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의 풍광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장하의 ‘지평(地平)에서’ 전은 경계선상의 시공간인 지평들이 등장한다. 지상적 존재들은 삶의 터전이 대부분 지평 아래이며, 그곳은 생사고락을 비롯한 모든 사건의 장(場)이 된다. 대체로 땅에 해당되는 영역이지만, 그의 작품처럼 재현주의를 벗어난다면 토대로서의 견실함은 흔들린다. 그의 작품에서 지평에 속할 대지는 유체같은 유동성을 가진다. 창공을 연상시키는 지평 위 또한 밀도는 다르지만, 세계를 이루는 조형적 원소들이 운동하는 장(場)이다. 그자체로 무기물인 대지는 수많은 유기체의 흔적을 품고 있다. 지상에 존재하는 생명의 자국들은 유형, 무형의 형태로 남아있다. 기억같은 정신으로도, 사물이나 잔해같은 물질로도 남는다. 그는 ‘기억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는 드넓은 지평의 풍광...그곳엔 생명의 숨결과 발자취, 그리고 무수한 세월의 흐름이 배어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코드화되는 시대, 인간의 경험은 점차 그러한 대지적인 것을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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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삶이 대지적 실재 아니라면, 다른 어디로 정착되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의 작품은 근대 이후 영원한 과도기의 시대를 풍경의 어법으로 풀어낸다. 모든 것들이 자리를 잡지 않은 채 부유하는 와중에 간혹 인간의 의지와 기술력이 관철된 수직 구조의 형태들이 보이지만 그 또한 그 좌표가 불확실하다. 수직 구조에 간혹 써 있는 숫자들은 그것들이 영원한 기념비일 수 없음을 말한다. 그의 작품에는 기록되지도 의미화되지도 않은 무명의 것들이 더 많으며, 물질 또한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특정 기간이 아닌 장기 지속의 장인 대지는 한 겹이 아닌 수많은 겹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한시적 시간을 살았던 생명들 또한 자연이라는 거대한 순환 주기에 진입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와중에 시계라는 도상의 편재는 시간에 찍한 방점을 알려준다. 영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 자체가 영원하다. 시간은 변수가 아닌 항수 이며 삶은 물론 죽음까지 포괄한다.
시간이 가속도가 붙으면서 기술과 자본 중심의 권력이 추동하는 변화에 멀미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은 변화가 곧 새로움이고 진보라는 공식을 무색하게 한다. 이장하의 작품은 풍경을 전제하지만, 그는 풍경이 아닌 풍광임을 강조한다. 광대한 지평을 깔고 있는 그의 작품은 여행을 즐겨하는 경험이 반영돼 있다. 그는 오랜 기간 ‘아시안 웨이’ 그룹 활동을 통해서 해외교류전을 가지면서 드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 여행을 자주 했으며, 국내에서도 주변에 있는 이름 모를 산야에서 뜻밖에 펼쳐지는 광활한 풍광과 마주칠 때가 종종 있다. 광활한 지평 속에서 물과 공기 같은 흐름 및 강물이나 길 등의 흔적은 변화무쌍하게 나타난다. 확정되지는 않은, 그렇다고 완전한 추상도 아닌 경계의 시공간은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 미지의 세계다. 그가 감흥을 받았던 풍경 하나하나가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수없는 풍경들이 겹쳐 풍광으로 나타난다. 풍경에 비해 풍광은 재현주의를 극복하는 현대적 경향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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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재현의 형식들은 자신이 근거짓는 것을 향해 기울어진다는 점을 비판한다. 가령 사과를 그린 그림에 대해 대개 ‘저건 사과야’라고 단언하는 것으로 끝난다. 지시대상을 의미와 동일시하는 관례에 대해 르네 마그리트를 비롯한 현대미술가들의 비판과 반성이 있었다. 재현이 ‘형상과 질료라는 짝’(아리스토텔레스)과 관련된다면, ‘질료들을 용해시키고 모형화된 것들을 해체하는 추상적인 선과 무바탕의 짝은 훨씬 더 심층적이고 위협적’(들뢰즈)이다. ‘규정되지 않는 어떤 전(前)개체적인 독특성의 세계, 마주침과 공명이 조성되는 세계...재현을 넘어서고 허상들을 불러들이는 세계...모든 것이 생겨 나오는 무바탕’(들뢰즈)이 중요하다. 이장하의 작품은 하나의 중심만을 지니는 재현이 아니라 다원적인 중심들을 함축하며 운동한다. 에너지를 품고 있는 물질은 유연한 풍광을 이루며, 무엇이든 품고 무엇이듯 뱉어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그의 풍광은 많은 것을 포함하며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거칠거칠한 바탕으로부터 시작된다. 바탕은 재현적 대상의 배경이라는 의미가 강하므로 들뢰즈를 따라 ‘무바탕’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지평에서]라는 제목은 추상적이긴 해도 풍경의 요소가 있고, 이는 중력의 방향이 분명함을 말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아랫부분의 밀도가 높다. 가령 그의 작품은 거꾸로 걸릴 수는 없다. 풍광들은 여러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가족 유사성을 이루며, 한 인간의 몸과 마음, 정신이라는 깔대기를 거친다. 반복되는 요소는 작품의 무의식적 층위와 관련된다. 회화적 속성이 강한 야생적 배경과 그 위에 정확한 외곽선을 갖춘 인위적 형태들이 부유하는 형식적 구조가 공통적이다. 그 구조는 2010년경부터 나오지만, 당시에는 기하학적인 면이 강했고, 요즘 작품은 보다 회화적이다. 좀 더 풀어진 구조에는 더 많은 것들이 잠재해 있다. 하지만 1990년 초창기 개인전 당시 개념적 맥락에서 복사와 인쇄 등을 그림에 활용한 점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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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하의 그림은 붓으로 칠해졌다기 보다는 만든 것으로, 그만큼 우연적 요소에 개방돼 있다. 일상적 경험에서도 여행지의 풍경들은 열려있기 마련이다. 실제의 여행처럼 가상적 여행은 난데없음을 환영한다. 예술은 현실보다 거리감을 가지고 조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자유롭고 유쾌하다. 여러 형태가 있지만 회화적 바탕 면에 여러 위치에 여러 크기로 배치되어 추상적 원근감을 가진다. 원색이나 야광색 등 가시성이 높은 색을 가진 형태들은 종적으로 그리고 횡적으로 확장한다. 추상적 원근감에 의해 그것들은 회화적인 바탕 면에서 떠오르는 듯도 하고 사라지는 것도 같다. 혼돈의 (무)바탕에서 질서감 있는 것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지평 아래 뿐 아니라 위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현실 세계는 이미 공중에도 와이파이부터 스타링크까지 여러 기호들이 활주하는 장이다. 공간에서 부유하는 무한대 기호, 타원. 원, 반원, 숫자 등은 공중에도 이미 빈 곳이 사라지는 환경을 말한다.
숫자는 특별한 생각 없이 써넣기도 하지만 그만큼 무의식적 선택이다.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바탕과 그 위에서 부유하는 형태들은 ‘잠재성과 현실성’(질 들뢰즈)의 관계를 가진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라캉에 따르면 현실원칙의 지배 아래 있는 현실적 대상들은 어느 곳에 있거나 어디에도 없다는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반면 잠재적 대상은 자신이 있는 곳, 자신이 향하는 곳에 있으면서 있지 않는 속성을 지닌다’고 대조한다. 들뢰즈는 잠재적 대상을 확실하지는 않아도 실재적인 대상을 구성하는 엄정한 부분으로 정의한다. 가령 ‘구조는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이다. ‘잠재력을 띤 어떤 것, 또는 잠재적인 것에 대하여 현실화된다는 것은 언제나 발산하는 선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 안의 차이와 반복은 현실화의 운동, 창조로서의 분화의 운동’을 낳는다. ‘잠재적인 것은 언제나 차이, 발산, 또는 분화를 통해 현실화된다.’(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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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주의를 비판하는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에 호소하는데,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적인 것에 대립할 뿐이다.’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이고, 동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지향한다. 잠재적 역량이 현실적 대상으로 탈바꿈되는 과정이 분화이다. 현실화, 분화는 언제나 진정한 창조’이다. 이장하의 작품에서 분화되어 나오는 기하학적 기호들이 그것이다. ‘현실화는 세 계열에 따라 이루어진다. 공간 안에서, 시간 안에서, 그러나 또한 어떤 의식 안에서 진행된다. 분화는 어떤 선들의 창조를 함축하고 바로 그 선들을 따라 이루어진다. 사물은 잠재적 상태에서 현실적 상태로, 그리고 다시 잠재적 상태로 변화해 간다...’(들뢰즈) 현실성과 잠재성의 관계는 철학적 개념이기는 하지만, 삶과 죽음의 관계로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으로부터 삶이, 삶으로부터 죽음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관념이란 이러한 이치의 또다른 표현이다.
휴지 등의 매개를 거쳐 거칠거칠하게 만들어진 기저면과 자를 댄듯 정교하게 만들어진 형태 사이에 엔트로피의 차이가 있다. 현대사회에서 알 수 있듯 겉으로의 질서는 무질서를 감추고 있다. 인간 사회는 질서/무질서를 조율하는 기제들이 작동한다. 예술은 물리의 법칙을 거슬러 (무)질서도의 방향을 조절할 수 있지만, 양자의 차이에서 의미가 생성된다. 카오스든 코스모스든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외곽선이 분명하다고 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시계는 시간의 요소로 선택됐고 사진 이미지를 참조했지만, 그냥 꼴라주가 아니라, 인쇄 이미지를 물감으로 정착시켜 만든다. 달은 시계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나타내는 도상이다. 그는 작품의 바탕 또한 중간에 요철이 있는 흡수력 강한 종이를 두고 물감을 부어 빠져나가는 식으로 제작한다. 캔버스 위에 종이 깔고 물감을 부으면 물감이 배어 나와서 그것이 만든 자국들이 독특한 화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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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방법은 사실적 재현이 아닌 무의식적 풍경에 어울린다. 그러나 무의식 또한 의식으로부터 온다. 그의 풍광에는 지평을 이루는 지형들, 가령 들판, 숲, 강, 황야, 등이 깔려있다. 색감은 푸른, 노랑, 연두, 주황 등이다. 밝은 부분은 대개 길을 은유한다. 그의 풍광에서 인간은 형태가 아닌 숫자나 부호 같은 선적 기호로 나타난다. 현실성/잠재성 간의 철학적 관계는 현대미술을 다룬 들뢰즈의 다른 저서에서 또 다른 대조항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질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추상회화에서 발견되는 코드와 돌발적인 흔적이라는 형식적 특성을 대조한다. 기하적 추상은 코드로 생각되며 서정적, 뜨거운 추상 등으로 해석되는 회화는 돌발 흔적이 중요할 것이다. [감각의 논리]는 전자의 예로 ‘회화의 코드를 형성하고 또 회화를 가지고 하나의 코드를 만드는’ 경우를 말한다. 코드적인 작품에서 ‘종합한다는 것은 모든 형태들을 직선이나 몇몇 각들, 호나 타원형과 같이 작은 수효의 형태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으로 구성된다.’(세뤼지에)
‘종합이란 따라서 일종의 요소들의 분석’(질 들뢰즈)이다. 가령 수직/수평, 삼원색 같은 조형적 요소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엄격한 작품은 돌발 흔적들로만 채워진 추상표현주의와 대조된다. [감각의 논리]의 기준에 의하면 이장하의 작품은 양자를 ‘완화해서 사용하는 중용적인 길’(들뢰즈)에 해당된다. ‘이때 돌발 흔적은 코드의 상태로 축소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전체 그림을 다 차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코드와 혼란을 동시에 피한다.’(들뢰즈) 그의 작품은 [on the horizon]이라는 제목과 어울리게 블루와 화이트가 주조 색이다. 화면 상단의 화이트 존은 좀 더 희박한 공기의 느낌이다. 전경에 배치되곤 하는 큰 타원형은 선 내부를 가로지르는 선들이 있다. 가로줄이 배열된 둥근 형태는 다양한 크기로 추상적인 원근감을 준다. 요컨대 작은 원은 좀 더 멀리 있는 듯이 보인다. 큰 원을 채우는 도상 중의 하나가 시계다. 시계는 마치 열기구의 풍선같은 모습으로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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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하의 작품은 구성요소가 비슷해서 연이어서 보면 역동적이다. ‘다음’ 화면에는 ‘이전’ 화면에 없던 것이 나타나고, 있던 것은 사라지거나 멀어진다. 대기는 보다 안정되어 ‘지평’이 보다 확실하게 보이기도 한다. 바탕 면 위에 떠 있는 기하적 형태들은 대부분 눈에 띄는 색으로 명료한 외곽선과 더불어 인공물의 느낌이지만 그것들의 좌표는 불확실하며 의미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여러 매개를 거쳐 바탕으로부터 나와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직관을 야기한다. 지상적 풍광 속에 좀 더 희박한 지역은 여러 방향으로 나 있는 길이다. 오돌도돌한 표면 질감을 가진 종이를 중간에 대고 물감을 부어 만든 바탕에는 매개가 되는 층의 질감이 반영된다. 그 위에 유영하듯 부유하는 원을 비롯한 기하적 형태들은 바탕의 촉각성과 대조되는 광학성을 보여준다. 빛을 머금은 화려한 색으로 줄지어 반복된 형태, 무한대의 기호 등은 자연이 아닌 인공의 산물이다.
촉각성/시각성의 대조는 자연/인공, 잠재성/현실성, 에너지/물질, 실재/코드 등의 대조로 확장될 수 있다. 기하적 형태를 이루는 요소들 중 관객이 알아볼 수 있는 기호들은 시계를 비롯하여 와이파이(처럼 보이는 파), 무한대 등이다. 지평은 선이나 면이 아니라 색감의 차이로 암시된다. 인간 사회는 표준이 되는 시간 약속이 있지만, 그 또한 역사적으로 변화한다. 시간에 대한 감각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근대에 표준시라는 개념이 성립되었고, 현대의 시간은 보다 가속화 된다. 그의 작품은 복합적인 지층에 어울리는 여러 시간이 존재한다. 다른 작품에서 수직으로 찍혀있던 점이 다른 작품에서는 수평으로 찍히고 한쪽 끝은 숫자로 변해있곤 한다. 그의 작품에서 색 얼룩으로 나타나는 흔적은 외곽선이 분명한 형태로 형태는 흔적으로 끝없이 변화한다. 반원형의 변주들이 등장하는 작품은 리듬감이 두드러진다. 전봇대나 풍력발전기, 송전탑 등 거대한 수직 구조물은 인공물의 대표적 도상이며 구조물 끝에는 숫자들이 써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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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아래의 진한 부분이 많은 작품은 그의 지평이 땅속까지 뻗어있는 듯하다. 반원형들이 서로 등을 대고 배치된 도상은 마치 나비같은 모습으로. 중간에 간격이 있어서 더욱 경쾌하다. 색색의 둥근 형태는 사각형이나 원 등 여러 도형으로 조합되어 나타난다. 시계는 여러 원 중의 하나지만 대개 크게 자리하며 색감이나 명도 등을 통해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화면 곳곳에 배치된 여러 크기의 시계들은 다양한 시간들을 표현하며 공간에서 자유로이 유영하는 듯한 작은 둥근 형태도 시계로 간주 될 수 있다. 질서 감각을 부여하는 시계는 다른 형태와 형상들에 비해 명료하고 숫자도 많지만, 그만큼 다양한 시간의 공존을 말한다. 다양하게 펼쳐지는 생성의 세계는 하나의 중심을 향하는 재현주의와 멀어진다. 재현주의는 19세기적인 사실주의를 넘어서 과학기술적, 관료적 장치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에, 이를 상대화시키는 예술적 노력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