양가감정이라고 했다. 아우라의 상실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이미지를 널리 공유할 것인가가 문제다. 사실 아우라는 굳이 일품성이 아니더라도 예술작품에서 결정적일 수 있고, 그런 만큼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우라가 뭔지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원래 멀리 있는 것이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했다.
원래 멀리 있는 것? 형이상학적인 것, 정신적인 것 혹은 영적인 것(그러므로 영성주의), 비현실적인 것,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아리스토텔레스가 유령이라고 부른), 감각적 현실을 통해서는 인식할 수 없는 것, 의미로 옮길 수 없는 것(모리스 블랑쇼라면 의미의 바깥이라고 했을)을 상기하고 환기하지 못한다면 그건, 예술이라고 할 수가 없다. 비록 벤야민은 일품성에서 아우라를 찾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런 본질적인 의미를 요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자적인 의미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서보다는 문자의 이면에 숨은 뜻을 의도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굳이 일품성이 아니더라도 성취해야 하고, 또한 실제로도 성취될 수 있는 예술작품 일반의 덕목으로서 요청해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아우라는 일품성보다 큰 개념이다).
그렇게 아우라는(그리고 아우라의 상실은) 복제를 넘어 예술 일반의 문제로 확대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그 또 다른 축인 이미지의 민주화는 어떤가. 책이 지식을 널리 확장하고, 판화가 이미지를 공유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판화는 말하자면 예술작품으로서의 아우라도 담보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미지(그리고 정보)를 널리 전달하고 퍼트리기에 효율적인 매체다. 바로, 소통을 매개하는 매체라는 말이다. 그동안 간접성과 복수성(그리고 복제)으로 나타난 판화의 본질에 함몰돼 판화의 또 다른 본질이랄 수 있는 소통 가능성을 도외시하지는 않았는지, 벤야민의 논문은 묻고 있다. 판화의 본질은 예술작품으로서의 아우라를 담보하면서도, 동시에 널리 소통을 매개하는 매체로서 재정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면 커뮤니케이션아트 그러므로 소통예술과 커뮤니티아트 그러므로 소통을 매개하는 (지역적이고 의미론적인) 공동체예술이 판화의 돌파구가 되어줄 것이다. 소통을 매개하는 다른 첨단의 미디어(사실상 모든 새로운 미디어가 소통을 매개하는, 소통을 경쟁하는 미디어다)와 경쟁하면서 시대정신과 시대 감정을 담보하는 미디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처럼 소통이 절실한 시대를 치유하는 미디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참여미술(특히 민중 목판화)에서 확인된 부분이지만, 소통을 매개하는 실천적 미디어가 그 해법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판화의 본질 혹은 실천 논리(그러므로 내용적인 측면)가 그렇다면, 그 확장 가능성(형식논리에 방점이 찍힌)은 또한 어떤가. 판화에 관한 한, 형식적인 측면에서 판화의 확장 가능성에 대해서는 흔히 현대미술의 최전선으로 알려진 비엔날레보다는 오히려 다른 영역에서 찾아지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판화 관련 비엔날레로는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1970년 창립, 동아일보)와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1980년 창립, 공간)가 있지만(그리고 여기에 비교적 후발주자로서 2012년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로 시작해 2019년 비엔날레로 개명한 울산국제목판화비엔날레가 있지만), 종 다양성과 다원주의 예술을 폭넓게 수용하는 다른 현대미술을 대상으로 한 일반 비엔날레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좀 보수적인 면이 없지 않다. 보기에 따라선 오히려 판화 고유의 장르적 특수성과 함께 정통성을 지키는 보루로서의 역할에 무게중심이 실린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질 수 있는가. 그 가능성과 관련해서 <서울판화미술제>와 <내일의 판화전>이 주목된다. 창립 초기에 서로 견제하고 길항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출발했지만(거칠게 말해 서울판화미술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했던 미술시장 개척을 겨냥했고, 내일의 판화전은 순수판화와 현대판화를 지향하면서 시작했다), 그 와중에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판화의 형식실험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제기된 부분이 있다.
1995년 프랑스 사가(SAGA)에 이어 아시아 최초의 판화 전문 아트페어로 창설된 서울판화미술제는 기왕의 판화와 함께, 판화와 마찬가지로 에디션 개념을 공유한다는 이유로 사진을, 조각을, 멀티플을(그리고 아티스트북을) 판화의 영역과 범주로 아우르면서 아예 에디션아트페어로 발전했다. 이후 에디션아트페어를 보면 좀 지지부진한 것이 현실인데, 판화의 장르적 특수성이라는 벽을 스스로 허물면서 문호를 개방 확장한 것으로 보이고, 이로써 판화 전문 아트페어라는 특수성도 담보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다른 아트페어와의 차별성을 견지하지도 못하는 이중의 딜레마에 빠진 것으로도 보인다. 이런 과제를 남기고 있는 것을 뒤로하고 보면, 전에 없던 판화 미술시장을 개척하고 활성화한 부분이 있고(보기에 따라선 지금도 미미하기는 마찬가지지만), 판화의 가장 기본 개념이라고 해도 좋을 에디션 개념을 과감하게 해석해 판화가 현대미술과 그 궤를 같이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 성과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내일의 판화전을 보면, 창립 당시의 1995년에 이어 1996년과 1997년 세 차례 전시 후 막을 내렸다. 당시 전시에서 제안된 내용을 보면, 형식실험을 과감하게 수용하되 에디션이 가능한 작품으로 한정했다. 판화의 장르적 특수성이 에디션 개념으로 담보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회화와 겨룰 만큼의 대형판화를 지향하면서도(심지어 우표만 한 판화에서 보듯 전통적으로 판화는 소형판화가 주류였고, 실제로도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가 이런 소형판화를 지향하기도 했다) 판이 없는 작품, 일품 판화로서 사실상 회화와 다름없는 모노타입과 모노프린트, 사진과 영상작업을 제외했다. 그러면서도 판화의 본질에 해당하는 간접성과 복수성, 그리고 평면성을 확장해 아티스트북과 컴퓨터프린트(디지털프린트)를 아울렀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볼 때, 판화의 확장을 꾀하면서도, 판화의 장르적 특수성 내에서 확장 가능성을 실험한다는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세 차례에 걸친 전시가 끝난 이후 1999년에는 <off print>전을 열었는데, 판화의 확장 가능성에 대해 내일의 판화전이 내놓은 해답(그리고 해법)의 종결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간이 지난 만큼 전시 이후 성과까지 아울러 당시 참여작가들의 면면을 보자면 김용식의 대형 석판화가, 서정희의 유리 에칭이, 사진을 매개로 한 윤동천의 개념미술이(작가는 식빵에 타이핑된 텍스트 오브제를 확장된 판화 개념으로서 제안하기도 했다), 설치판화를 매개로 한 곽남신의 시대적 아이콘을 향한 관심이, 모노타입을 매개로 한 송대섭의 생태환경을 향한 관심이, 디지털프린트를 매개로 한 정상곤의 미디어와 이미지 정치학을 향한 관심이 주목된다.
형식실험 면에서 주목되는 다른 참여작가들을 보면, 강애란은 원래 책을 싼 보자기를 펄프로 캐스팅하고 알루미늄으로 떠낸 작업을 하다가, 이후 아예 책 작업으로 옮겨갔다. 투명 폴리로 속이 빈 책의 장정을 캐스팅한 오브제 작업이, 동영상을 도입한 전자책 작업이, 서가를 재현한 사진과 영상설치작업이 그렇다. 책으로 표상되는 지식의 집을 향한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보르헤스는 삶을 도서관에 비유하기도 했다).
합판을 소재로 한 안정민의 목판화는 전시 이전부터 진즉에 주목받는 부분이 있었는데, 보통의 조각도 대신 주걱 칼을 주먹으로 쥐고 합판에 대고 그으면 날실과 씨실이 교차하는 구조의 합판의 결이 찢어지면서 들고 일어나는, 거칠고 강인한 질감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이후 작가는 의복을 소재로 한 오브제 설치작업으로 여성주의를 향한 관심을, 투명 아크릴판에 들풀이나 식물의 씨앗을 붙여 압착한 설치작업으로 생태 담론을 향한 관심을 표명한 적이 있고, 비교적 최근에는 원하는 이미지를 목판에 새긴 후 종이에 프린트하는 대신 투명 실리콘으로 떠낸, 마치 피부를 보는 것 같은 촉각적인 질감의 실리콘 캐스팅 작업으로 목판화의 확장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정원철은 참여미술과 정체성 담론에 관심이 깊은 편인데,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초상이 그렇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소재로 한 초상이 그렇다. 정체성 담론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작업으로 사람들이 저마다 도장을 찍어 하나의 얼굴을 완성하는 관객참여형 작업이 있다. 여기서 각각의 도장들은 정체성의 모나드에 해당하고, 이런 모나드들 그러므로 개개인이 모여 한 사람의 인격을 이루고 나아가 공동체의 초상을 일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의미심장한 내용과 함께 형식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도 있는데, 조각도 대신 치과용 소형 드릴을 사용해 섬세하면서도 속도감이 있는 드로잉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칼의 확장을 통해 판화의 확장을 꾀한 경우로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박영근 역시 이런 소형 드릴로 칼의 확장을 예시해주고 있다).
이상으로 앞서 언급한 작가들을 포함해 판화의 확장 가능성을 형식 실험하는 작가들의 경향성을 정리해보면, 대략 칼의 확장을 통해 판화의 확장을 꾀한 경우, 판의 확장을 통해 판화의 확장을 꾀한 경우, 공간의 확장을 통해 판화의 확장을 꾀한 경우, 사진재판기법을 통해 판화의 확장을 꾀한 경우, 그리고 프린트된 인쇄물과 같은 일상적 오브제 자체를 판화로 제안한 경우로 구분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먼저 칼의 확장을 통해 판화의 확장을 꾀한 경우를 보면, 보통의 조각도 대신 주걱 칼을 이용해 거칠고 강인한 질감의 이미지를 얻는 안정민의 합판 목판화, 치과용 소형 드릴을 이용해 섬세하면서 속도감이 느껴지는 드로잉을 얻는 정원철과 박영근의 목판화, 레이저 커팅을 통해 원하는 이미지를 얻는 임영길의 목판화, 그리고 컴퓨터에 입력된 값 그대로 컴퓨터에 연결된 기계가 대신 판에 새김질해주는 정상곤의 프로토타입 동판화가 주목된다(프로토타입 자체는 본격적인 상품을 생산하기 전 임시로 만들어보는 시제품에서 온 말이다. 판화로 치자면 A.P판 그러므로 시험쇄에 해당할 수도 있겠다).
판이 확장된 경우를 보면, 판에 판각하는 대신 도장을 이용해 이미지를 얻는 정원철의 목판화, 종이에 찍어내는 대신 실리콘으로 떠내 마치 피부와도 같은 촉각적인 질감의 이미지를 얻는 안정민의 실리콘 캐스팅, 이미지를 프린트하는 대신 먹지를 대고 그린 홍인숙과 김미로의 판화, 자동차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 문질러 실물 크기의 이미지를 얻는 정명국의 프로타주, 보통의 판 대신 포맥스에 판각해 이미지를 얻는 정원석의 포맥스 판화, 서정희와 임정은의 유리 에칭, 이종철과 오영재와 이상은의 디지털 프린트, 오영재의 랜티큘러가 주목된다. 한편으로 판의 확장과 관련해 판화보다는 미술 일반 영역에서 더 활발한 한영섭의 탁본 작업이 시사하는 부분이 있다. 마른 옥수숫대나 들깨줄기다발을 바닥에 뉘어놓고 발로 지긋하게 밟아 으깬 다음, 그 표면에 한지를 대고 먹 솔(전통적인 목판화에서 바렌에 해당하는)로 먹물을 찍어 한지의 표면을 두드리거나 문지르는 과정을 통해 마치 자연의 피부를 떠낸 것 같은 질감의 이미지를 얻고 있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평면성의 조건을 넘어 공간을 확장한 경우로는 판화를 찍어낸 후 이미지를 칼로 오려내 일으켜 세우거나 부분 이미지를 중첩한 이서미와 이은희의 팝업 판화, 퍼이퍼맨을 캐릭터로 마찬가지의 팝업 판화를 예시해주는 이주연의 설치작업이 주목된다.
한편으로 사진재판기법을 통해 판화의 확장을 꾀한 경우로는 목판과 사진재판기법이 결합된, 목판이지만 석판처럼 평면 위에 찍어낸, 마치 빛바랜 흑백사진 속 희미한 흔적을 보는 것 같은 배남경의 목판평판법이 주목된다. 관련해서 좀 특이한 경우로는 얼굴과 같은 특정 신체 부위를 복사기에 대고 통과시켜 왜곡된 이미지를 얻는 석영기의 제록스프린트(복사예술)가, 마우스를 이용해 사진 속 이미지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형태의 이미지를 얻는 김지혜의 마우스드로잉 혹은 마우스프린트가 주목된다. 특히 사진재판기법의 경우, 사진이 보편화되면서 어떤 식으로든 사진재판기법과 결부되는 않는 판종이 없는 만큼 그 다양한 변주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끝으로 프린트된 인쇄물 자체를 판화로 제안한 경우로는 그 자체 일종의 오브제 판화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김민정의 엽서와 남천우의 책(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판화의 미학적인 측면보다는 판화 관련 담론을 건드리면서 활성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타예술(그 자체 창작과 함께, 그리고 창작을 통해서 비평적 기능을 포함 수행하는)과 개념미술의 한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다.
월인천강. 천 개의 강에 비친 하나의 달은 판화인가 아닌가. 눈 깜작할 사이에 하나의 이미지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전송해주는 미디어(그 자체 어쩌면 판화가 진화된 또 다른 형태라고 해도 좋을)가 보편화된 시대에, 클릭 한 번으로 텍스트와 이미지를, 비물질 형태의 정보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실시간 전송해주는 미디어가 일상이 된 시대에 판화는 어떤 지형도를 그려야 하고 또한 그릴 수가 있는가.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라고 했다. 질문의 여지가 남아있는 한 예술은 유효하고 판화도 그렇다. 섣부른 해답을 뒤로한다면, 소통을 매개하는 미디어와 예술 고유의 아우라가 판화의 해법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