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발 킴의 작품 개요

 

이선영(미술평론가)

  


20년 넘게 남짓 쌓여온 다발 킴의 다양한 작품의 출발에는 드로잉이 있다. 선(線)은 정처 없이 유목하다가 순간적으로 어떤 형상을 취하고, 또다시 자기만의 길을 떠난다. 2019년 사비나 미술관에서 열렸던 [천 개의 횡단, 다발 킴의 레드스티킹(Thousand Crosses- Dabal Kim’s Red Stocking)]전은 이러한 작가의 예술적 여정을 함축한다. 작품의 발상, 그리고 그것이 펼쳐지는 과정이자 흔적인 드로잉은 설치작품이나 영상 등으로 확장되곤 한다. 오래된 종이에 자유롭게 끄적인 듯한 형상들은 어느 시점에서 건축적 규모로 실현되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들이 나아가는 여정 속에서 접고/펼치기를 반복하는 유목민의 방식이다. 척박한 땅을 떠도는 유목민은 멀리서 보기에만 낭만적이라는 점에서, 예술가에 대한 일반인의 인상은 비슷하다. 유목민이자 예술가에게 잠재적인 것은 현실화되고, 현실적인 것은 다음의 펼침을 기다리며 돌돌 말린다. 들뢰즈의 [주름]에 의하면 그것은 생명의 방식이기도 하다. 생성 소멸하는 모든 존재들의 방식이다. 



21세기 말, 2010


모태 속의 배(胚)에서 발생하고 성장하는 단계는 접힌 주름이 펼쳐지는 과정이다. 그래서인지 다발 킴의 작품에는 동식물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작가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종적 특이성은 살린다. 자연이 다양성의 모델이라는 점은 다발 킴의 작품에서도 그렇다. 작품 속 생명체들은 작가가 즐겨 쓰는 바처럼 돌연변이 같은 존재다. 작가는 신화적 상상력부터 생물학적 변이까지 가능한 모든 것을 펼친다. 이러한 범위를 받아주는 영역이 많지는 않다. 그래서 예술은 누군가에게는 삶의 필연적 항목이다. 다발 킴의 작품은 여러 분류체계에 대해 열려 있는 박물학의 방식으로 모든 기묘한 것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곤 한다. 작가는 동물의 몸 판에 지도를 넣을 정도로 대상을 미지의 존재로 만든다. 관객은 마주한 대상을 알고 이해하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유목하게 된다. 유목은 대상을 알되 지배하지 않고 함께 한다. 


유목도 나름의 규칙이 있지만, 정주에 비한다면 예외적 상황에 보다 열려 있다. 인간사회는 체계화를 통해 예외적 상황을 줄여 나가는 방향으로 간다. 하지만 체계화가 촘촘해질수록 예외는 폭발적인 힘을 발휘한다. 지배와 관련된 체계는 모든 것을 재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예술은 방향은 다르다. 예술이 재현주의에 매몰될 때 자신의 정체성과 힘을 상실한다. 다발 킴의 드로잉은 예외적 상황과 만나는 순발력 있는 형식이다. 드로잉은 단지 개념의 도해나 추후의 작품을 위한 설계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자체로 내적 응집력을 가진다. 현대미술에서 드로잉은 재현의 밑그림이기는커녕, 재현에서 탈주하는 교두보에 자리한다. 다발 킴의 작품에서 드로잉은 현실을 재현하는 수고로운 노동이 아닌 유희의 장이며, 어떠한 축도 없이 자유연상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있고, 수직으로 높이 쌓거나(축적) 수평으로 나열(행렬)하는 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말과 산 사이에, 2017



개-몽상, 2018


복잡한 선들의 묶음 속 어떤 선들이 어떻게 풀려나올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수 천 년 간 사물로 존재했던 유적지의 씨앗처럼 때가 되면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이다. 다발 킴의 풍경에는 그 누구의 땅이라고 할 수 없는 무명의 영토에서 반복되는 이동이 있다. 떠나는 자만이 만날 수 있는 독특한 단편들은 고고학적 유물이나 고생물학의 화석처럼 제시되며, 드로잉 및 설치와 어우러진다. 다양함 가운데서도 그만의 작품을 알아볼 수 있는 기조는 있다. 작가에게는 최근 유행하는 문화적 코드가 아닌, 고색창연한 분위기에 대한 선호가 있으며, 자신만의 족적에 해당되는 도상도 존재한다. 드로잉, 사진, 영상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에서 출몰하는 레드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그것이다. 붉은색 뾰족 구두와 함께 하는 레드 스타킹은 광폭의 행보를 수행하는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수하는 것은 작가의 태도 및 의지와 관련된다. 


레드 스타킹이라는 여성적 코드는 페미니즘과 우회적 연결고리를 예시한다. 다발 킴의 상징인 레드 스타킹은 직립의 모양새 보다는 쐐기나 화살처럼 거꾸로 박혀 있는 경우가 많다. 드로잉에서 시작되는 여러 형식의 작품에서 작가는 상황 속에 자신을 꽂아 넣는다. 명확한 좌표를 찍고 나아간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추락으로도 불시착으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만남과 상호작용 같은 이성적 방식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 논리에 따른다. 어디선가 속도감 있게 날아와서 박히는 충돌 하는 식의 만남은 상대를 다치게 할 수도 자신이 다칠 수도 있는 위험하고도 모험적인 방식이다. 예기치 못한 만남은 사랑과도 같다. 타자와 만나는 예술의 방식은 질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우정이 아닌 사랑의 방식’을 따른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의하면, 들뢰즈는 불가피하게 만나게 되는 ‘폭력적 사물’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우정과 철학’이라는 전통적인 쌍에다 ‘사랑과 예술’이라는 쌍을 대립시켰다. 



고기먹는 여자, 2015



고해성사, 2017



숲속의 야경, 2017


들뢰즈는 ‘노동, 지성, 선의지의 결합이 낳은 객관적인 진리는 발견되는 한에서만 소통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한에서만 발견되는 것이기에’ 거부감을 가진다. 들뢰즈는 ‘스스로 논리적인 진리를 찾아내기를 갈망하고, 자기 고유의 질서를 가지길 원하며, 외부의 압박이 오기 전에 미리 활동하고 싶어 하는 추상적인 지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는 ‘기호들로부터 압박당하고, 그 기호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만 활기를 띄는 지성, 또 자신을 질식하게 하는 공허, 자신에게 침입해 들어오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만 활기를 띄는 지성’(들뢰즈)이 문제다. 들뢰즈에 의하면 폭력과 광기의 기호들은 논리와 고상한 언어로 꾸민 기호에 맞서면서, 또 그 기호들의 배후에서 하나의 전체적인 파토스를 구성한다. 그것은 두뇌/ 로고스의 차원이 아니라, 육체/ 파토스의 문제다. 철학이 이성적 대화라는 우정의 방식을 따른다면, 예술은 사랑처럼 우연에 개방된 돌발적 사건에 속한다. 


우연적 상황을 필연적으로 만드는 것은 거듭되는 기호 해석의 과정이며, 이는 사랑뿐 아니라 예술의 특징이다. 작가는 이성적 계산을 초월했다기보다는 그 한계를 인정한다. 오성으로 전락한 이성, 즉 인간적 논리 대신에 차라리 자연을 참조한다. 자연은 아직도 인간에게 미지로 남아있는 영역이다.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문화적 추이는 이성이 아닌 상황의 논리에 기운다. 그것은 그만큼 시스템의 자동화가 대세이며, 코드화될 수 없는 영역으로의 탈주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몸의 일부 중 다리를 강조하고 그것만 따로 움직이는 듯한 다발 킴의 작품에서 이동에 대한 은유는 풍부하다. 낯선 풍경 속에 거꾸로 박혀 있는 붉은 스타킹의 다리는 불가사의한 상황이 많아서 언뜻 복사해서 붙인 것 같은 이물감도 있지만, 대부분 직접 실행된 행위의 결과라는 점이다. 그곳이 어디든 작가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림의 경우에는 뜬금없어 보이는 다리들은 초현실적 풍경으로 볼 수도 있다.



I love Frida Kahlo,2019



수직 갱, 2019


하지만 사진의 경우에는 그 시공간에서만 가능한 빛의 조건이 거꾸로 박힌 두 다리에 드리워져 있곤 한다.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해보는 것과 직접 그 시공간에서 온몸으로 자세를 취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몸은 이성보다는 상황이다. 근대에서 현대조각의 추이를 다룬 로잘린 크라우스의 논의에 의하면, 현대조각은 근대적 이성이 아닌 상황의 논리에 따른다. 다발 킴의 작품에 나타나는 초현실적 분위기나 빈번한 오브제의 활용 등은 이성보다는 상황과 관련된다. 섬모처럼 가늘고 섬세한 붉은 스타킹의 다리(들)은 여러 상황 속에 편재하면서 서사를 이끈다. 도상으로서의 레드 스타킹은 일부분으로 전체를 은유하는 환유(metonymy)의 방식이다. 작가의 다리이기도 한 그것들은 분신처럼 작동한다. 얼굴이나 몸이 등장하는 작품뿐 아니라, 풍경 속에 편재하는 다리들 또한 초상적 요소다. 초상화의 출발이 되는 도구인 거울은 분신과 분열에 대한 테마가 있듯이 말이다. 


붉은 스타킹이라는 도상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광폭의 범위를 다루는 다발 킴의 작품에서 일관적인 맥락을 부여하는 지표다. 작가 김수자가 자신을 바늘로 삼아 전 세계를 무대로 그녀가 유목했던 요소들을 엮은 것과도 비교된다. 스타킹의 붉은 색은 여성적인 것으로 읽히지만, 역사상에서 붉은색이 남성의 상징이었던 적도 있었기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다발 킴의 작품 속 붉은 스타킹 안의 몸은 분명 여성, 특히 작가의 몸 일부다. 퍼포먼스, 영상, 사진 작품에서 본인이 직접 착용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자의식과 무관할 수 없는 작업 속에서 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마존이나 사이버 펑크의 여전사 같은 이미지도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면, 사회의 지배적인 상징계인 가부장제가 규정하는 여성의 자리를 거부한다. 물론 팜므 파탈을 비롯한 강한 여성상 또한 여성의 유형화와 관련이 있지만, 이 유형화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는가도 페미니즘 전략 중의 하나일 것이다. 



노마딕 컬렉션, 2015



외로운 헌터, 2015


작품 속 과도하게 강하거나 약해 보이는 여성은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보여준다. 2022년 말에 열린 문화비축기지에서의 전시 [헤르마프로디토스 돌기 신화-드리밍 클럽]에서는 양성성을 실험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험에서 동서고금의 신화적 상상력 또한 영감의 자원이 된다. 다발 킴의 작품에서 ‘여성성’은 반 쪽으로 나뉜 두 성 중의 한쪽이 아니라 그 어느 쪽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항 대립이 기성 질서의 바탕이라고 볼 때 모호성 자체도 나름의 지향이 있다. 이러한 모호성 자체가 여성성이라는 해석도 있다. 가부장적 상징계에서 여성은 타자였지만, 근대 이성에 의해 억압된 것들이 복귀하는 포스트모던 국면에서 여성은 다른 모습으로 귀환한다. 여성성을 포함하여 다발 킴의 작업은 2010년 포스코 미술관에서의 전시 [잠재된 것들의 귀환(2019)]처럼, 잠재된 것들이 귀환하는 장이다. 몸과 성은 자연이나 신화 등 근대적 이성에 의해 타자화되어왔던 것들 속에 재맥락화 된다. 


[Dream Time Story;트레이싱(2016)] 전이나 [Dream Time Story, 태워지는 순간의 기록(2015)] 전처럼, 꿈 또한 무의식과 더불어 활성화된다. 깨어나서 꿈을 해석하려다 보면 빈 곳이 많다. 그것은 꿈의 언어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꿈뿐만 아니라, 의미 자체도 그렇다고 본다. 그래서 꿈은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객관화되기 힘들다. 예술이 소통되기 힘든 것도 응축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마단 사럽은 [알기 쉬운 라깡]에서 의미는 근본적으로 그 유연함과 예상 불가능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말한다. 주체는 기표들 사이의 틈 사이에서 드러나게 된다. 응축은 꿈의 매듭 지점으로서 언제나 다양한 해석을 허락한다. 응축과 더불어 또 하나의 주요 방식은 대체이다. 마단 사럽에 의하면 대체는 왜곡의 한 형식으로, 검열은 꿈의 중심부를 그보다 중요하지 않은 대상이나 말로 대체하는 것이다. 응축이나 대체 같은 이러한 정신분석학적 용어가 예술에서도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언어는 그 한계까지 밀어붙여지며 표현 불가능성과 투쟁 장소가 되기’(마단 사럽)이기 때문이다. 



숭배의 제를 올리다(2019)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한다(2019)



멸망한 도시에서 기념촬영(2019)


다발 킴은 꿈과 예술을 중첩시키며 작품을 통해 양자의 상호관계를 추적하고 기록한다. 가부장제의 지배적 기표인 남근의 명확성에 비해 여성의 성은 감춰져 있다. 그래서 비밀스럽고 유혹적이고 매력적일 수 있지만, 동시에 파악되어야 하고 길들여지고 이용되며 지배되어야 하는 성으로 간주된다. 여성의 지위는 많이 향상되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제 1세계 여성의 상대적인 자유 또한 주변화된 여성의 희생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평등의 지표로 삼긴 힘들다. 여성은 명명할 수 없는 성에 바쳐진 것이며, 그런 한에 있어서 대안적 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과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페터 비트머는 [욕망의 전복]에서 남성성은 가시적인 것에 근거하며 이것을 기초로 논리적이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여성성은 논리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여성성은 기초이자 심연으로 파악이 불가능하며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도 않는 그 무엇이라고 대비한다. 


동시에 그것은 실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페터 비트머는 라깡이 여성성의 우위를 주장했다고 평가한다. 그에 의하면 남성성은 여성성에 의해 정립된다. 남성성은 구조지어 지지 않은 것에 의해 구조 지어진다는 것이다. 라깡은 이 여성적인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리비도의 원천이라고 보았는데, 이것은 리비도를 남성적인 것으로 이해했던 프로이트를 결정적으로 넘어서는 부분이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라깡은 여성성을 어떤 실체화도 벗어나는 범주, 즉 하나의 실체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이 정신분석과 만날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평가된다. 다발 킴의 작품에서도 여성은 작품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페미니즘과의 관련성은 모호하다. 하지만 한국 거주하며 작업하는 여성작가로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의식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발 킴의 작품에서 타자는 여러 층위에 있으며 필연적으로 또는 우연적으로 연계되면서 공조한다. 



유턴금지, 2008



창세기 숲속으로,chapter1, 2019


타자인 여성은 자기 안의 타자를 만나고자 하며, 때로 절대적인 타자인 신성과 접촉한다. 작품 속 여성으로 간주 되는 이는 무명의 영토 여기저기에서 수행과 명상의 자세를 취하곤 한다. 가면을 비롯한 독특한 복장은 고요하거나 역동적인 국면에서 변신의 도구가 된다. 지퍼를 열었을 때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다발 킴의 초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한편 살집이 있는 거대한 여성의 토르소는 신축성 있는 자루처럼 많은 것을 담아낸다. 작가는 몸을 투입과 산출의 매개로 제시한다. 자아 또는 주체의 정체성과 항상성을 유지해줄 경계는 유동적이고 탄력적이다. 몸은 인간의 형상과 닮았든 동물의 형상과 닮았든, 지도나 풍경처럼 많은 것들이 거쳐 갈 수 있는 장(場)으로 나타난다. 몸은 풍경, 즉 ‘바디스케이프’가 된다. 이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다. 바깥을 받아들이기나 뱉어내기의 기준은 다름 아닌 몸이다. 안과 바깥을 구별하는 기준으로서의 몸을 견지하는 작품들은 구체적이고 충격적이다. 몸 경계의 위반은 정확한 종으로 확정지을 수 없는 괴물들이 출몰하게 한다. 


작품 속 동물은 그 내부에 또 다른 이미지들을 품곤 한다. 주체 역시 동물과 접속하거나 동물로 변신한다. 다발 킴의 작품 제목에 나타나듯이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 될 때 돌연변이적 국면이 두드러진다. 괴물로의 변신은 단순한 유희를 넘어서 카프카의 [변신]처럼 탈주를 위한 것이다. 변신의 산물은 [Into Drawing-돌연변이의 왕국](2012, 소마미술관 드로잉센터)처럼 왕국을 이룬다. 만약 그 왕국에 왕이 있다면 ‘무정부주의자의 왕(Heliogabalus)’이 아닐까. 다발 킴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들은 자연이라는 타자를 대변한다. 작품 속 변신하는 유기체들은 기계와의 접합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선은 확실한 대상의 외곽선과 중첩되지 않는다. 그림 또한 거울처럼 자신을 비춘다. 자화상 자체가 거울을 도구로 한다. 또한 그림은 오랫동안 환영을 자아내는 눈속임 기법을 통해 거울을 모델로 자신의 문법을 확립해왔다. 하지만 거울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변신이 이뤄지는 상상의 무대다. 다발 킴의 작품에서 거울/그림은 이질적인 타자가 끼어드는 장이다. 



천상의 케이크, 2017


[The Passage of Self-Portrait](2009), [Self-delusion](2005)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다. 상상 또한 그러한 사건의 영역에 속한다. 여러 작품의 모티브들이 등장하는 동영상 작품에서 겹겹이 층진 산들 사이로 달과 별이 비치는 풍경은 작가의 환상 속에 자리한 이상적인 풍경일지 모른다. 오지를 포함한 세계 여러나라에서 작업을 해온 작가에게 문명의 빛에 의해 장막이 처져 가려졌던 밤하늘은 원래의 모습을 찾는다. 우리 일상어에서 ‘그림같은 풍경’은 환상과 사실이 중첩되는 풍경을 말한다. 환상과 현실은 짝패다. 환상에는 현실이, 현실에는 환상이 깔려 있다. 강력한 환상은 현실이 되며, 역설로 가득한 현실은 부조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환상적 예술을 다루는 것은 현실을 다루는 것이며, 그 역도 사실이다. [현실과 비형실이 유영하는 드로잉](2008) 전처럼 두 가지 구별되는 차원은 상호작용한다. 환타지는 별자리와 비슷하다. 


실제의 위치 관계라기보다는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달라진다. 거울상 또는 초상은 타자의 관점과 자아의 상상이 조율되는 장이다. 초상은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는 자아가 구축되는 거울과 밀접하다. 조각난 육체가 완전한 육체처럼 변형될 때 환상이 작용한다. 다발 킴의 작품은 자아의 분열이라는 근본적 조건에서 이음매를 감추지 않는다. 경계는 연결되거나 극복되기 위해서 먼저 확인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이질적인 것이 만나는 장에 공히 적용되는 원칙이다. 가짜 유물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든다. 현실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확정되어있는 미술사적 도상 등도 대화를 위해 불려 나오며, 자유롭게 변조된다.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 허구가 참조되는 경우다. 역사보다 더 범위가 넓은 고고학적 차원은 많은 빈칸(missing link)을 만들어내고, 다발 킴의 작업은 이 빈칸에서 활성화된다. 빈칸에서 무엇인가 생성되고 소멸한다.


화려한 행렬 2019


재현주의는 빈칸을 이미 정해져 있는 단선적 논리로 메꾸지만, 생성은 단선적인 논리를 잠식한다. 특정 대상의 재현이 아닌 자유연상 스타일의 드로잉이 많은 작품은 주체의 무의식과 관련된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무의식은 무시간적이다. 고전적인 정신분석학의 모델은 무의식을 심층에 배치한다. 오래된 것이 더 아래에 깔려 있다는 상식에 의하면 무의식은 오래된 것이고, 융 심리학에 의하면 오래되다 못해 원형적인 것이다. 원형과 시작은 가족 유사성을 가지는 범주다. 하지만 다발 킴의 소재는 오래된 것에 한정되지 않으며, 현대적인 것 또한 자유롭게 조합된다. 작품들은 근대의 ‘새로움의 신화’가 ‘오래된 미래’로 자리를 물려줄 만큼 고풍스러운 소재들이 많다. 그것은 2017년의 전시제목 [비밀의 컬렉션_Secret Collection]처럼 박물학적 수집품이 된다. 이름 모를 짐승의 뼈, 언제 만들어 진지 무엇이 먼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누런 종이 등도 그리기의 바탕이 되곤 한다. 


작가는 가정처럼 제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창작에 대한 잘못된 가정이다. 작업은 선재 하는 미지의 과거와 끝없이 대화하는 과정이다. 수집의 역사에 등장하는 바와 같이, 진짜와 가짜, 본래의 것과 추가된 것 사이의 구별이 모호한 수수께끼같은 사물이다. 백지같은 최초의 출발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쓴 양피지같은 표면의 층위를 더 복잡하게 하면서 거듭되어 해석할 만한 풍부한 표면을 만든다. 알레고리는 문학을 비롯한 모든 것을 미술에서 배제하려 했던, 모더니즘에서 억압했던 형식이다. 해석학적 상상력에 바탕한 다발 킴의 작품 특성은 풍경, 오브제, 영상, 설치 등에 편재하며, 초상 또한 특징짓는다. 시간적인 순서가 거부되듯이 공간적인 순서 또한 수시로 변화한다. 무의식은 심층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그때마다 새로운 단편과 결합되어 배치된다. 지각변동은 현실로 간주 된 세계 속에 무의식의 단층을 노출시키며 고정된 현실을 상대화 한다.   


출전; 2022-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작가-조사-비평>지원 사업에서 다발킴 작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