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turn to Nature(자연회귀)〉, 2025, 아크릴 패널 위 플라스틱 단추, 한지 단추, 비즈, 핀, h235×w270×d9.5cm

〈Noble Wind(고귀한 바람)〉, 2025, 나무 패널 위 한지, 플라스틱 단추, 비즈, 핀, h130×w300×d11cm
올겨울 뉴욕의 한파는 유난히 매섭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계절의 무게가 스며 있고, 도시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움츠려 있다. 그러나 맨해튼 중심부 코리아소사이어티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설치미술가 황란의 개인전《고귀한 개화(Noble Blossoms)》(1.27-4.17)에 들어서는 순간, 창밖의 겨울은 잠시 유보된다. 아직 자연의 매화가 피어나기 이른 시기지만 전시장 안에는 황란의 매화가 화사하게 피어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수는 많지 않다. 그러나 오프닝에서 마주한 작품들은 오랜 숙고 끝에 탄생한 대작으로 강한 집중력을 만들어낸다. 관객은 작품 앞에 머물며 표면의 미세한 층위를 따라가고, 단추와 핀이라는 일상의 재료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변환 속에서 조용한 감탄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는 30여 년 동안 단순한 재료를 진지하게 탐구하며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더욱 심화해 왔다.
전시의 주요 공간인 ‘선비의 방’은 절제와 풍류의 정신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한지 위에 단추를 촘촘히 박아 전통 기와의 질감을 구현한 〈Noble Wind(고귀한 바람)〉(2025)는 매화를 통해 선비의 고결함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핵심 작업이다. 순색 한지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크기의 연한 백자 빛 단추들이 기와의 구조를 이루고, 길게 뻗은 가지 위에 피어난 흰 매화는 수묵화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다. 반복적으로 배열된 단추의 표면은 일상의 물성을 넘어, 시간의 축적과 전통 공간의 기억을 조용히 환기한다.
이와 마주한 약 3m 규모의 〈Return to Nature(자연회귀)〉(2025)는 병풍 회화 전통을 동시대 설치 언어로 확장한 작업이다. 다층적 플렉시 글라스 구조 위에 형성된 상부에는 깎아낸 산의 윤곽이 드러나고, 그 아래로 선비의 옥색 두루마기를 연상시키는 배경 위에 분홍빛 매화가 바람에 흩날리듯 펼쳐진다. 겹겹이 중첩된 패널 위에서 형성되는 색의 미묘한 흔들림은 꽃잎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며, 작품 표면에서 형성되는 시각적 리듬은 겨울의 정적 속에서 생명의 흐름을 차분하게 환기한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되는 공간 해석은 개별 작품을 넘어 갤러리 창문을 전통 창살문 구조로 연출한 설치에 있다. 이 장치는 단순한 장식 요소를 넘어 작품과 건축, 그리고 관람자의 이동 동선을 유기적으로 엮어낸다. 뉴욕이라는 글로벌 도시 중심부에서 경험되는 이 공간은 한국 전통이 지닌 정신적 품격과 미적 정서를 자연스럽게 환기한다.
이에 대비되는 ‘매창의 방’은 보다 서정적이며 내면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실제 자개 농 문짝과 자수로 구현된 매화가 결합된 설치는 전통 여성 공간의 기억을 환기시키며, 사라져가는 생활 문화의 감각을 현대적 조형 언어로 다시 불러낸다. 자개 표면에서 반사되는 은은한 빛과 손바느질로 완성된 매화의 섬세한 질감은 여성 공간이 지닌, 포근하고 넉넉한 정서를 전달한다. 특히 버려진 가구 재료를 재구성한 방식은 전통 미감의 소멸에 대한 애도이자 새로운 생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작가의 조형적 태도를 보여준다.
황란의 작업은 장식성과 기념성 사이를 오간다. 단추와 실이라는 평범한 소재는 반복적 수행 속에서 명상적 조형 언어로 확장되고, 자연과 시간, 삶의 순환이라는 동양적 세계관을 조용히 드러낸다. 겨울 속에서 피어난 황란의 매화는 계절의 재현을 넘어,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 내면의 품격과 생명력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상징한다. 이러한 작업은 뉴욕을 기반으로 한국과 유럽, 아시아를 넘나들며 주요 미술 기관의 소장으로 이어지며 그 조형 세계를 확장해 왔다.
- 현수정 뉴욕 기반 독립큐레이터. 몽클레어주립대 아시아미술사 강의, AHL 재단 미주 한인 아카이브 수석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