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보이던 앞산이, 오랫동안 좋아해 온 옛 그림 속의 그 산과 닮아 있다고 믿었던 건 아마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 동네에서, 그 그림을 알고 떠올릴 수 있었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테니까. 아무에게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꽤 오래 그렇게 믿고 있었다. 특히 비가 온 뒤 날이 갤 때쯤에는 그 생각은 더욱 또렷해졌다. 물안개가 남아 계곡을 구름처럼 채운 풍경은 먹빛으로만 그려진 산수화와 같았다. 바윗덩어리가 없다는 점만 빼면, 계곡이 겹치고 갈라지며 이어지는 산의 덩어리 감은 내가 떠올리던 그 그림과 너무도 비슷해 보였다. 검은색 하나뿐인 산인데도, 그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농담과 만색이 숨어 있었다.
그 무렵 어떤 미술 시간이었다. 화선지 반절지조차 버거웠던 좁은 책상 위를 박차고 나와, 나는 교실 맨 뒤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해서 전지 한 장에 그 그림을 흉내 내듯 그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평소와 다르게 그때의 나는 꽤 진지했고, 또 뻔뻔했다.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내 그림을 거두어 가셨고, 책상 위 어딘가에 접어 꽂아 두신 뒤 끝내 돌려주지 않으셨다. 그 그림이 어디로 갔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어떤 이미지는 다시 내 것이 되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는 훗날에서야 알게 되었다.

권기수, 〈죽림-오감도(Line of Flight)〉, 2024-2025 ⓒ 권기수, 사비나미술관 제공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어느 날, 마당 끝에 있던 뒷간에서 나오다가 나는 산불을 보았다. 한여름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던 불길은 무서웠다. 연기가 소나기구름처럼 산을 감싸안으며 번져 갔다. 비 개인 날마다 그렇게 아름답던 산은 그 날 이후 전혀 다른 산이 되어 버렸다. 살아 숨 쉬던 나의 산수화는 그렇게 색을 잃었고, 지금 찾아보니 기록조차 남지 않은 산불이었다.
학년이 끝날 무렵, 나는 몰래 교실에 들어가 선생님의 책상을 뒤졌지만, 그때 그 먹그림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어떤 모습들은 아무 설명도 없이 사라져 갔다.
집 마당을 나와 뒷산 끝 모퉁이에 서면 또 하나의 산이 있었다.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라 여러 봉우리가 이어진, 길고 커다란 산맥이었다. 수직으로 솟은 봉우리들이 수평으로 이어져 병풍처럼 늘어서 있던 그 산맥은 우리 동네를 감싸는 장막 같기도 했고, 어린아이에게는 세상의 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동네를 벗어나 본 적 없던 나는 언제나 궁금했다.
산들은 늘 검게 보였다. 그땐 그냥 그렇게 보였다. 봄에는 분홍과 노랑이 살짝 보였고, 여름에는 녹색이 짙었으며, 가을 햇살에는 붉은색도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겨울에는 봉우리들이 봄이 올 때까지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색을 알기에는 산들이 너무 멀었고, 그곳을 위해 나에게 색은 허락되지 않았었다. 나이가 들어 가까이 가기 전에는, 그렇게 온갖 색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검은 봉우리들은 위로 곧게 서 있었고, 그 봉우리들이 이어져 길게 누워 있었다. 수직으로 서 있는 것들과 그 사이를 잇는 수평의 선들이 겹쳐 있었다. 그 모습이 산인지, 벽인지, 가끔은 잘 닫힌 거인들의 커튼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그 산맥은 우리 동네를 감싸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바깥세상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너머에는 분명 다른 마을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을 텐데, 산은 마치 그것을 쉽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 아이였던 나는, 그 산들이 걷히면 전혀 다른 세상이 갑자기 나타날 것만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햇빛이 들면 봉우리 사이로 밝은 부분이 생겼고, 해가 기울면 다시 모두 검게 닫혔다. 마치 커튼이나 버티컬을 조금씩 열었다 닫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산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모퉁이에 서 있는 나에게는 계속 달라졌다. 그때 나는 잘 몰랐지만,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던 그 압도적인 풍경이 내 마음 깊은 어딘가에 침전되고 있었던 것을.
그때는 역시 몰랐다. 그 거대한 장막을 기차나 자동차로 단 몇 분이면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 권기수(1972- ) 홍익대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동양 전통사상과 기법을 재해석한 작업과 ‘동구리’ 연작 발표. 2008·2010 구글아트프로젝트, 2015 풀브라이트 장학프로그램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