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32일의 여행〉, 2025, 천 위에 혼합재료, 324.4×130.3cm
우)〈32일의 여행〉, 2023, 천 위에 혼합재료, 65.1×80.3cm


어찌 보면 화가의 길은 기쁨의 길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난의 길이기도 하다. 기쁨이란 즐겁게 그림을 그리니 쾌락의 측면을 두고 하는 말이요, 고난의 길이란 작업이 안 풀릴 때의 정신적 고통을 가리키는 말이다.

얼마 전 세종뮤지엄갤러리에서 열린 《안정숙: 32일의 여행》(1.21-2.8)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부제로 미루어 보면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긴 여행에 비유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캔버스는 얇고 가는 무수한 실들로 온통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길을 암시하는, 붉거나 푸른, 혹은 녹색이거나 보라색조를 띤 100호 이상의 대형 작품은 흑백 단색조의 기미를 띤 작품과 함께 전시장을 화려하면서도 한편으론 침잠되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안정숙의 작품을 보면서 약동하는 생의 환희를 느꼈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진귀한 체험이었다. 

그런 감정은 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색일까? 형태일까? 아니면 그림의 소재가 된 자연? 대체 그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살아있다’는 현존적 느낌을 갖게 만든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못내 궁금하여 1주일 후에 다시 전시장을 찾았는데, 이런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넓은 전시장에는 사계(四季)가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색과 형의 외피를 쓰고 찾아온 것이다! 
진달래가 보랏빛 너울을 쓰고 미풍에 살랑대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파란 여름 하늘이 성큼 내 앞에 당도해 있는 게 아닌가. ‘생의 약동’을 느끼게 만든 것이 분명한 진홍색의 단풍이 저 멀리서 손짓하는 사이, 겨울이 어느덧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설악(雪嶽)의 차림새로 종장을 맞는다. 

안정숙은 촘촘하고 미세한 격자형 천을 씌운 대형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눕히고 작업을 한다. 그런 그녀에게 캔버스는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開豁地)와도 같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사각으로 막힌 한정된 땅이지만, 정작 작업을 할 때는 상상을 통해 개활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할 때, 그림에 정수(精髓)로 남는 것은 몸속에 각인된 체험들이다.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육화된 여러 경험이 물질을 통해 현전(現前)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계를 수놓은 각양각색의 꽃과 땅 위에 나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이 추상의 외피를 쓰고 환유(換喩)하며 캔버스에 모습을 드러낸다. 드디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안정숙은 천 위에 물감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다. 여기까지는 다른 작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 실이 추가된다. 길 혹은 인생에 대한 비유이자 상징으로서의 실이 더해지면서 안정숙의 작업은 단연 이채를 띠기 시작한다. 의미의 덩어리의 길로 성큼 들어선 것이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실이 아니라 가는 물감의 자취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오브제(objet)라니, 놀랍지 않은가? 캔버스를 앞에 두고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안정숙은 실을 캔버스 천에 붙이고 그 위에 물감을 흘리고 뿌리며, 추억 속에 아스라이 묻힌 기억을 소환하는 작업에 몰입한다. 그러한 작업을 가리켜 ‘지난하다’고 하거니와, 서두에서 언급한 ‘고난의 길’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작품을 보고 왜 생의 약동을 느꼈을까?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냥 그렇게 다가온 것이다. 특히 붉은색 단풍이 타오르는 것 같은 가을 정취를 담은 그림이 그러했다. 이심전심을 이룬 안정숙의 그림은 촉각성이 두드러진 ‘몸의 언어’다.