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입은 사람들

 

이선영(미술평론)

 


배일린의 작품은 먹과 금속이라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 두 재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한국화에 금속 단편들을 붙이는 방식은 작가의 오랜 실험을 거쳐 정착됐다. 양자의 물성은 매우 다르기 때문에 그 조합은 그만큼 낯설다. 먹은 스며들고 번지지만, 금속은 반사하고 외곽선이 분명하다. 물론 섬세하게 그려진 먹선은 오려진 경계선보다 더 명료할 수 있고, 화면에 붙여진 금속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식되어 그 날카로움이 변질될 수 있다. 작가는 주변의 빛을 환하게 반사하는 알미늄 외에 동도 사용함으로서 작품의 서사와 밀접할 시간적 추이를 표현한다. 그의 작품에서 먹은 어둠, 금속은 빛을 상징한다. 빛과 어둠은 서로의 짝패라는 점에서 금속 파편과 먹그림은 내재적으로 연결된다. 그의 작업은 실험을 위한 실험이 아니라 ‘빛과 어둠을 통한 생명력 표현 연구’라는 내용과 관련된다. 작가는 ‘먹이라는 물성을 어둠으로 설정하고 빛은 메탈로 사람의 형태를 상징한다’고 밝힌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All is created by the mindMixed media on paper 110×90cm

 

어둠으로부터 빛으로의 여정, 또는 역행(逆行)이 인생과 겹친다. 그의 작품에서 먹은 깊은 공간감의 연출에, 오려진 금속 박편들은 그 공간 위에서 이합집산하는 인간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이 은유하는 바에 의하면, 어둠에서 나와 어둠으로 돌아가는 여러 과도기에 인간은 찬란하게 빛난다. 삶은 관성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섬광같은 순간을 치열하게 불태우는 과정이다. 일상이 아닌 심미적 세계의 주인공 초인은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 예술가상이다. 긴 망토를 둘러쓴 수도자 내지 순례자의 실루엣을 연상시키는 인간 형태는 보다 큰 세계의 작은 일부를 이룬다. 인간 형태로 오려진 박편은 여러 크기가 있어서 변화무쌍한 공간에 맞춰 배열되는데, 위치에 따른 원근감과 동감이 발생된다. 생명은 빛이지만 어둠을 배경으로 하며, 다양한 크기로 인해 어두운 바탕으로부터 생성되고 소멸한다. 빛은 어둠 속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빛을 가득 받는 바다 표면의 반사면들처럼 빼곡하게 붙여진 인간들은 개체가 아니라 군집으로 유영하듯이 움직인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믿는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라는 낮은 자세를 취한다. 배일린은 그동안 현대물리학으로 대변되는 과학과 티벳의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으며 현지에서의 작업 및 전시도 진행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그의 작품 속 인간들은 입자이자 파장이라는 물질의 근본적 상태와도 연결된다. 그의 작품은 빛의 입자로 파동치는 군상들로 이야기한다. 어둠과 빛이 짝패이듯이 입자와 파동도 그러하다. 두 대조항은 물질과 정신처럼 상보(相補)적 관계를 이룬다. 과학사에는 빛이 입자인가 파동인가에 대한 오랜 논쟁이 있었다. 현대의 물리학은 빛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본다. 레오나드 쉴레인은 [미술과 물리의 만남](Art & Physics)에서 파동과 입자라는 두 가지 성질 모두가 있어야 체계에 대한 완전한 기술이 가능하다고 정리한다. 



경계에 서다 Stand at the boundaryMixed media on paper 110×90cm



흐름에 임하다 ①Go with the flow ①Mixed media on paper 100×100cm



흐름에 임하다 ④ Go with the flow ④Mixed media on paper 100×100cm


양자에 관심이 많던 배일린에게 자신의 분야인 미술은 물리학의 세계와 상보적 관계로, ‘자연과학이 단순히 자연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아니며, 자연과 우리 자신이 상호작용하는 부분’(하이젠베르크)이라고 믿는다. [미술과 물리의 만남]에 의하면 파동과 입자처럼 정신(mind)과 우주는 뒤엉켜서 풀 수 없게 통합되어 있다. 관찰자와 관찰된 것은 연관된다고 보는 새로운 물리학은 주/객관의 분리를 지양하고, 정신과 우주의 양상이 한 쌍을 이루는 체계라고 본다. 예술은 그러한 모델의 고전적 예이다. 배일린의 작품에서 인간은 의지와 자유를 가지는 자율적 개체라기보다는 빛의 입자가 파동치는 물리적 차원과 조응한다. 그렇다고 허무주의는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들은 수동적으로 위치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작품의 서사와 관련될 입자의 운동은 먹의 농담이 마련한 빈공간 속에서 일어난다. 


다양한 농담이 가능한 먹으로 연출된 공간은 그자체로도 움직이는 듯하며 덧붙여진 군체 형태들의 이동 가능한 잠재적 자리를 마련한다. 그의 작품에서 빛과 어둠은 현실성과 잠재성이라는 두 항의 역동적 관계를 가진다. 인간은 심해의 물고기떼나 창공의 철새떼들처럼 군집을 이루어 어디론가 가고 흩어진다. 이러한 움직임은 인간의 의도나 목적, 이성과는 무관하지만, 그 모두를 배제하지 않은 채 우주적 순리에 따라 흘러간다. 자연광과 인공광에 비춰진 작품 표면은 반사면 때문에 잠재적 운동감이 있다. 작가가 종이와 어울리기 힘든 재료인 금속을 도입한 것은 빛의 효과 때문이다. 빛은 인류학적 상상력 속에서 진리와 관계된다. 예술을 통한 진리 탐구에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앞서 인용한 [미술과 물리의 만남]에 의하면 단어 상상력(imagination)은 그리스어 ‘phantasia’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빛(phaos)가 그 어원이다. 배일린의 작품에서도 빛은 ‘공간, 시간, 에너지, 물질과 생소한 방법으로 연결’(레오나드 쉴레인) 된다. 





새로운 탄생 ①, 새로운 탄생 ② A New Birth ①②Mixed media on paper100×180cm


‘고대 그리스인들은 eye와 light를 같은 의미로 사용’(레오나드 쉴레인) 했다는 점은 조형예술가가 빛이라는 자연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 소재에 대해 각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하지만 빛의 다양한 형식 중 색의 경우 최근 작품의 주역은 되지 못한다. 대신 ‘공간 시간 그리고 빛에 대한 근본적 시각 현상인 음영’(레오나드 쉴레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미술과 물리의 만남]은 빛을 우주의 본질로 간주하면서 창세기에 신의 위대한 최초의 행동은 빛의 창조라고 인용한다. 그에 의하면 신은 공간이나 시간이 아닌, ‘빛이 있을 지어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혜의 빛] 시리즈는 빛과 어둠이 혼재된 상태를 표현하며, 지혜를 찾아가는 여정의 복잡함을 말한다. 어둠에서 빛이라는 직선적 여로가 아니라 상황마다 다른 명암의 공존이다. 공간-시간 여행자들에게 선택의 순간은 자주 닥친다. 미광(微光)부터 발광(發光)까지 강도는 다르지만 진리의 길을 떠난 탐구자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 빛이다. 


배일린의 작품에서 빛은 진리를 향한 여정에서의 희생과 도전, 그리고 그 주체를 비춘다. 또는 주체 내부에서 빛난다. [순례자의 길] 시리즈는 푸른색/붉은색 톤의 촛불을 표현한다. 자신을 태워 녹임으로서 빛을 밝히는 촛불은 빛에 대한 작가의 상상과 닿아있으며, 지배 권력의 미몽을 떨쳐내려는 사회적 상상력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작품 [나는 누구인가?]에서 작가는 ‘메탈의 빛은 인간 내면에 내재 해 있는 빛으로, 자신을 밝히는 빛으로 거울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원래의 자신에게 내재된 빛을 다시 찾는 여정이다. 절대적 타자로부터 부여받은 빛은 원천을 향한 움직임을 낳지만, 자신 내부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다. [빛의 길]은 쌀 미(米)자 구도가 원근감을 가지는 길로 변신한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 때 흥남부두(북한)에서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를 지휘했던 레너드 P.라루 선장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무기를 버리고 그 무게만큼 피난민을 배에 태워 거제도에 도착한 탈주의 여정이 빛의 길로 표현됐다. 



새로운탄생 ③ A New Birth ③Mixed media on paper 100×180cm



빛으로 가는 길 (超人Übermensch)The way to lightMixed media on paper118×88cm


배일린의 주제인 빛과 어둠은 물리적, 생물학적 차원임과 동시에 심리적 차원이다. 작품 [一切唯心造]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마음을 마음 심(心)자 형태로 표현한다. 군집된 사람들은 꽃의 중심처럼 자리하면서 빛난다. [내면의 지혜를 꽃피우기 위한 빛]에서 사람들은 중심에서 바깥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빛을 발산한다. 한송이 꽃과 같은 우주는 차원이 다른 두 세계를 중첩시킨다. 빛과 어둠이라는 존재론적 이원항은 수렴과 발산, 접힘과 펼침 같은 운동성을 가지게 된다. 진리의 추구를 빛의 탐색과 연결시키는 사유는 종교의 본류와 지류에 촘촘히 자리한다. 토마스 머튼은 [신비주의와 선의 대가들]에서 인간은 불완전함과 관련된 어둠 안에 거하고 있으나, 명상 속에서 신의 현존과 빛에 의해 그러한 어둠을 자각하게 된다고 보면서 기독교의 경우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과 하나라는 신비의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예술은 신화나 종교의 방식을 따라 빛을 찾는 여정에 오름으로서 숭고한 하나를 꿈꾼다. 


보르체르트는 [초월적 세계를 향한 관념의 역사]에서 인간의 정신은 로고스에서 직접 발산되어 신의 형상의 빛이며, 인간의 육체는 신의 창조력이 흐릿한 한 가닥 빛줄기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배일린의 작품에서 중요한 빛은 찾는 과정은 안과 밖을 동시에 향한다. 전통적 의미의 신화나 종교가 약화된 현대에도 빛을 잃어버린 상황이 펼쳐지면서 이전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다시 작동되곤 한다. 특히 앎에 대한 욕망 또한 강하게 작동하는 배일린의 작품은 영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의 세계관을 떠올린다. 세르주 위탱의 [신비의 지식, 그노시즘]에서 세계에 던져진 그들의 존재 조건에 불안해하며 이 불안감을, 세계로부터 벗어나면서 극복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믿었다고 말한다. 그러한 태도는 근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세르주 위탱은 마니교의 예도 든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자아, 신적 실체의 발산 또는 투사와도 같은 것이고, 인간의 영혼은 신성한 빛으로부터 나온 빛살이 된다. 



당신은 뒤에서 몇 번째 서 있습니까? Where are you standing from the back of the line? Mixed media on paper 120×116cm



빛의 생물학적 접근 米① Biological perspective on light① Mixed media on paper 94×95cm


이러한 내적인 관계 속에서 앎이라는 매개는 나(소우주)와 세계(신, 대우주)를 연결시킨다. 과학자들이 자연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예술가들은 자아로부터 출발하며 어느 지점에서인가 만날 것이다. 금속 반사면이 편재하는 배일린의 작품에는 거울이라는 소재가 등장하여 나와 세계가 서로를 반영함을 말한다. ‘지혜의 빛’은 행복의 파랑새처럼 이미 탐색자에 내재한다. 빛을 가진 자만이 빛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며 그것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그노시즘) 미학적(초인) 지향에는 다소간 선택받은 자를 전제한다. 작품 [경계에 서다]는 빛-사람들에 에워싸인 어둠으로, [내면의 지혜를 꽃피우기 위한 빛]과는 반대 구도다. 그의 작품을 이어서 보면 작품들 간의 운동도 감지된다. 빛이 빠져나간 우주적 꽃의 중심은 더욱 어둡다.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경계는 얇은 종이 표면을 적시며 번지는 것처럼 미묘하다. 누구도 정확한 경계를 확정하기 힘들다. 예술은 바로 그러한 전이가 일어나는 경계에 서는 것이다. 


작품 [빛의 생물학적 접근 米]는 한자의 쌀 미(米) 자로부터 출발한 구조로 빛을 집중적으로 필요로 하는 쌀의 생태를 통해 빛이 곧 인간들을 먹여 살리는 에너지임을 말한다. 마음 심(心)자가 등장하는 작품 [一切唯心造]도 그렇고, 그의 작품에서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세계는 읽어야 하는 상징적 우주, 또는 텍스트다. 전통을 벗어난 시대에 사는 작가는 상징 보다 열려 있는 텍스트에 가깝다. 이 세계의 해석은 열려 있다. 배일린의 작품은 빛으로 상징되는 진리 추구의 과정에 방점이 찍힌다. 진리가 무엇이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치열한 과정 그자체에서 얻어지는 ‘부수적인’ 것들이 진리일 가능성이 높다. [흐름에 임하다] 시리즈는 나선형의 거센 흐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여러 상태가 표현된다. 나선형의 심도에 따라 근경의 사람들은 크게 원경의 사람들은 작게 표현한다. 자연 속에서 흐름은 강물이 바다에 이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지혜의 빛 ①The Light of Wisdom ①Mixed media on paper 59×51cm



품(Grade) ①Mixed media on paper84×112cm


이 시리즈를 주로 이루는 색감은 블루이며, 배색을 이루는 화이트는 물의 운동성을 강조한다. 작가는 ‘우리의 삶도 흐르는 강물처럼 멈추지 않고 바다로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순리를 인정하면 그 과정 속의 고난도 견딜만 해진다. 혼돈으로 간주될 법한 역동적 과정을 포함한다. 고체보다는 유체의 역학이다.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자연이라 불리던 것이 에너지의 형태로 현존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체계는 묶인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약호들에 선행하며 약호화를 행한다. 배일린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다양한 소용돌이는 그러한 힘의 흐름을 나타낸다. 작품에 따라 상형문자의 형상이 되면서 흐름에 의미를 더한다. 미셀 세르는 인식을 분리, 차이 요컨대 단단한 대상으로 여기는 자는 실증주의자, 더 일반적으로는 독단론자라고 말하며, 단단함이 아닌 근본적인 소용돌이가 진정한 실재임을 강조한다. 특히 탄생의 과정에는 강한 에너지의 움직임이 수반된다. 


작품 [새로운 탄생]은 거대한 인체 실루엣 안에 작은 인간들이 빽빽한 모습이다. 터져서 포잘 퍼져 나갈 듯한 압박과 긴장감이 흐른다. 거인 외부의 바탕은 내부의 금속 색상과 연동된다. 금빛이든 은빛이든 빛의 입자는 새로운 탄생을 준비한다. 어두운 바탕에서 얼굴 형상이 비추는 [새로운 탄생 3]에서 다각형 얼굴들이 빼곡하다. 마치 프랙탈 도형의 구조처럼 몸 안에 몸들이 있듯, 얼굴 안에 얼굴이 있다. [생명 탄생과 자연] 시리즈는 빛과 어둠의 관계 속에서 태어난 생명들은 눈코입귀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생명이 유지되기 위한 자연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구멍들을 강조한다. 어둠 속에 깊게 뿌리를 내린 채 빛을 지향하는 나무는 자연이 근본적인 이원 항과 가지는 관계를 대표한다. 인간들도 이 질서와 함께한다. 그의 작품의 식물 씨앗의 발아와 동물 배(胚)의 발생 사이의 유사한 과정을 한 화면에 중첩시킨다. [순환] 시리즈는 해골과 빛의 관계를 통해서 죽음이 끝이 아닌 순환과정의 일부임을 말한다. 



품(Grade) ③Mixed media on paper152×122cm



순환 Circulation②Mixed media on paper120×130cm


작품 [순환 2]에서는 그가 주로 사용하는 화이트메탈(알미늄)이 아닌 동을 사용하여 부식의 과정을 순환의 일부로 상정한다. 그의 작품에서 서사를 이끄는 군중들은 늦은 가을의 낙엽같은 양상이지만, 순환의 과정은 이듬해의 재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작품 속 군중들은 먹으로 연출된 깊은 공간 여기저기에 다른 밀도로 배치되면서 각자 주어진 생의 시간을 통과한다. 순환하는 우주에서 시점도 종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차별적이지는 않다. 작품 [당신은 뒤에서 몇 번째 서 있습니까?]는 울퉁불퉁한 바탕 면에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통해 삶이라는 만만치 않은 여정을 표현한다. 긴 작품 제목은 끝없이 순서를 정함으로서 질서를 유지 강화하는 속성을 가진 시스템 안에서 앞 순위보다는 뒷순위에 대한 배려가 있다. [품(Grade)] 시리즈는 진리 탐구의 여정에도 급이 있음을 예시한다. 삼각형을 비롯해서 상승 구도의 화면의 정점에 다가갈수록 소수만 남는다. 


[빛과 욕망의 상관관계]는 461x140cm의 벽화급 대작이다. 그 안에서 이합집산하는 사람들에서 정장을 입은 인간들의 눈, 코, 귀, 입으로 나타나는 7개의 구멍이 없다. 작가는 물질과 에너지가 드나드는 그 구멍들이 욕망과 관련된다고 본다. 어두운 구멍들의 삭제는 어둠과 상대적인 관계인 빛을 강화한다. 작가는 ‘이러한 7개의 구멍들이 물질문명을 발달시키고 우리의 삶을 성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친 욕망으로 인간을 고통과 시련을 겪게도 한다.’ 끝없는 욕망을 추동하는 구멍들과 진리의 깨달음은 어떤 관계를 가질까. 작가는 흑백논리를 지양한다. 죽음은 삶의 끝자락이 아닌 한가운데 있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본능의 핵심에 죽음이 있음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죽음 본능은 이전의 상태를 복원하려는 유기적 생명체에 내재한 어떤 충동이다. 모든 유기체가 무기체로부터 나왔으므로 유기체는 본능적으로 그 이전의 무생물, 혹은 정지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빛과 욕망의 상관관계 Correlation between light and desireMixed media on paper 461×140cm



 부분



빛의 길 The Path of Light먹(ink) on paper 92x100cm


죽음에 가까운 금욕, 수행 등은 여러 종교적 관행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삶의 빛나는 정점인 예술에서도 그 묵직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둠과 죽음의 몫이다. 욕망같은 원초적 본능은 어둠에 실린 죽음의 기운을 요구한다. 빛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어둠은 필요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욕망은 반복적이다. 생물학적 욕구와 달리 끝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욕망은 반복적으로 일어난. 그의 작품에는 우선 금속으로 만든 편린들의 반복이 편재한다. [쾌락원칙을 넘어서]의 논리에 의하면 반복강박은 쾌락원칙보다 더 원시적이고 더 본능적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적인 정신 과정에서 반복, 즉 동일한 어떤 것을 다시 경험하려는 것은 쾌락의 한 요소이다. 고통도 반복되는데, 그것은 위험 상황을 잊으면 안되는 자기 보호와 치유를 위한 심리적 기제이다. 배일린의 작품에서 보이는 반복적인 수행성은 죽음과 쾌락을 대립이 아닌 짝패의 관계로 간주한다. 


끝없는 욕망은 진리 추구의 과정도 추동할 수 있다. 전체 화면에서 명암은 두루 교차하면서 높은 파도같은 역동성을 연출한다. 작품 [빛으로 가는 길 (超人Übermensch)]에서 화면의 중앙에 대치된 머리는 내부로부터 파열된다. 찢겨진 종이의 물성은 파열의 강도를 표현한다. 어둠을 뚫고 나가려는 압력은 바깥을 향한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빛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가 않다. 어떤 임계점을 넘어 도약하고 비약해야 한다. 작가는 그런 고통을 이겨내는 존재를 ‘초인(Übermensch)’으로 생각한다. 그의 작품에서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의 끝없는 순환은 니체의 초인사상에 깔린 영겁회귀와 연결된다.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친 영겁회귀의 신화는 단선적 역사를 부정하는 순환적 시간관을 내포한다. 다시 태어나도 작업하는 삶을 선택할 예술가는 되돌아오는 것, 즉 필연만을 믿는다. 이러한 되돌아옴 속에 진정한 차이가 깃들며, 예술작품 또한 그러한 반복과 차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